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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저 - 난파선에서의 반란과 살인, 그리고 생존을 향한 사투
데이비드 그랜 지음, 김승욱 옮김 / 프시케의숲 / 2026년 1월
평점 :
-논픽션이지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 리뷰임.
극한의 상황에 갇혀도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본능에 충실한 저열한 동물로 떨어질까. 우리는 논픽션 작가 데이비드 그랜의 역작 <웨이저>를 통해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책 서두에 인용된 "어쩌면 짐승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우리뿐인지도 몰라."라는 <파리대왕> 소년들의 대사는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다만 18세기 영국의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패권주의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자기 편의적으로 해석하고 종결지어버리는 폭력을 저질렀다는 걸 작가가 간파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데이비드 그랜의 문장을 따라가며 우리는 난파선 웨이저 호에 실제 올라 지진, 폭풍, 반란, 굶주림과 싸우는 승조원들이 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끝내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살아남아도 서로가 눈감은 그 저열한 행동들의 잔상은 마침내 사라질 수 있는지 따라가 보자.
18세기, 영국은 제국주의 패권 전쟁에서 라이벌이었던 스페인의 보물선을 가로챌 계획을 세운다. 이 위험하고 탐욕스러운 원정은 전함 다섯 척과 정찰선 한 척, 병력 2000명을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 케이프 혼을 끼고 도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웨이저>는 이 소함대의 전함 중 하나로 이 배의 선원들이 폭풍을 만나 난파되며 벌어지는 일들이 이 이야기의 골조를 이룬다. 여러 선원들의 시점에서 각자의 입장에 가장 유리한 이야기 덮어쓰기의 향연이 흥미롭다. 특히 시인 바이런 경의 할아버지가 되는 수습장교 바이런은 겨우 열여섯 살의 소년이었음에도 위기 상황에서도 대단히 침착하고 이성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끈다. 승조원들이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칩 선장을 외딴 섬에 버리고 가는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끝내 그의 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의외의 선택을 하기도 한다. 작가의 말처럼 "길고 위험한 항해는 사람의 숨겨진 영혼을 무정하게 끄집어내는 법이었다."
굶주리고 병들고 기약 없는 난파 상황에서도 인간들의 위계질서는 끊임없이 재편된다. 앞서 말했듯 외골수로 위험한 상황에서도 선원들의 안위보다는 임무 수행에 집착했던 선장 칩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질러 끝내 축출되고 지위는 낮았지만 영리하고 리더쉽이 있었던 벌클리가 반대 세력의 지휘관이 된다. 위기 상황에서 어떤 리더쉽이 설득력과 지지를 얻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형식적인 명분이나 위계는 생존 앞에서 무너진다. 허기는 모든 것을 압도한다. 죽은 동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장례를 하는 일과 그의 시신을 먹는 일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사의 비극이기도 하고 희극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며, 존중하고 배척한다.
사람은 누구나 혼란스러운 자신의 삶에 모종의 두서, 모종의 의미를 부여한다. 기억 속의 이미지들을 뒤지며 선택하고, 윤색하고, 삭제한다. 그렇게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면, 자신이 저지른 일 또는 하지 않은 일을 견디며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위대한 시인 손자를 낳게 될 존 바이런의 일기와 선장에게 반란을 일으킨 벌클리의 기록은 모순될 수밖에 없다. 그 불일치를 함부로 봉합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노력은 이 <웨이저>를 일관되게 흐르는 기조다. 즉, 각자의 시선에서 각자의 버전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게 내버려두는 그 거리두기는 읽는 입장에서의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를 용인하는 관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해석을 유보하지 않고 각자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선원을 하나 택해 이야기에 뛰어들 수 있다. 그 행위 자체가 이 역사를 살게 하는 평행우주적 체험을 선사한다.
이제, 우리는 그런 기록조차 남길 수 없었던, 그 역사에서 소외된 이들에게도 시선을 옮겨야 한다.
여기엔 존 바이런에게 자신의 모자를 양보했던 유일한 흑인 수병도 있었고, 자신들의 문명을 짓밟은 백인들에게 끊임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 원주민들도 있었다. 어쩌면 <웨이저> 이야기 중 가장 감동적인 대목일지도 모른다. 기록을 통해 그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소외된 이들을 뭍으로 건져 올리는 글쓰기를 한 작가에게 경외감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기록으로 남은 역사를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며 그 사이로 빠져나간 숱한 무명씨들의 잊혀진 역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2년여의 표류 끝에 이들은 결국 살아 돌아왔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각자의 편견으로 윤색된 이야기를 가지고 그들은 영국의 군사법정 안에서 재회한다. 선상에서의 반란, 지휘체계의 교란, 살인 등 그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할 근거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영국 역사는 가장 편리하고 그럴듯한 버전의 역사를 채택하기로 한다. 에필로그는 살아남은 자들의 너무나 평안한 세속적인 삶들을 후술한다. 평탄하고 여유로운 일생을 누렸던 소년 수습장교 존 바이런은 후일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남긴 트라우마를 고백한다. 살아남기 위해 감행하고 때로 방조해야 했던 비인간적인 일들이 끝내 인간으로 삶을 마감하기 위한 방편이 된 부조리와 모순은 우리가 여기에서 살아나가는 일상이 가지는 무게와 의미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한다.
역사는 결국 살아남은 자들이 미래에 올 자들에게 남기는 하나의 변명일 수도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