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바른 토너로 얼굴 전체에 트러블이 확 일어났다. 내 피부는 민감성도 아니고 그 토너는 처음으로 쓴 것도 아닌데. 

저는 민감성이 아닌데 왜 갑자기 이렇죠?

원래 그런 거예요. 사람이 평생 건강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기사, 그렇네요.


가슴 아픈 일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다. 아름다움 또한 그렇다. 이야기에 질리지 않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터다. 
















미시마 유키오의 유려한 문장은 서사를 압도한다. 아니, 서사를 구축한다는 말이 맞겠다. 문장 자체가 주인공의 성장, 주인공의 삶 그 자체를 닮아 아름답고 빛나고 허무하고 때론 폭력적이다. 이런 문장.


나는 잃어버린 낮, 잃어버린 빛, 잃어버린 여름 때문에 울었다.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아버지의 유언대로 교토의 금각사의 도제가 된 소년은 절대적인 미의 상징과도 같은 금각사 앞에서 끊임없이 절망한다. 그건 닿을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실재의 현현으로 마치 약올리듯 가까워질듯 가까워지다가도 저만치 멀어져만 갔다. "한 손으로 영원을 만지면서 다른 한 손으로 인생을 만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어른의 문지방을 넘어가며 소년이 이루어 낸 성장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하나의 장례 절차였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은 언제나 그렇듯 아름답고 허무하다. 그는 어떤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없다. 다만 본인이 상정한 절대미에 근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질 뿐이다. 거기엔 커다란 맹점이 있다. 그에게는 윤리가 없다. 선이 빠져 있다. 아름다움을 위해 그는 그러한 가치들을 방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래서 혼란스럽다. 내가 이런 글에 감동해도 되는 걸까.



















김애란, 김연수, 윤성희, 은희경, 편혜영이라니.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좋아했던,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반가운 해후 같은 작품집. 음악이라는 하나의 테마로 뭉쳤다지만 역시나 고수들은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자기만의 색깔들로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을 기꺼이 만들어냈다. 원래는 어떤 테마로 청탁 받은 이야기들의 작위성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소설집>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 좋았다.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에는 화상 영어로 만나는 현업에서 은퇴한 원어민 교사와 중년 여성의 시간이 나온다. 아버지를, 어머니를 잃고 삶의 전장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시간도 이미 지나온 그들의 외국어 수업이라는 체를 통과한 한계를 가진 미약한 소통은 그들의 상실의 시간들의 교감과 기대할 것이 많지 않은 남은 시간들에 대한 작은 기대들을 한데 불러온다. "이미 많은 걸 잃었다 여겼는데 여전히 잃을 게 남은 삶 속에서" 잠시잠깐 빛이 쨍하고 나는 그 시간의 마침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결말까지도 상세히 축조된 김애란 작가의 문장들이 참 좋았다. 


김연수가 의도한 사나운 어머니의 모습이 <수면 위에서>는 여전히 잔잔하고 애잔하게 그려져 있다. 무조건 희생하고 감내하고 묵묵히 가족을 위한 시간을 통과하는 전형성을 탈피한 지점에는 삶이 있었다. 우리 여기 지금에서의 삶들이 가질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작가의 심오한 탐구는 여전히 울림이 크다. 나는 언제나 그의 이야기를 기대할 것이다.


윤성희의 <자장가>이 십대 여고생 화자의 이야기는 내도록 슬펐다. 과거의 어느 시점 내가 어딘가에 두고 온 내 여고생 시절의 모습을 환기하는 그 지점 때문일까. 우리는 부모가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거꾸로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내가 아직 덜 컸다는 사실을 항상 환기한다. 


은희경의 <웨더링>은 궁금증을 남겼다. 기차의 서로 마주 보는 4인석에서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던 그 낯선 이들의 조합은 정말 처음이었을까. 옆자리의 노인이 주인공에게 양보한 우산이 가지는 여운이 길었다. 


편혜영의 <초록 스웨터>는 좀 의외였다.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작품을 편혜영 작가가 썼다고? 나는 그녀의 문장이 가지는 긴장감과 그 절제된 어두움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죽은 어머니의 친구들을 이모라 부르며 그녀들과 교감하는 여주인공의 이야기에 기대보다 더 너무나 쉽게 빠져들었다. 받아야 할 돈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 아니 못하는 그 어처구니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얽히는 일은 수많은 결들이 차곡차곡 쌓여 누적되는 일이니까. 깔끔하게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우리의 역사를 압축하기는 어려우니까. 그 행간에서 작가는 독자와 소통한다. 


얼굴의 피부염은 얼추 가라앉았다. 그런데 또 그럴까봐 무서워서 뭔가를 다시 얼굴에 얹는 일이 망설여진다. 마치 겁쟁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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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4-07-16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의문의 두드러기로 몸고생 맘고생이 말이 아니에요. ㅠㅠ 전에 없던 일이 자꾸 몸에 일어나는 것 보니까 나이가 많이 들어서 그런 거 같아서 더 슬퍼요. 지금 여행왔는데 예전과 달리 햇빛을 피하고 있으려니 더 슬프네요. 암튼 <음악소설집> 담습니다. 많이 좋아지셨다니 다행이에요. 겁쟁이처럼 망설이는 마음 아주 잘 알아요. 그래도 용기 내시길. 화이팅!!

blanca 2024-07-17 09:28   좋아요 0 | URL
라로님도요? 제 친구도 그러더라고요. 피부가 진짜 묘한 것 같아요. 쉽게 생각했는데...저는 최근 화장품에 자꾸 알레르기가 생겨서 선블럭도 못 발라요. 와우, 모처럼 편안한 휴식, 즐거운 여행 되기를 바라요.

2024-07-17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17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24-07-24 0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피부엔 둔감해서 잘 모르지만 뭔가 잘 나는 것 같아요. 제 경우엔 늘 어딘가 아프고 뒤틀린 느낌이라서 그게 갈수록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ㅎㅎ 나이를 먹어가고 있어요. 아마 제 서친님들 중 높은 연령대에 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ㅎㅎ 이제는요....

blanca 2024-07-24 12:48   좋아요 1 | URL
올해 나이듦을 여실히 느껴요. 인생의 유한함도 실감하고요. 컨디션이 완벽한 나날이 줄어가는 느낌 뭔지 정말 알아요..삼십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삼십대의 그 강건한 신체 컨디션은 눈물나도록 그립습니다.
 
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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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나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이기적인 사람일까, 이타적인 사람일까? 위선자일까, 정직한 사람일까?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한때 내가 비교적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명백한 불의에 분노하고 약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MBTI가 INFJ로 나오자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라고 별 수 없다, 는 생각이 든다. 어떤 직접적인 상황의 압력을 받는다면, 즉 내 이익이 침해되고 내 가족이 피해를 받는 상황이 온다면, 그 안에서도 나는 여전히 정의로운 사람으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까? 그렇게나 욕하던 파렴치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상황의 바깥에서 정의로운 이상주의자가 되기란 너무 쉬운 일이지만, 내가 그 상황 속 당사자가 되어 그 역학의 압력과 긴장도 안에서도 그러기란 말처럼 쉬운 노릇이 아니다. 


<산둥수용소>는 한 마디로 경이로운 책이다. 사회실험학적 보고서도 이 책처럼 실증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군상의 천태만상을 지근거리에서 심지어 자신도 그 대상으로 포함시켜 낱낱이 생생하게 이야기하진 못할 것이다. 가차 없다. 흥미로우면서도 가볍지 않다. 무거운 척하려 위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성자 같은 사람도 식사다운 식사를 못하면 죄인처럼 행동할 것이다."는 브레히트의 목소리가 제사에 인용된 것은 우리 인간이 기대만큼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는 비관적 발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43년 스물네 살의 연경 대학 교사였던 저자 랭던 길키는 일본에 의해 중국 산둥의 위현 민간인 포로 수용소에 수감된다. 이 수용소는 나치의 그것과는 달리 육체적인 고문이나 굶주림 같은 극단적 상황은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은 다른 유대인 수용소와 달리 그것을 통제하는 지배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감자였던 인간 집단에 대한 흔치 않은 관찰기다.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영국인, 미국인, 네덜란드인, 벨기에인 사업자, 수도자, 선교사, 교사, 은행가 등 다양한 계층, 민족, 연령 층이 하루 아침에 수용소의 통제된 일상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 앞의 고군분투 적응기이자 극단적 상황 앞에 노출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 보고서다. 



-신속한 적응


절대적인 공간과 물질적 한계 속에서 이루어낸 수용소 집단의 적응 이야기는 놀랍다. 마치 초창기 문명의 개화처럼 사람들은 팔을 걷어 부치고 맨땅에서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차근차근 그들의 공동체의 문명을 건설한다. 수의사는 모두를 먹이기 위해 200개의 쿠키를 굽기 시작했고,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공예품을 만들어 수용소 안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고, 연극 공연을 하고, 사제들은 수용소 안 작은 예배당을 만든다. 랭던 길키는 이러한 인간들의 문명의 놀라운 적응력에 감탄한다. 어떤 상황이든 인간은 적응하여 그들의 일상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초기의 이런 역동적인 적응기는 저자가 이야기하려던 수용소 이야기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윽고 수용소 전체를 뒤덮는 도덕적 위기의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비합리적인 이기심이다.


-무너지는 논리와 공정


일반적으로 사람들은(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었다.

-pp.179

우리는 홀로코스트 수용소 이야기에서 그 안의 감동적인 인간의 연대나 희생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들었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을 나누고 심지어 자기 희생에 기반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감동의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중론이 아니다. 오히려 놀랍도록 탐욕스럽고 비합리적인 인간의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본국에서 보내 온 적십자 구호품을 다른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려다 일본군에게 다 압수 당하는 미국 사람들 이야기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다. 미국인인 저자는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솔직히 기록하며 심지어 적군인 일본군의 개입이 없었으면 이 구호품을 둘러싼 내전이 일어났을 거라고 고백한다. 이미 배고픔을 채우고도 남은 물자를 옆의 궁핍한 이웃과 나누지 않으려는 사람들에는 심지어 평소에 이웃 사람을 외쳤던 신실한 신앙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이기심을 더 합리적으로 포장할 줄 알았다고 한다. 즉 일부가 아닌 대다수가 극도로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었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웃의 필요를 폄하하고 남은 물자를 나누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욕망과 욕구를 스스로에게 감추기 위해 직업적이거나 도덕적인 옷을 입는다. 그러고는 이기적 관심이라는 진짜 속내 대신 객관성과 정직이라는 겉옷을 걸치고 세상에 나간다. 

-pp.214



-수용소 내의 정치


인간이 이렇게도 자신의 안위에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는 비합리적인 이기심을 표출한다면 과연 그 대안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수용소 안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자를 훔치고 거짓말하고 타인을 이용했고 그것을 통제할 방법은 자체 정치 기구의 설립과 그것을 통한 법적인 제약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수용소 안에서 그들이 자율적으로 설립한 정부는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집행부였던 랭던 길키는 점차 이 안에서 정치적인 힘에 대해서도 숙고하게 된다. 민주 정부의 힘은 자율적으로 창출되기 어려웠다. 그것조차 권위에 입각한 어떤 힘을 필요로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빵을 굽고 남은 밀가루와 설탕을 훔쳐갔고, 때고 남은 석탄을 마음대로 가져갔다.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조차 그랬다. 차라리 어떤 한도 안의 재량권을 주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양보조차 곧 유명무실해졌다. 더 가져가고 더 훔쳐갔다. 랭던 길키가 속해 있던 집행부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체 규약을 만들고 사람들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공동체의 도덕성은 공동체의 유지에 필수적이었다. 모두가 모두를 의심해야 한다면 그 사회는 영속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도덕성은 치트키가 아니었다. 이것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성립된 민주 정부의 권위에 대한 고민과도 닿아 있었다. 가능하지 않은 정부는 아무리 그 의도가 선하더라도 현실과 멀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랭던 길키는 수용소에서 나와서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따라서 그의 마지막 결론은 그의 종교 안이라는 한계를 노출한다. 그러나 그가 수용소 생활을 하며 자신과 같은 종교인의 부끄러운 민낯을 목도하고 가감 없이 비판하고 자성한 대목은 그가 편협한 맹신주의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오히려 종교가 가지는 맹점을 가장 가까이에서 봤던 경험을 잊지 않고 자신의 신앙의 기반으로 삼는다. 


불안정한 삶을 경험하면서 배운 가장 기묘한 교훈은, 원하지 않던 상황이 파괴적인 역할을 하기보다 오히려 창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위현 수용소에 오고 싶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이 거부하고 싶고 혐오스러웠던 경험 안에는 새로운 통찰력이라는 씨앗이 있어서, 우리 중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했다. 수용소에서의 삶은 너무도 불편하고 혼란스럽고 지루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을 더욱 창조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다. 

-pp.472


생존 앞에서 도덕성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반 그 자체였다. 도덕적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욱 그 도덕성은 빛을 발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이웃의 필요를 간과할 때 나의 생존은 더욱 더 위협 받았다. 타인을 믿을 수 없을 때 그곳에 지옥이 있었다. 하지만 극단적인 궁핍 속에서도 내 옆의 이웃을 신뢰할 수 있을 때 그 궁핍은 채워짐으로 보답 받았다. 인간의 적나라한 이기심은 결국 이런 교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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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갈증 페이지터너스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빛소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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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이미 상실을 예비한 하나의 무모한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상대라는 매개체를 필요로 할 뿐, 반드시 그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죽음과도 닮았다. 그것이 오는 것을 우리는 막을 수 없고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아내 뒤에서 외도를 일삼았던 남편을 잃은 에스코가 한큐 백화점에서 남자 양말 두 켤레를 사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언뜻 단조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가림막으로 드리운 채 펼쳐진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이 여인이 남편을 잃고 들어간 시가에서 시아버지와 맺은 부정과 청년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하인 사부로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저류를 통과할 때는 모든 사소한 행동들이 다른 의미로 확장, 심화된다. 미시마 유키오의 미문은 이들을 둘러싼 전원의 그 어떤 풍경에 대한 사소한 묘사 하나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모든 언어에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도사리고 있다. 


여자의 발소리처럼 가볍지도 않고, 중년 남자의 발소리처럼 침울하지도 않다. 발바닥에 젊음의 뜨거운 무게가 실려 있어, 이 어두운 밤 복도의 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마치 신음처럼 듣게 했다.

-pp.34


시아버지 야키치와 바둑을 두는 에쓰코가 듣는 사부로의 발소리에 대한 묘사다. 이 대목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에스코의 사부로에 대한 은밀한 마음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시들어가는, 퇴락해 가는 이 가문을 뚫고 들어온 단 하나의 희망, 미래, 청춘에 대한 예감이다. 그러나 물론 에스코와 사부로가 극복해야 할 수많은 난관은 간단치 않다. 신분, 연령 차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에쓰코는 사별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함께 산다. 여기에는 보이는 것 이상의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녀의 생존은 거기에 기대어 있다. 만담가 같은 큰형 부부, 에쓰코를 감시하며 때로는 개입하고 방관하며 그녀의 삶에 끼어드는 야키치, 사부로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하녀 미요. 그러나 그 무엇보다 사랑을 사치스러운 잉여의 감정으로만 인식하는 어린 사부로. 사부로는 에쓰코의 상대로서 더없이 부적절했다. 아니, 결국 그녀가 밟고 지나가고 말아야 했던 하나의 통과의례, 희생양, 제물로서 거기 필연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즉, 우리는 삶의 의미를 모색하고 아직 그것을 구하지 못한 동안에도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 찾아낸 삶의 의미를 소급함으로써 이 삶의 이중성을 통일하려는 욕망의 우리 삶의 실체라고 한다면, 삶의 보람이란 끊임없이 발현되는 이 통일의 환각, 아직은 소급할 수 없는 생의 의미를 가설적으로 소급해 보는 데서 생기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pp.117


에쓰코가 마침내 찾아낸 삶의 의미는 불행히도 가설적으로 소급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 죽음과 대면하게 되니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그녀의 비참한 상황은 어떻게든 결국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삶의 무기력함에 대한 거대한 은유로 비치기도 한다. 처절하게 아름답지만 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결말에서도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들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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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4-06-30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아. 오감을 일깨우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저런 묘사를 할 생각이 들었을까요? 악상처럼 막 떠오르는 걸까요? 만약 글을 쓰는 게 업이었다면 그의 재능이 너무나 질투났을 것 같아요. 노력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나더 레벨의 감각. ㅠㅠ

blanca 2024-06-30 11:38   좋아요 2 | URL
천재적이더라고요. 미시마 유키오는 사상적으로 논란이 많은 작가지만 감각적 표현력 측면에서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어떤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발화 자체가 공적 의미를 지닌다. 신변잡기라 할지라도 화자의 내면에 침잠했던 자신의 체험이 오랜 시간 숙고와 그 나름의 의미망을 통과하면 그 경험과 떨어져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그게 바로 좋은 에세이의 숙성에 관한 이야기일까. 엄청난 스케일의 서사가 없어도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말하여지는 그 행위 그 자체로 이미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매혹한다. 최근 읽은 세 이야기가 그랬다. 

















여든을 훌쩍 넘긴 비비언 고닉의 최신작이다.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다보면"의 그녀의 여정에 동참하는 읽기다. D.H의 <아들과 연인>, 뒤라스의 <연인>이 비비언 고닉의 개인적 삶의 역사, 예리하게 벼려진 언어의 체를 통과하면 어느덧 겉핥기식이 아닌 그 작가의 그 작품의 심해로 함께 뛰어드는 듯한 심오한 추체험을 하게 되는 마법적인 책이다. "외로움은 규준이고, 연결은 이상이라는 것."이라는 그녀의 냉소의 첨언에도 우리는 읽기 체험에서만큼은 그 마법적인 연결의 순간을 비비언 고닉 그녀 본인을 통해 경험하게 된다. 그녀의 "끝나지 않은 일"은 바로 이런 마법적인 공감의 순간을 지치지도 않고 자아내는 것이리라.

















내가 이 세상에 긍정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없다. 내가 만들거나 건축한 것의 4분의 3은 도시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다. 이곳저곳에 유용한 역할을 한 적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해로운 영향도 미친 것이다. 내가 굳게 믿던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끔찍이 아끼던 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완벽에 관하여> 마크 엘리슨


자신의 일에 대해 쓰면서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한 경우를 난 본 적이 없다. 내 일에 대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온생애를 합리화하는 일에 많은 회고적 쓰기가 동원되는 현실이다. 여러 셀럽의 휘황찬란한 대저택의 건축 및 개축에 중추적 역할을 한 뉴욕의 유명한 목수가 자신의 일이 가지는 결론적 무의미를 자인하는 대목은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감동적이다. 그 누구의 삶도 대단한 유의미와 대단한 기여에 일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삶의 냉철한 직시가 오히려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영위하는 일상의 가치를 끌어올린다. 인생은 대단한 그 무엇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완벽에 관하여>는 그 완벽이라는 이상 자체의 허울을 벗겨내는 일이다. 전문적 작가가 아닌 한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생애를 자신의 일과 관련지어 언어화하고 읽는 이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지 이 소박한 글쓰기는 방증한다. 솔직하되 그 솔직함이 전시적이면 안된다. 언어적 증류가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 치열해야 한다. 그 치열함조차 그것에 취하면 안된다. 그 어디쯤의 가장 적절한 지점에서 글쓰기는 시작되고 끝난다. 


















작가 히샴 마타르의 고향은 리비아다. 그러나 그곳을 떠난 지 벌써 삼십 년이다. 게다가 이 글은 리비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의 한 달, 시에나 화파의 그림을 보며 그 도시에서 생활하는  이야기다. 이 작은 책에는 그러나 작가 인생의 전부가 농축되어 있다. 카다피 정권의 반체제 인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가족과 이집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납치되어 생사불명 상태로 연락이 끊긴다. 작가는 이 이야기 <귀환>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는다. 


생이 계속될 수 없다는 증거, 어떤 갑옷을 두르든 예외 없이 모든 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대면하고도, 우리는 얼마나 용감하고 영웅적인가.

이 도시의 알레고리는 작가의 삶의 서사 자체를 지휘한다. 이 도시 안의 그림들은 아버지의 상실을 딛고 작가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 저류의 그 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떠오르는 강력한 의지적 희망을 적시한다. 조반니 디 파올로의 <낙원> 그림에서의 죽은 자와 산 자들의 재회는 그래서 마침표를 찍기에 더없이 적절한 큐레이션이다. 결국에는 사랑하는 모든 이와 헤어져야 하는 우리 인간의 그 처절할 정도로 슬픈 삶의 기본 전제를 확인하며 그럼에도 그들과의 재회를 꿈꾸는 그 지지 않는 마음에 대한 직시는 뭉클하다. 


모두의 삶은 상실을 품고 있다. 그 상실을 품고 나아가는 지점에서 읽고 쓰는 일에서 만나는 일은 언제나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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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6-24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삶은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듯 상실을 향해서 가는 여정 같습니다..^^

blanca 2024-06-25 09:18   좋아요 0 | URL
이제 점점 더 실감이 나서 마음이 무거워요.
 

폴 오스터가 77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나는 그의 팬도 아니고 그의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는데 급작스런 소식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그의 이름이 문학에 가지는 의미와 무게가 남달라서가 아닐까. 충격이다.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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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5-01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lanca 2024-05-01 19:51   좋아요 0 | URL
폴 오스터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뭔가 청춘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어서 더 갑작스럽게 들리더라고요.

유부만두 2024-05-01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321 .. 을 쳐다보고 있어요

blanca 2024-05-01 19:51   좋아요 0 | URL
낭독회 영상을 한동안 봤었는데 먹먹합니다.

cyrus 2024-05-01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대 때부터 폴 오스터의 책 대표작이라도 읽어야겠다고 마음만 여러 번 다짐했는데, 결국 책 한 권 읽지 못했어요. 제가 참석했던 서울의 독서 모임 이름이 <달의 궁전>이에요. 지금 독서 모임 멤버들이 작가의 부고에 슬퍼하고 있어요.

blanca 2024-05-02 10:00   좋아요 0 | URL
기억해요. 저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단편을 몇 편 읽은 정도인데 인터뷰가 좋아서 많이 찾아봤던 작가라 친밀감이 들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