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런드는 한숨지었다. 신중해야 했다. 언쟁을 중단해야 했다. 지금 반대하면 로런스의 반항심만 커질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좋아, 네가 원하는 건 뭔데?"

이건 질문이었다. 로런스는 대답하기 전에 시선을 피했다. "모르겠어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끔찍한 계획이 있는 게 분명했다.

"어서 털어놔봐."

"연기를 해볼 생각이에요."

롤런드는 아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그렇지.

-이언 매큐언 <레슨>


롤런드의 아들 로런스는 공부를 특히 수학을 탁월하게 잘했다. 그러니 대학에 가지 않은, 가기 전에 학교에서 도망쳐버린 롤런드에게 로런스를 수학에 특화된 칼리지에 보내는 건 일종의 평행우주에서 실현된 자신의 또 다른 대리자아의 환상적인 삶이었다. 심지어 로런스는 이미 입학허가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역시 아들은 그의 기대를 배반한다. 


이 한 장면에서 나는 딸을 떠올렸다. 나와 사춘기 딸은 자주 부딪혔다. 나는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질문은 이미 내가 규정한 이상적인 답안을 전제한 것이었다. 아이가 뭔가 다른 생각이 있다고 이야기할 때 나는 이미 그게 내가 정한 그 경로를 이탈한 것이라 틀렸다고 여기곤 했다. 


오늘 아이는 수능을 보러 갔다. 교문 앞에서 아이를 들여보내며 내가 잘못한 일들과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며 딸에게 했던 행동과 말들이 한꺼번에 격랑이 되어 몰아쳤다. 어쩌면 그렇게도 미숙했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제 나에게 김붕년 선생님 말처럼 잠시 머물다 떠날 손님이 되어 온 아이는 인생의 한 장을 닫고 연다. 나는 아이에게 이제 "그럼 그렇지" 같은 말을 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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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11-13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아이가 오늘 수능을 봤군요. 복잡하고 답답한 심정이야 말할 것이 없지요. 뒤에 있는 사람 같아요, 부모는... 저도 오늘 미숙했던 제 사랑을 많이도 반성했구요.

블랑카님도, 아이도 일년 내내 수고 많으셨어요. 편안한 저녁 되시길 바래요~~

blanca 2025-11-14 09:56   좋아요 0 | URL
아, 오늘부터 또 다른 의미의 시작인 것 같아요. 단발머리님, 감사합니다.

파란놀 2025-11-14 0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에는 ‘사춘기’가 없고, 우리나라에는 ‘사춘기’라 이를 만한 때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푸른별 온나라가 마찬가지인데, “아이에서 어른으로 건너가는 즈음”은 “철드는 나이”요, 철드는 때란 따로 ‘봄나이(봄빛을 바라볼 줄 알고 품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숱한 나라는 ‘봄나이’로 무르익을 아이를 굴레(제도권입시지옥)에 가두느라 웬만한 아이는 몸앓이랑 마음앓이가 겹쳐서 지치고 앓아요.

스스로 철들며 스스로 바라보며 스스로 해보려는 무렵에 스스로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넘어지고 다치기에 비로소 봄나이를 이루면서 어른이라는 길에 접어들어요. 셈겨룸(입시)이란 아주 조그만 디딤돌이니, 이 디딤돌 건너에서 삶과 살림과 사람을 함께 바라보는 보금자리를 이루시기를 바라요.

blanca 2025-11-14 09:58   좋아요 0 | URL
생각해 보면 최근까지도 우리가 사춘기라 이르는 나이에 이미 우리 선조들은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어쩌면 사랑과 보호라는 명분 하에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기회를 빼앗고 그 시간을 지연 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처럼 생각해보게 하는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5-11-14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식에게 덜 관심을 갖는 것, 이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잘 되지 않는다는..ㅋㅋ
 
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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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언 매큐언의 <레슨>은 주인공 롤런드가 열한 살 때 피아노 레슨을 받는 장면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건 그리 특별한 도입부가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언 매큐언의 영리한 계략에 걸려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제목이 <레슨>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충격적이다. 당신이 어떤 것을 상상하든 그건 당신의 상상의 영역을 뛰어 넘고야 만다. 


일단 롤런드는 이름만 들어도 연상되듯 영국의 백인 남자다. 그의 아내 앨리사는 돌도 안된 아들을 남겨두고 갑자기 집을 나갔다. 그는 졸지에 정부로부터 한부모 지원금을 받는 싱글 대디가 됐다. 그의 생계를 해결해준 공권력은 그를 사라진 앨리사의 살해 용의자로 의심하고 신문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실패한 시인이다. 

한때 그는 전도유망한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실제 그런 기대를 실현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던 피아노 강사 미리엄 코넬에게서 레슨을 받았다. 애석하게도 그 레슨은 단지 피아노 레슨만이 아니었다. 부모와 떨어져 소년들만 모인 기숙학교에서 사춘기에 진입하게 된 롤런드는 그녀의 교묘한 통제와 조종에 의해 성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말려든다. 그리고, 소년 롤런드는 우스꽝스럽지만 당시 쿠바 미사일 위기 상태로 전운이 고조됐던 국제 정세로 어쩌면 이 세계가 하루 아침에 멸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으로 열한 살이나 많은 그녀에게 달려가 첫경험을 하게 된다. 둘은 이를 계기로 부적절한 관계의 구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관계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게 된 것은 아주 나중, 심지어 롤런드가 노년기의 초입에 들어갔을 때다. 이언 매큐언은 이 아슬아슬한 어쩌면 역겹기까지 한 관계를 그 관계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사춘기 소년의 치기, 욕망, 조급함과 그 소년을 어떤 의미로든 사랑하고 소유하고 싶었던 젊은 여자의 미숙하고 불안한 통제욕과 교차시키며 놀랍도록 강렬하고 노련하게 형상화한다. 이 이야기를 이 칠백 쪽에 육박하는 긴 이야기의 저류로 은밀히 침투시킨다. 

우리는 이제 그런 위험한 경험을 하게 된 소년이 성장해 어떤 어른으로 되고 심지어 어떻게 노인이 되는지까지 그저 이언 매큐언의 세련된 언어의 쾌속정에 올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아직 어린 아들을 롤런드에게 남겨두고 소설을 쓰겠다고 충동적으로 집을 나간 아내 앨리사는 언뜻 보면 무책임해 보이고 무모하다. 앨리사라는 캐릭터는 비현실적이다. 그런 그녀가 독일 문학계의 거물이 되고 심지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성공한다는 스토리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위대한 소설가가 될 수 없고, 남성 작가는 가정을 유지하며 할 수 있는 그것을 여성은 갖지 않거나 기꺼이 버리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상대적으로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캐릭터가 언제나 남자였던 진부한 클리쉐를 작가가 전복한 걸까. 어떤 것을 향한 강한 열망으로 강력한 모험을 감행한 결과는 외부적인 성취가 다가 아닌 것이라는 결말은 또 다른 이야기다. 노년의 앨리사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꿈꾸던 피아니스트도 시인도 되지 못한 채 라운지바 피아니스트가 된 롤런드는 가족으로 둘러싸여 다복한 나날을 보낸다. 물론 이언 매큐언은 이런 단편적인 이야기로 만족할 작가가 아니다. 


롤런드에게는 어머니가 첫결혼에서 낳은 이부 형과 누나가 있다. 어머니 로절린드와 군인 출신 아버지 로버트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아버지는 반세기가 넘는 결혼 생활 동안 강압적인 폭군 행세를 했다. 그러나 이 거칠고 통제적인 남자는 아들인 롤런드에게는 이따금 다정한 부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롤런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에 일종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음을 알게 된다. 로절린드의 남편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만나 생긴 아이를 그들은 유기한다. 그리고 롤런드는 있는지도 몰랐던 그 형을 노년에 만나게 된다. 여기에는 이언 매큐언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투영돼 있다고 한다.


모든 것들의 이면에는 상상 이상의 스토리가 있었고, 그 모순과 불협화음과 부조화 그 사이에 삶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삶에 기대하는 어떤 정합성과 균형은 어느 순간 하나의 환상이자 헛된 기대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오늘 가혹했던 사람이 내일 갑자기 따뜻한 손길을 내밀기도 하고 믿었던 누군가가 생각지도 못했던 비행이나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내가 확신했던 신념들이 하루 아침에 붕괴되기도 한다. 그 엔트로피, 그 혼란이 어떤 악이나 물리쳐야 할 비정상적 상태가 아니라 삶과 생명의 치트키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너무나 늦게 오고 만다. 


롤런드는 인생의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기대했던 그 완벽함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헛되고 무의미했던 것인지 깨닫는다. 후반기에 기록한 사십 권의 일기장을 다 읽고 다 태워버리는 장면은 압권이다. 


롤런드에게 죽음의 한 가지 심각한 문제점은, 이야기에서 제외된다는 점이었다. 이야기를 이렇게 멀리까지 따라왔으니,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pp.674


롤런드의 개인적 삶은 공적 역사의 흐름과 분리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으로 전장에 파병된 남편의 부재를 롤런드의 아버지로 채우게 된 어머니로 인해 그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독일 나치의 만행에 맞선 용기 있는 백장미단의 활약으로 아내가 태어날 수 있었고, 그들 사이에 아들 로런스가 태어날 수 있었다. 아내가 다시 자신의 고향인 독일로 돌아가 그 이야기를 씀으로써 그녀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었고, 롤런드는 대프니와 재혼해 새 가정을 이루고 진짜 사랑을 다시 찾아갈 수 있었다. 이 모든 일련의 흐름은 특별한 개인의 것이 아닌, 시대와 역사의 격랑 사이에 맞물린 혼합물이다. 이언 매큐언이 끊임없이 한 나라의 사회, 정치, 역사, 경제를 이야기하고 인물의 입을 빌려 그것에 대한 나름의 견해나 감상을 피력하는 건 바로 이런 불가분성과 불가해성을 직시하기 때문이다. 롤런드가 자신의 앞에 놓인 죽음을 애석해한 것 또한 이 새로운 세기의 역사를 목도하는 관찰자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감동을 받은 기억하고 싶은 대목이 있다. 싱글 대디가 된 롤런드와 공동 육육아를 하다 사랑에 빠져 결국 재혼을 결심한 그 순간 말기암 진단을 받은 대프니와 함께 그녀의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의 담긴 에스크강 근처에서 대프니가 아홉 살 아버지와 나눈 대화 장면이다.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어 죽음을 앞둔 딸은 아홉 살 때 그 아버지가 바로 그 장소에서 어머니와 연인이던 시절 전장에서 보낸 편지에서  "돌아가면 결혼해서 나 같은 딸을 갖자고 했대." 라고 말하며 그 순간 얼마나 행복했는지 롤런드에게 들려준다. 사랑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던 시대, 표현하는 걸 약하다고 여겼던 당시에 그 문장은 사랑 그 자체로 화한 표현이었다. 사람은 죽음을 앞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나온 그 순간의 서사로 위로 받을 수 있다. 묘한 아이러니다. 


레슨은 이언 매큐언의 노년에 완성된 역작이다. <속죄>에서의 그 서늘하지만 찬란했던 반전의 대목을 이제 이 작가는 자신이 직접 살아낸 삶의 레슨으로 숙성하여 더 깊고 아름답고 넓은 이야기로 우리 앞에 내어 놓았다. 이야기의 힘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고, 삶은 허망하고 헛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믿게 하는 일. 

이언 매큐언이니까 할 수 있는 그런 일.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끌리는 이 매혹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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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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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경이로운 소설의 종반부를 향해 가고 있는데 차마 나아갈 수가 없다. 마치 인생의 종반부를 대리 경험하는 것 같아서. 삶의 레슨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묻는다면, 이언 매큐언의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불가능할지라도 있다고 믿게 만드는 책이니까. 좋고 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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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11-12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 님의 이런 평이라니요. 안그래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꼭 읽어보겠습니다!!

blanca 2025-11-13 09:0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정말 놀라운 소설이에요. 이언 매큐언 나이 계산해 보고 그 연세에 이런 정교한 플롯의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데 또 한번 감탄했네요. 물론, 좀 거슬리는 몇몇 표현들이 있긴 합니다. ^^;;
 
AI는 인간을 꿈꾸는가 - 인간과 비인간, 그 경계를 묻다
제임스 보일 지음 / 미래의창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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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인간을 꿈꾸는가]라는 한글 제목과 표지가 개인적으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공지능 과학 분야 책이라기보다는 저자가 실제 듀크대학교 로스쿨 석좌교수임을 감안하면 AI의 법적 지위에 대해 고찰한 사회학 저서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저자 제임스 보일은 다루어야 했던 주제의 방대함 때문에 거의 십 년에 걸쳐 이 책을 연구하고 집필했다고 한다. 법인격, 인공지능, 생명공학 분야를 종횡무진하는 책은 500페이지가 넘는데도 시종일관 특유의 리듬감과 깊이, 넓이로 읽는 즐거움을 준다. 

AI의 등장으로 인한 사회 전반적인 파급력 그 자체보다는 결국 우리 사회가 향후 정말 인간의 의식과 비슷한 범용 AI가 나왔을 때 과연 어떤 사회적, 법적 지위와 대우를 해줘야 할지에 대한 진지하고 심오한 공론화의 장을 열어준 책이다. 딱딱하고 어려울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 책은 일반 대중들이 쉽게 직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저자도 번역자도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블레이드 러너>를 예로 들어 설명한 대목도 흥미로웠다. 


이 책의 원제는 [THE LINE]이다. 그 경계는 바로 인간과 기계뿐 아니라 법인, 비인간 동물, 혼종 동물, 형질 전환 개체, 키메라까지 포괄한다. 그리고 이 구분은 결국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인간만의 특수한 언어 능력이 챗봇의 등장으로 위협받게 됨으로써 보다 근원적인 질문인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다다른다. 흔히 이 진단 기준으로 사용됐던 튜링 테스트를 AI가 간단히 통과할 수 있다는 데에서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가 생각했던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경계선이 조정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미국에서 법인의 인격 개념이 도입된 역사에 할애된 장은 결국 기업을 소송의 당사자로 취급하기 위한 편의에 의해 도입한 법인의 개념이 얼마나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지점에서 왜곡되고 임의로 조정되었는지 그 취약점을 노출함으로써 결국 우리가 지금 본질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 또한 충분히 무너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지금 당장 AI는 의식이 없고 독립된 인격의 개념이나 법적 지위도 없지만 향후 그들의 법적 지위가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다.


유전공학의 기술로 서로 다른 두 종의 DNA를 재조합하거나 인간의 만능줄기세포, DNA를 포함한 동물들도 종을 구분하는 경계선에 혼란을 몰고 왔다.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에게 위험한 임상이나 각종 난치병의 치료제 개발을 위해 이 경계를 임의적으로 자의적으로 설정하는 것에 일말의 도덕적 가책을 면제하는 것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자는 하나하나 묻고 있다. 


결국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고유한 특성이라 믿었던 것들이 새로 등장한 기계나 유전자 조작 생명체로 무너질 때 우리는 과연 그 종을 가르는 경계선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인격권을 가진 존재로 존중하고 대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도발적인 물음은 쉽게 답하여질 수 없다는 결론으로 맺는다. 어쩌면 허무한 이야기로 오해 받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질문을 하는 과정 그 자체에서 앎의 지평과 공감의 지대는 더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근미래에 정말 특이점이 와 출현한 범용 AI가 독자적으로 자신의 인격권, 법적 지위를 주장할 때 과연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의 적절한 합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을지 상상하는 일이 SF적인 공상으로 그칠지, 아니면 현실이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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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0-29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아시모프의 sf소설을 읽으면 안든로이드나 로봇의 권리(일종의 인격권)을 다룬 작품들이 있었는데,그런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의 상상은 무궁무진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현재 AI개발속도를 보면 상상만 했던 일들이 현실이 될카봐 무섭기도 합니다.

blanca 2025-10-30 10:16   좋아요 0 | URL
챗봇 발달 속도 보면 이제 sf가 그저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니구나 싶어요. 순간순간 섬뜩하죠.

단발머리 2025-10-30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부분이 참 걱정스럽기는 하네요. 저는 워낙 기계치이고 문과이기도 해서 이쪽의 발전이 이렇게나 많이 이루어진걸 전혀 몰랐는데, 최근에는 좀 관심이 가더라구요.
이 책도 찬찬히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blanca님!

blanca 2025-10-31 09:31   좋아요 1 | URL
AI가 나와서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많은 것 같아요. AI가 가짜 정보를 진짜처럼 제공하는 환각 현상도 있는데 잘 걸러지지도 않고요. 세상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가끔은 참 숨이 가쁘다는 생각도 듭니다.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은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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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AI가 이제는 일상으로 파고들고 있다. 예전 같으면 주변에 물어볼 일을 AI에게 물어보고, 상담가나 친구들과 나눌 사적인 일들까지 인공지능과 나누고 있다. 무엇보다 글을 읽고 쓰는 일에 이 거대언어모델(LLM)이 끼친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다. 독자들도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상상하는 일을 인공지능에게 위임하고 심지어 글쓰기 공모전에는 뭔가 불쾌한 기시감이 드는 창작물들이 버젓이 개인의 이름을 달고 제출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문학을 여전히 읽고 쓰는 일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니 그런 질문 자체가 유의미한가.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이런 질문이 떠올랐고, 다행히 과정에서 나름의 답을 찾아나가는 출구를 더듬을 수 있었다. 일곱 편의 수상작이 모두 작가들 고유의 리듬감으로 흥미롭게 읽혔고, 나름의 사유의 깊이로 오랜만에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최은미ㅣ김춘영


탄광 마을에서 광부들에게 술을 팔았던 여성 노인 김춘영을 면담하는 여성 연구자가 화자다. 마지막 면담만을 남겨놓고 해발 천 미터의 험준한 산을 올라간 화자가 폭설을 만나 구술자의 집에 고립되며 우연히 만나게 되는 등산객 중년 부부와 젊은 군인 사이에 빚어지는 긴장은 결국 한 인간이 타인의 고유한 경험을 간접경험함으로써 가닿게 되는 소통과 공감의 지대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보인다. 이 연결은 작가 최은미의 치열하게 조탁한 문장으로 이음매가 거의 노출되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고 아름답다. 이야기의 힘과 문장의 유려함이 만날 때 얼마나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



강화길 l 거푸집의 형태


여성 가족 서사의 서늘한 긴장감과 가족이라는 미명 하에 버젓이 이루어지는 착취와 폭력의 중층적인 구조를 이야기의 형태로 보여주는 데 남다른 재능을 가진 작가로 강화길을 빼놓을 수 없다. 친밀하다고 느꼈던 막내이모와 조카 사이에 끼어든 죽음이 가져온 파국의 내막은 어떤 것인지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김인숙 ㅣ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어느 순간 우리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보호와 위계가 역전되는 기점을 맞게 된다. 경제, 건강, 노령화 등 그 시점은 가족마다 달라질 수 있지만, 결국 그 시간은 누구나에게 오고야 만다. 자식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기능하며 이제 약해진 부모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에 쉽게 적응하기 어렵다. 그건 비극일까, 자연스러운 섭리일까. 사랑해서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딸을 포기하지 않았던 엄마는 딸에게 증오와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그 어머니에게서도 그 딸에게서도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굳이 답을 주지 않고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런 공감을 자아내기는 쉽지 않은데 작가는 그 어려운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김혜진 ㅣ 빈티지 엽서


주인공 여성이 헬스장에서 고춧가루를 생각하는 도입부부터 읽기를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특히나 "삶에서 사소한 정을 주고받는 일이 점점 드물어진다는 생각을 그녀는 자주 했다." 같은 문장을 맞닥뜨리고서는 더더욱. 그녀가 저지른 일은 불륜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륜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 미묘한 지점들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과 우리가 사는 것들의 그 낙차에서 아찔해져 버리는 체험은 김혜진 작가 아니고서 누가 이렇게 탁월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배수아 ㅣ 눈먼 탐정


성경의 <누가복음>에서 죽은 예수가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는 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이야기는 배수아 작가의 인장이 군데군데 찍혀 있다. 초현실, 비현실, 이런 해석들로 이 중층적인 이야기를 감침질하는 건 실례가 될 것 같다.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이야기가 이토록 현실 전체를 감싸안을 수 있다는 발견은 놀랍다. 삶, 죽음, 이별 등의 거대한 추상성이 구체화의 외피를 두르지 않고 현현하는 놀라운 체험이 가능한 이야기.



최진영 ㅣ 돌아오는 밤


내 친구의 죽음 대신 직장 상사 지인의 장례식장에 참석하기 위해 무민의 나라 핀란드를 경유해 가 돌아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돌발적인 사고 앞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건 무얼까. 모든 경험, 모든 소통이 온라인화되는 이 세계에서 정작 내가 실제로 겪은 건 인간의 폭력이었다. 



황정은 ㅣ 문제없는, 하루


나는 현실적인 삶을 살고 동생은 자신의 것이 아닌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극들로 괴로워한다. 나는 그 동생이 현실에 닿아 있지 않다고 걱정하지만, 정작 이 자매가 터널에서 만난 사고는 타인의 고통에 연루되지 않는 감각이 얼마나 큰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에게 '문제없는, 하루'라는 감각은 정작 '문제없는 하루'를 불가능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가해지는 그 많은 폭력들은 결국 우리에게도 돌아올 테니까.



쉽고 편리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여전히 작가들은 고심하고 쓴다. 그 노력과 그 노력이 가지는 힘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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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7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09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