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꿈이 한데 모여
서정홍 지음 / 나라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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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0



시골사람이 일구는 투박한 꿈은 ‘사랑’

― 못난 꿈이 한데 모여

 서정홍 글

 나라말 펴냄, 2015.5.1. 1만 원



  거미 한 마리가 내 앞으로 줄을 드리우면서 내려옵니다. 거미를 바라보며 빙긋 웃은 뒤 마음속으로 말을 겁니다. 얘야, 네가 이리 내려오면 나는 이 집에서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손가락을 살그마니 뻗습니다. 거미가 줄을 드리우며 내려오다가 내 손가락에 톡 내려앉더니 깜짝 놀란 듯이 다시 줄을 당겨서 허둥지둥 위로 올라갑니다. 이 아이는 우리 집 한쪽에 거미줄을 치려고 한 듯합니다.


  거미를 눈여겨봅니다. 거미는 조금 뒤 다시 줄을 드리우고 내려오려 하지만, 나는 다시 손가락을 뻗어, 거미가 내려오는 자리에서 기다립니다. 거미는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거미가 집을 지을 만한 자리로 옮겨 줍니다. 집 안쪽에 줄을 치지 말고, 집 바깥쪽에 줄을 치기를 바라면서 거미를 더 지켜봅니다. 아무래도 이 둘레에는 줄을 치지 못하겠구나 싶은지, 거미는 다른 곳으로 사라집니다.



땅에 무릎을 / 수백 번 꿇지 않고서야 / 어찌 밥상 차릴 수 있으랴 (먹고사는 일)


이른 아침부터 감나무 가지에 / 온 동네 새들이 야단법석이다 /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나가 보니 / 아이구우, 이게 무슨! / 텃밭에 개미가 하도 많아 / 아내가 놓아둔 끈끈이에 / 개미는 안 붙고 / 참새 새끼 한 마리 붙어 파닥거리고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서정홍 님이 일군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나라말,2015)를 읽습니다. 경남 합천 황매산 언저리 멧골자락에서 흙을 일군다고 하는 서정홍 님은 ‘농사꾼 시인’입니다. 또는 ‘시인 농사꾼’입니다. 서정홍 님한테서는 ‘농사꾼’이나 ‘시인’이라는 이름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공장 일꾼으로 지낼 적에는 ‘노동자’하고 ‘시인’이라는 이름을 떼어놓을 수 없어서 ‘노동자 시인’이나 ‘시인 노동자’였고, ‘아버지 시인’하고 ‘시인 아버지’라는 이름으로도 지내다가, 이제는 호젓하게 ‘농사꾼 시인’하고 ‘시인 농사꾼’으로 숲바람을 마시면서 지냅니다.



산골 마을에 남의 논밭 얻어 농사지으며 산 지 서너 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바쁜 농사철이 되면 몸이 지쳐 밥 씹을 힘조차 없다는 것을. (달콤한 보약)


경운기를 몰고 / 산밭 아래 / 작은 샘을 지날 때마다 / 잠시 물 한잔하신다 // ―어이쿠우, 시원타! / 맨날 이리 고마워서 우짜노 // 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 작은 샘한테 인사를 하신다 (산내 할아버지)



  시를 쓰는 서정홍 님은 시를 쓰려고 이 땅에 태어났을는지 모릅니다.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지만, 서정홍 님이 마주하는 모든 일은 언제나 ‘시’라는 이야기로 새로 태어납니다. 공장에서 붙잡은 기계도 시로 바라보고, 시골에서 맞잡은 연장도 시로 바라봅니다. 아이를 낳아서 곁님하고 함께 돌보는 동안 곁님하고 아이를 시로 바라볼 뿐 아니라, 들에서도 길에서도 집에서도 꿈에서도 언제나 시를 그립니다.



혼자서도 잘 노는 / 다섯 살 개구쟁이 다울이가 / 살며시 다가와 묻습니다 // ―시인 아저씨, 상추는 물을 주면서 / 강아지풀은 왜 물을 안 줘요? / 상추 옆에 같이 살고 있는데 (상추와 강아지풀)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 도시에서 살다가 / 십 년 전에 산골에 들어와 / 농사지으며 살고 있으니 / 농사 나이로 열 살입니다 (산골 아이 구륜이 3)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예부터 누구나 노래를 부르며 살았습니다. 지구별에서 살아온 모든 사람은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노래를 짓고 부르며 나누었습니다. 가수라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삶을 가꾸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들일을 하며 들노래를 부르고, 바닷일을 하며 바다노래를 불러요. 나물을 캐며 나물노래를 부르고, 길쌈을 하며 길쌈노래를 불러요.


  서정홍 님이 빚은 시집에서 흐르는 시는 모두 서정홍 님 스스로 날마다 새롭게 가꾸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인이기에 쓰는 시가 아니라, 삶을 짓기에 쓰는 시입니다. 흙을 만지면서 흙밥을 먹기에 쓰는 시입니다. 바람을 마시고 숲을 바라보면서 쓰는 시입니다. 햇볕을 쬐고 구슬땀을 흘리면서 쓰는 시입니다.


  시골에서는 시골을 노래하는 삶이 되어 시를 씁니다. 도시에서는 도시를 꿈꾸는 삶이 되어 시를 씁니다. 시골에서 노래하는 삶이든, 도시에서 꿈꾸는 삶이든, 저마다 제 삶을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바라보면서 시를 씁니다.



이른 아침부터 지게를 지고 / 이웃집 다랑논에 모판을 나르고 // 으스름히 해 질 무렵에 / 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었습니다 (유월)


산밭에서 처음 딴 오이라며 / 아내가 내게 주었습니다 // 힘든 농사일 하는 / 당신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 내게 준 오이를 / 다시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 힘든 농사일 하는 / 당신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여름날)



  한여름으로 접어들면, 시골에서는 낮에 땡볕을 쬐며 일하기 힘듭니다. 가만히 서거나 앉아도 땀이 흐르거든요. 한여름에는 새벽 서너 시부터 일손을 놀려 아침에 쉽니다. 낮에 고즈넉하게 한숨을 돌리고, 햇볕이 누그러지는구나 싶을 때에 다시 일손을 잡습니다. 일이 많거나 바쁘면 땡볕에 흙빛으로 까무잡잡하게 온몸이 타면서 일하지요.


  시집 《못난 꿈이 한데 모여》를 이루는 시에는 땀내가 흐릅니다. 땀을 식히는 바람결이 감돕니다. 바람결에 싱그러운 숨결이 깃들도록 북돋우는 꽃빛하고 풀빛이 함께 섞입니다.


  오이를 따며 오이를 생각하는 노래를 부르고, 고추꽃을 보며 고추를 그리는 노래를 부릅니다. 나락을 심으며 나락꽃이 피고 지며 나락알이 굵어지는 꿈을 꾸고, 나락을 베면서 나락알을 갈무리하여 겨우내 즐겁게 먹는 꿈을 꿉니다.


  노래는 고스란히 시가 됩니다. 꿈은 모두 시로 다시 태어납니다. 노래는 어버이 입을 거쳐서 아이들 몸으로 스밉니다. 꿈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이야기에 살을 입히면서 새삼스럽게 피어나고, 아이들은 저마다 가슴에 새롭게 꿈씨를 심으면서 신나게 뛰놉니다.



지난 십 년, 내 가난한 삶과 함께 / 녹두밭으로 콩밭으로 수수밭으로 / 양파밭으로 마늘밭으로 생강밭으로 / 불평 한마디 없이 따라다닌 / 괭이가 비를 맞고 있다니! (괭이)



  마당에 천막을 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천막에서 놀고 싶다 하기에 천막을 칩니다. 천막을 치기 앞서 마당을 씁니다. 빗자루로 석석 쓰니, 여덟 살 큰아이가 “나도 거들어야지.” 하면서 빗자루를 가져옵니다. 다섯 살 작은아이는 “나도 도와야지.” 하면서 광에서 깔개를 꺼냅니다. 작은아이는 아버지하고 누나가 비질을 마칠 때까지 평상에 앉아서 놉니다.


  우리 아이들 멋지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비질을 마무리짓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밀린 일을 조금 합니다. 이제 자전거를 손질해서 골짝마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해가 하늘 높이 걸린 낮에 골짝물에 몸을 담그고 시원한 골짝노래를 부르자고 꿈꿉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마친 뒤 갈아입을 옷을 챙깁니다. 멧새는 후박알을 따먹으려고 마당으로 찾아들고, 제비는 오늘도 바지런히 먹이를 잡아서 처마 밑으로 나릅니다. 시골사람이 일구는 투박한 삶은 언제나 사랑이리라 느낍니다. 황매산에서 부는 고요한 바람이 짙푸르게 골골샅샅을 보듬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부는 바람도 싱그럽게 이웃마을로 날아가고, 다른 고장에서 부는 상큼한 바람도 우리 마을로 반갑게 찾아옵니다. 4348.7.1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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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7-17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지금 막 구입했습니다.

숲노래 2015-07-17 09:58   좋아요 0 | URL
풀내음에 땀내음이 섞인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곧 누리시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