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물어본다 레디앙 시선 - 일하며 부르는 노래 1
곽장영 지음 / 레디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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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0



시와 땀방울

― 가끔은 물어본다

 곽장영 글

 레디앙 펴냄, 2015.6.25. 1만 원



  여름에 한손에 낫을 쥐고 풀을 베다 보면 어느새 땀이 줄줄 흐릅니다. 이러면서 두 손은 흙물하고 풀물이 듭니다. 땀방울은 물로 씻으면 털어낼 만한데, 손에 배기는 흙물하고 풀물은 수세미로 벅벅 문질러도 좀처럼 벗겨지지 않습니다.


  여름에 부엌에서 밥을 짓다 보면 어느새 땀이 주르르 흐릅니다. 온몸에는 밥내음하고 국내음이 퍼집니다. 여름에는 밥상을 차리고 나서 아이들더러 먼저 먹으라 이르고는, 찬물로 한 차례 씻고 난 뒤에라야 비로소 밥상맡에 앉을 만합니다.



평생을 가려온 / 나무 그늘을 벗어나고파 / 파란 하늘에 안기고 싶었던 (상사화)


한 달을 다 비워갈 때면 / 어김없이 / 찾아오는 편지가 있다 / 이번 달에 떼어 갈 돈을 / 자세히도 적어서 (빚쟁이의 행복)



  곽장영 님이 빚은 시집 《가끔은 물어본다》(레디앙,2015)를 읽습니다. 노동조합 일을 오랫동안 했다고 하는 곽장영 님은 ‘일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진보정당’ 이야기를 싯말로 삭이고, 틈틈이 멧봉우리를 오르내리면서 마주한 숲바람 이야기를 싯말로 다스립니다. 술 한잔을 부딪히면서 돌아보는 오늘날 한국 사회 이야기도 찬찬히 싯말로 녹입니다. 때로는 이녁 아이하고 벌이는 실랑이가 싯말로 태어납니다.



텔레비전 못 보게 한다고 / 아홉 살 난 / 아들놈이 애비를 / ‘나쁜 놈’이란다 // 어르고 달래고 / 한 대 쥐어박으며 / ‘그건 잘못했다’고 인정하래도 / 그럴 수 없단다 (전세 역전)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으니, 텔레비전을 놓고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고 싶다든지 저것을 보겠노라느니 하면서 다툴 까닭이 없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는 우리 집에서는 전기삯을 낼 적에 시청료를 안 냅니다. 있지도 않은 텔레비전 때문에 시청료를 물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시골마을에도 ‘텔레비전 바꾸라’면서 찾아오는 영업 일꾼이 있으나, 텔레비전을 아예 안 들인 우리 집에서 그분들이 영업을 할 길이란 없습니다.


  곽장영 님이 텔레비전을 놓고 아들내미하고 실랑이를 벌인 시를 읽다가 피식 웃으면서 생각에 젖습니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치운다면, 아들내미하고 함께 시를 쓰면서 논다면, 집에서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으로 글놀이랑 그림놀이를 즐기다가, 함께 집 바깥으로 나간다면, 싱그러운 멧봉우리 나들이를 아이하고 함께 누린다면, 이때에는 어떤 시가 태어날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소주 한 잔 마시고 자다가 / 배고 고파 깨어서 / 김치 풀어 / 갱죽을 끓인다 (마늘)



  얼추 열흘 남짓 우리 시골마을은 농약바람이 불었습니다.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씨여도, 비가 멎는다 싶으면 농약 헬리콥터가 떠서 항공방제를 합니다. 날이 맑다 싶으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농약 헬리콥터가 시끄럽습니다. 비가 그쳐서 이불도 널고 빨래도 널려고 마음을 먹으나, 농약바람이 촤르르 부니까, 이불이나 빨래를 섣불리 마당에 널지 못합니다.


  농약 헬리콥터가 일을 마쳤는지 바깥이 조용하면, 아이들은 다시 마당으로 나가서 뛰놉니다. 마당에서 놀던 다섯 살 작은아이가 문득 잠자리 한 마리를 주워서 나한테 보여줍니다. “아버지, 여기 잠자리!” 그러네, 그런데 잠자리가 죽었구나. “그래, 잘 했어. 저기 꽃밭 흙에다 놓아 주렴.”


  아이들도 알리라 느낍니다. 나비하고 잠자리가 왜 죽는지를. 농약 헬리콥터가 떴다 하면, 날마다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들던 새들이 왜 안 찾아오는지를. 농약 헬리콥터가 농약을 뿌리는 동안 개구리가 왜 노래하지 않는지를.



이대로 가면 / 비가 될 수도 있겠다 / 이대로 가면 / 구름이 될 수도 있겠다 / 이대로 가면 / 안개가 될 수도 있겠다 / 이대로 가면 / 미끄러운 바위가 될 수도 있겠다 (안개비, 운악산에서)



  우리는 스스로 아름다운 숨결이 될 수 있고, 스스로 슬픈 숨결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구름도 되고 안개도 되며 바람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웃음이 되거나 노래가 되거나 눈물이 되거나 춤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묻는 씨앗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속에 심은 씨앗대로 천천히 자라서 피어납니다.


  이대로 가면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전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미움이 될 수 있으나, 이대로 가면서 평화와 민주가 될 수 있습니다.



아파트 뒤 베란다 열고 / 담배 한 대 피워 물었더니 / 개구리들 합창을 하는구나 (오만 1)


개나리 진달래만 꽃인 줄 알았다 / 철쭉과 아카시아만 꽃인 줄 알았다 (함박꽃)



  개나리도 꽃이고 진달래도 꽃입니다. 달걀꽃도 꽃이고, 괭이밥 노란 봉오리도 꽃입니다. 한국사람이 먹는 쌀밥도 ‘나락꽃(벼꽃)’이 지면서 맺는 열매입니다. 이제 지구별 누구나 즐겨먹는 빵도 ‘밀꽃’이 지면서 맺는 밀알을 빻아서 얻는 먹을거리입니다.


  서로 꽃 같은 목숨입니다. 서로 꽃다운 넋입니다. 내가 너를 아끼고, 네가 나를 돌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믿습니다. 시 한 줄은 바로 서로 꽃 같은 목숨인 줄 깨닫는 자리에서 씁니다. 시 두 줄은 언제나 서로 꽃다운 넋인 줄 알아치리면서 어깨동무하는 자리에서 써요.



한강은 밤이 없다 / 내게도 밤이 없다 (한강의 밤)



  시집 《가끔은 물어본다》를 쓴 곽장영 님은 가끔은 누구한테 물어 볼까요? 아마 곽장영 님 마음속에 깃든 님한테 묻겠지요. 나도 으레 내 마음속에 대고 묻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얼마나 너른 사랑인가 하고 묻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주고 옷을 빨아 주며 놀이를 함께 누리는 어버이로서 나는 얼마나 착한 사랑인가 하고 묻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고요히 마음속으로 묻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떤 하루를 지어서 즐거운 삶이 되도록 나아가려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잠들면서 새삼스레 물어요. 오늘 하루는 어떤 이야기를 지으면서 즐거이 노래하는 삶이 되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묻습니다. 물으면서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묻고 또 묻습니다. 묻고 또 물으면서 두 걸음을 내딛습니다. 다시 묻고 새로 물으면서 세 걸음을 뻗고 네 걸음으로 이으려 합니다. 천천히 한 발짝씩 떼면서 시가 자라고, 찬찬히 두 발짝 세 발짝 잇는 동안 아름드리 숲이 깨어납니다. 4348.7.23.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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