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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테우 ㅣ 눈빛사진가선 13
권철 지음 / 눈빛 / 2015년 5월
평점 :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96
제주에는 ‘해군’ 아닌 ‘해녀’가 있어야 한다
― 이호테우
권철 사진·글
눈빛 펴냄, 2015.5.23.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아이는 어른이 되면서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냥 어른으로만 지내기도 합니다. 아이를 낳은 어른만 어머니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아이를 낳든 아이를 낳지 않든, 누구나 ‘늙은 사람’이 됩니다. 아이가 없어도 늙은 가시내는 할머니라는 이름을 얻고, 늙은 사내는 할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도시에서는 으레 할머니·할아버지라 하고, 시골에서는 할매·할배나 할멈·할아범 같은 이름을 씁니다. 고장에 따라서 할미나 할마시 같은 이름도 씁니다.
나이가 많이 든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까요? 몸에서 기운이 빠지고, 더는 움직이기 어려울 때에는 자리에 눕습니다. 자리에 눕고는 고요히 숨이 멎습니다. 고요히 숨이 멎은 뒤, 몸은 이 땅에 내려놓고 넋은 몸에서 빠져나갑니다. 몸은 처음 태어난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으로 태어나고, 넋은 그동안 깃들었던 몸에서 빠져나온 뒤 온누리를 돌다가 새로운 몸을 찾을 테지요.
해녀 할머니를 만난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제주의 대자연을 만끽하며 이호테우 해변가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풍경 대신 내 눈에 들어온 건 사람 키보다 더 큰 자루를 메고 가는 할머니 … 본능적으로 차를 세우고 할머니의 자루를 들어 주게 되었고, 한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해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에서만 보던 해녀를 이렇게 만나다니. (4쪽)
권철 님이 빚은 사진책 《이호테우》(눈빛,2015)를 읽습니다. 사진책 《이호테우》는 ‘이호테우’에서 일하는 해녀를 사진으로 담은 책입니다. 여행하는 사람이나 관광하는 사람이라면 ‘이호테우’를 제주섬에 있는 아름다운 바닷가나 모래밭 가운데 하나로 여길 테지만, 제주섬 이호테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언제나 물질을 하고 바닷살림을 꾸리는 삶터입니다.
이호테우에서 나고 자라서 해녀로 삽니다. 이호테우로 시집을 온 뒤 해녀로 삽니다. 어린 나날을 바닷바람을 쐬면서 누리고, 젊은 나날을 바닷바람을 마시면서 일구다가, 늙은 나날을 마지막까지 바닷바람을 마주하면서 꾸립니다.
사진책에 나오는 해녀 할머니는 하나같이 나이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호테우》를 보면 이 바닷마을에 중국에서 커다란 관광지를 꾸민다면서 ‘제주 해녀가 바닷일을 할 터전’이 차츰 줄어들거나 나빠진다고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호테우 전체의 해녀는 대략 70명 정도이지만 2009년 이호테우 매립 전후로 실질적으로 물질을 하는 분은 1/3 정도 줄었다. 해녀 탈의장이 있는 곳 바로 밑이 원래는 바다였으므로 탈의장에서 옷을 갈아입은 즉시 바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호 해녀 탈의장 앞에서부터 대규모 매립이 강행되면서 이들은 바다와 양식장(매립 후 만들어진 곳)까지 한참을 걸어서 다니거나 경운기나 트럭을 이용한다. 매립의 영향으로 천연어장이 파괴되고 어획량도 급속히 감소한 것은 당연하다. 이제 몇 년 뒤면 이 매립장에 큰 드림랜드가 들어서게 될 것이고. (34쪽)
제주섬에 해군기지를 커다랗게 짓는다고 합니다. 왜 제주섬에 해군기지를 지어야 하는지 알쏭달쏭한 노릇이지만, 중앙정부와 지역정부는 모두 제주섬에 해군기지가 있어야 한다고 밝힙니다. 군부대가 있어야 평화를 지킨다고 말을 하지요.
그러나, 아무리 한국에서 군부대와 전쟁무기를 많이 갖추어도, 이웃나라에서 군부대와 전쟁무기를 더 많이 갖추면 부질없는 짓이 됩니다. 한국도 다른 나라도 군부대와 전쟁무기로는 평화를 찾거나 지키지 못해요. 군부대와 전쟁무기는 언제나 끝없는 군부대와 전쟁무기를 끌어들이기만 합니다. 군부대와 전쟁무기는 언제나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하고 만나서 여느 사람들 삶을 옥죄거나 짓누릅니다.
관광시설이란 무엇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관광시설을 늘리려고 하는 토목건설은, 어쩌면 군부대하고 비슷한 셈이 아니랴 싶습니다. 제주섬처럼 관광시설이 많은 곳이 한국에 얼마나 있을까요? 제주섬에는 관광시설이 참으로 많으나, 자꾸자꾸 늘어납니다. 오름이랑 바다가 아름다운 제주섬이라고 하지만, 막상 제주 관광정책은 오름이랑 바다를 더 파헤치는 길로 갈 뿐입니다. 지난날에는 바닷물이랑 모래밭만 아름다워도 사람들이 나들이를 갔으나, 오늘날에는 이런 시설과 저런 쇼핑센터와 그런 숙박업소가 있어야 나들이를 가는 얼거리가 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를 찬찬히 살펴보아야지 싶습니다. 제주섬을 찾아서 나들이를 가는 이들이 먹는 ‘싱싱한 바닷것(해산물)’은 어떻게 얻을까요? 깨끗하고 아름다운 제주 바다에서 얻겠지요. 그러면 제주 바다에 해군기지가 커다랗게 들어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커다란 관광단지가 들어서면 제주 환경과 자연은 어떻게 될까요?
바람 한 점 없는 맑고 청명한 날이다. 홍순화 할머니는 가끔 유유히 물 위에 떠서 바다와 대화를 나눈다. (50쪽)
제주 바다가 망가지면 제주 해녀가 설 자리는 사라집니다. 제주 바다가 망가지면 제주 해녀뿐 아니라, 제주섬이라는 곳은 관광지라는 이름까지 곧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제주시와 중앙정부는 제주섬에 군부대나 관광단지를 무턱대고 늘리지 말아야 하고, 한결 정갈하면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터가 되도록 마음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전부터 있던 군부대’도 없앨 노릇이고, 온갖 시설과 쇼핑센터와 숙박업소로 돈을 벌려는 움직임은 그치고, 바다와 모래와 숲과 들을 마주하면서 삶을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는 움직임으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합니다. 정갈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으며 아름답지 않은 삶터라면, 이러한 삶터를 ‘구경하’거나 ‘둘러보’고 싶어서 찾아가는 발걸음은 뚝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책 《이호테우》는 바로 이 대목을 살며시 건드립니다. 제주 해녀가 제주 해녀로서 설 자리를 잃는다면 제주섬은 어떻게 될까 하고 묻습니다. 제주섬에서 해녀가 삶터와 일터와 쉼터를 빼앗긴다면 제주섬은 어떤 모습을 놓고 제주섬이라고 할 만한가 하고 묻습니다.
함께 일구는 삶이 없이, 정치나 경제나 문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함께 가꾸는 마을이 없이, 교육이나 사회나 예술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함께 어깨동무하는 두레가 없이, 평화나 민주나 평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작은 사진책 한 권은 작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더 잘 찍은 사진이 아니고, 더 돋보이게 찍은 사진이 아닌 《이호테우》입니다. 이호테우가 이호테우다운 모습을 언제까지 고이 이을 수 있을까 하고 마음을 기울이면서 찍은 사진이 깃든 작은 《이호테우》입니다. 작은 바닷마을이 곱고 사랑스레 작은 바닷마을로 이어갈 수 있을 때에, 제주섬도 한국도 참다운 숨결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보여주는 작은 《이호테우》입니다.
어느 날, 홍순화 할머니가 병원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이틀에 한 번 꼴로 무릎 주사와 물리치료를 받지 않으면 버텨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나는 무심코 병원에 동행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카메라를 들었지만, 병원 측으로부터 완강하게 거절당했다. 그때 할머니께서 이렇게 소리를 치셨다. “저 양반한테는 사진 찍게 해 주게마시. 저 사진 찍는 삼촌은 물질하는 물속에도 잠수복 입고 따라 들어와 찍는데 병원에선들 못 찍겠소. 찍게 해 주시게마시 선생.” 그 말을 들은 간호사가 잠시 뒤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촬영을 허락해 주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112쪽)
어머니는 할머니가 됩니다. 할머니는 머잖아 흙으로 돌아갑니다. 어머니 해녀는 할머니 해녀가 되는데, 할머니 해녀가 흙으로 돌아간 뒤, 새로 ‘어머니 해녀’가 될 젊은 해녀가 없으면, 제주섬에는 무엇이 있다고 할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제주섬에 있어야 할 사람은 ‘해군’이 아니라 ‘해녀’입니다. 제주섬에 있는 젊은이는 ‘군사훈련’이 아닌 ‘물일(바닷일)’을 할 노릇입니다. 제주섬에 있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웃이 되고 동무가 되면서 아름다운 삶자리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함께 바라보면서 같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해녀가 있는 곳에는 사랑스러운 삶이 있습니다. 해군(군부대와 전쟁무기)이 있는 곳에는 무시무시한 죽음이 있습니다. 제주섬이 나아갈 곳은 삶이어야 할까요, 죽음이어야 할까요? 한국 사회와 문화와 경제와 정치가 나아갈 곳은 삶일까요, 죽음일까요?
평화로운 삶자리가 아름다운 보금자리가 되고, 아름다운 보금자리가 사랑스러운 마실터(여행지)가 됩니다. 제주섬에 있는 올레길은 자가용이나 오토바이가 싱싱 달리는 길이 아니라, 두 다리로 걷는 길입니다. 제주섬이 아름답거나 사랑스럽다고 한다면, 제주 해녀가 제주섬을 오늘까지 투박한 손길로 살가이 어루만졌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제주섬이 오늘날처럼 널리 사랑받는 삶터가 된 바탕에는 바로 해주 해녀가 수수한 손길로 따스히 어루만진 살림살이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밥을 짓는 손으로 물질을 합니다. 빨래를 비비는 손으로 물질을 합니다. 아기를 낳아 어르는 손으로 물질을 합니다. 나락을 심고 거두고 갈무리하는 손으로 물질을 합니다. 실을 자아 물레를 돌리고 베틀을 밟는 손으로 물질을 합니다. 삶을 사랑하는 손으로 물질을 하는 해녀 이야기가 《이호테우》라는 사진책에 고이 흐릅니다. 4348.6.24.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