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291) -에 대한 -의
사랑에 대한 너의 정의는 무엇이냐
→ 사랑을 너는 어떻게 정의하느냐
→ 사랑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 너는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국말에 ‘-에 對하다’나 ‘-에 對한’은 없습니다. 이 말투는 외국말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갑자기 생겼습니다. 아주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처음 영어를 배우는 어린이조차 이러한 말투에 길들거나 물듭니다.
이를테면, “숲에 대하여 알아보자”나 “마을에 대하여 알아보자”처럼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많은데, “숲을 알아보자”나 “마을을 알아보자”처럼 고쳐써야 올바릅니다. “너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잘못 쓰는 말투예요. “네 이야기”나 “내 이야기”로 바로잡아야 올발라요.
잘못 쓰는 말투와 새로 쓰는 말투는 다릅니다. 잘못 쓰는 말투가 아무리 널리 퍼졌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말투는 ‘새로운 말투’가 아닙니다. ‘잘못된 말투’일 뿐입니다. 슬기롭게 빚어서 아름답게 쓰는 말투일 때에만 ‘새로운 말투’입니다. 슬기롭지 않고 아름답지 않으며 잘못 받아들여 쓰니 앞으로도 언제나 ‘잘못된 말투’예요. 앞으로 쉰 해가 흐르든 백 해가 흐르든 ‘-에 대하다’와 ‘-에 대한’은 꼭 털거나 씻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4348.7.30.나무.ㅅㄴㄹ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복종이라는, 이 거의 모든 사회조직의 근본은
→ 소수자에 다수자가 복종하는, 이 거의 모든 사회조직 근본은
→ 몇몇 사람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이 거의 모든 사회를 이루는 바탕은
《시몬느 베이유/곽선숙 옮김-억압과 자유》(일월서각,1978) 215쪽
“소수자에 다수자가 따르는”이나 “소수자가 다수자를 다스리는”으로 손질해서 써야 올바릅니다. 이 글월은 번역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와 샤머니즘에서는 고통과 시련에 정면으로 맞설 때 지혜가 발현된다고 한다. 나약함은 강인함이 되고 타자에 대한 자비의 원천이 된다
→ 불교와 샤머니즘에서는 괴로움과 힘겨움을 똑바로 맞설 때에 슬기가 샘솟는다고 한다. 여린 마음은 굳세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탕이 된다
《조안 엘리자베스 록/조응주 옮김-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민들레,2004) 68쪽
한국말은 ‘남’입니다. 한자말은 ‘他者’입니다. 두 낱말을 나란히 놓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낱말을 골라서 생각을 나타낼 때에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우리는 이웃하고 어떤 낱말을 주고받을 때에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이웃을 사랑하는 바탕”이나 “이웃사랑 바탕”이라고 하면 됩니다.
스스로에 대한 앎의 요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서 울려 퍼져 왔습니다. 과거의 현인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앎이 없이는 진리에 대한 신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스스로를 알려는 목소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지난날 슬기로운 사람은 스스로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 참된 길을 믿을 수 없는 줄 알았습니다
《비노바 바베/김성오 옮김-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착한책가게,2014) 353쪽
“앎의 요구”란 “알고 싶은 바람”이나 “알고 싶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스스로에 대한 앎의 요구”란 “나 스스로를 알고 싶은 바람”이나 “나 스스로를 알고 싶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말마디를 넣은 글월은 끝자락을 “울려 퍼져 왔습니다”로 맺습니다. 그러니, 이 말마디는 “스스로를 알려는 목소리”나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외침”으로 손보면 한결 잘 어울립니다.
이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간단하다
→ 이 물음에 간단히 대답한다
→ 한나 아렌트는 이 물음을 쉽게 풀이한다
《나카마사 마사키/김경원 옮김-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갈라파고스,2015) 176쪽
“이 질문에 그 사람은 간단히 대답한다”나 “이 질문에 그 사람이 대답하는 말은 간단하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더 살필 수 있다면 글짜임을 손질해서 임자말이 될 ‘그 사람(한나 아렌트)’을 맨 앞으로 옮기고 “이 물음을 쉽게 풀이한다”처럼 쓸 수 있습니다.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