사람을 믿지 않는 글쓰기 (가치판단)
나는 사람을 믿으면서 살지 않습니다. 누구이든, 그저 ‘바라보면’서 삽니다. 나는 나대로 바라보고, 곁님과 아이들은 곁님과 아이들대로 바라봅니다. 훌륭하다는 분은 훌륭하다는 분대로 바라보고, 어설프거나 바보스러운 사람은 이런 대로 바라봅니다.
‘믿고 안 믿고’는 가치판단을 하는 눈길이라고 느껴요. 그래서, 누구를 믿거나 안 믿으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바라보거나 지켜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누구를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습니다. 남이든 나이든 ‘옳거나 그르다’는 잣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저 그대로’ 바라보려고 할 수만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에서 ‘남을 해코지하려’는 글을 쓰는 사람을 꽤 자주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 발돋움하는 동안 ‘얼굴하고 이름을 숨긴 채 뇌까리는 바보스러운 글’이 자꾸 불거집니다. 이죽거리는 글만 쓰도록 하는 누리집도 꽤나 많습니다.
이른바 ‘인신공격’이나 ‘비방’이라고 할 만한 글일 텐데, 인신공격이나 비방을 한들, 참말 남을 해코지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신공격은 언제나 ‘이런 글을 쓰는 사람 스스로’를 갉아먹는(공격하는) 노릇이 될 뿐입니다.
잘못이고 안 잘못이고를 따질 일은 없다고 느껴요. 남을 해코지하려는 글을 쓴 사람이 스스로 잘못이라고 느낀다면, 처음부터 그러한 글을 쓸 마음을 품지 말 노릇인데, 그러한 글을 쓰고 말았다면 왜 그러한 글을 썼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얼마나 바보스러운 삶으로 나아가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핑계를 대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다른 막말을 덧보탠다고 해서 달라질 삶은 없습니다. 남을 해코지하려는 마음 그대로 왜 내가 나 스스로 내 삶을 바보스레 망가뜨리려 하는가를 똑똑히 ‘바라보지’ 않고서야 내 삶에 웃음이나 노래가 흘러나올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이런 글에서는 괜찮’고 ‘저런 글에서는 얄궂’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누군가 이런 두 가지 모습을 보인다면 ‘두 얼굴(이중성)’이 될 테고, 겉과 속이 다른 셈이 될 테지요. 이 사람한테는 착하되 저 사람한테는 나쁘다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일 뿐, ‘두 사람’이 아닙니다. 한 사람한테서 두 가지 모습이나 세 가지 모습이 드러난다면, 이녁은 아직 스스로 사랑하는 길을 모르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오롯이 서지 못했다는 뜻이고,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는 뜻이며, 아직 삶을 배우거나 가꾸거나 짓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데이트폭력을 저지른 사람이 진보논객이든 수구논객이든 ‘데이트폭력’은 언제나 ‘데이트폭력’입니다. 표절을 저지른 사람이 인기작가이든 무명작가이든 ‘표절’은 언제나 ‘표절’입니다.
나는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조차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나는 나 스스로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웃는 나를 바라보고, 우는 나를 바라봅니다. 노래하는 너를 바라보고, 춤추는 너를 바라봅니다.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고, 사랑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바라보면서 배우고, 배우기에 삶을 지으며, 삶을 짓기에 글을 쓰거나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은 옳으니 저 사람은 그르다’ 하고 말할 수 없고, 이런 말을 할 까닭도 없습니다. ‘이 말은 옳고 저 말은 그르다’처럼 금을 그을 수 없고, 금을 그을 까닭도 없습니다. 모든 글하고 말은 ‘태어날 만한 까닭’이 있어서 태어납니다. ‘태어날 만한 까닭’을 그저 그대로 바라봅니다. 4348.8.4.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삶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