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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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감동시키는 건 대단한 서사가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의 성찰과 삶을 통해 깨달은 하나의 인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 우주비행사들의 시선을 통과한 문장 하나하나가 엮여 장대한 우주를 주어로 목적어로 한 빛나는 산문시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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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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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친구를 떠나 지구 상공 250마일 위를 선회하고 있는 우주정거장에서 반년을 넘게 유영해야 한다면, 당신은 그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일까? 실제 이런 질문을 이 <궤도>의 작가 서맨사 하비는 받았고 놀랍게도 작가 자신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나도 당연히 아니다. 무엇보다 그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 온갖 사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까지 굳이 가고 싶지 않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 이야기는 여섯 우주비행사들을 통해 생생한 우주 유영 간접 체험의 기회를 준다. 


아무래도 여러 단계의 각종 선발 과정과 몇 년에 걸친 훈련을 거친 이 여섯 명의 다양한 국적의 우주비행사들은 그런 의미에서 일단 대단히 용감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 지구상에서 우리가 겪는 슬픔, 기쁨, 집착, 상실을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강렬하게 그런 감정들을 느끼고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안에 전부 있다. 이 몇 사람에게도 응축된 인류는 더는 종잡을 수 없이 이질적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종이 아니다. 가깝고 붙잡을 수 있는 존재다.

-pp.37


우주 정거장에서의 단 하루는 "창백하고 푸른 점"인 우리 지구의 열여섯 번의 일출과 일몰을 조망하는 일과다. 이 지상에서의 모든 일들은 사소하고 덧없다. 무한과 영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미국인, 일본인, 영국인, 이탈리아인, 러시아인 우주 비행사 각자의 시선과 관점을 통과한 지상에서의 개개인의 전사들을 간단하고 건조하게 서술한다. 대단한 서사나 인생 사연 대신 각자가 이 푸른 점에 두고 온 자신의 과거, 현재, 어쩌면 미래까지를 더 넓고 긴 시선으로 줌아웃한다. 

이 지구에서 우리가 욕망하고 분투하고 싸우고 집착하는 것들이 얼마나 사소하고 덧없는 것인지, 바깥에서 보면 그 경계조차도 흐릿한 국경을 가지고 서로 죽고 죽이는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폭력인지 읽는 이들은 절로 깨닫게 된다. 


이곳에서 우리 삶은 더없이 사소하지만 동시에 중대하다고, 되풀이되지만 동시에 유례가 없다고 당장이라도 일어나 말할 것만 같다. 우리 존재의 의미는 크지만 동시의 무의미하다. 인류 위업의 정점에 도달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미미한지를 깨닫게 되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가 이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위업임을 비로소 이해한다.

-pp.212



이 이야기는 하나의 드라마틱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욕망과 폭력과 파괴로 들끓는 뜨거운 지구 바깥으로 나가 그 모든 것을 조망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적 읽기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이 강요하는 관점, 타인이 설정해 놓은 욕망의 기준에 끌려가는 삶, 폭력과 경계가 모호한 애정에 지칠 때 우리가 기꺼이 우주 정거장으로 가고 싶어하는 자가 되기는 어려우니 우리 대신 그곳에 간 여섯 명의 우주비행사의 깨달음을 작가의 응축된 아름다운 언어로 대신 듣는 빛나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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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24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개월까지는 좀 힘들고 한달정도라면 우주에 가보고 싶어요.우주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하고도 우주에 가고싶어하니 저역시도 보내준다면 가보고 싶네요.

blanca 2025-06-24 10:49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의 우주에 가고 싶은 이 마음도 소중하고 대단한 거예요. 저는 겁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못 갈 것 같아요. ^^
 
우리를 방정식에 넣는다면
조지 머서 지음, 김소정 옮김 / 현암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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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 대한 책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원론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 어쩌면 우리의 의식을 제대로 읽어내는 과정이 다가올지도 모를 인공지능 특이점을 가장 현명하게 예측, 방어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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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음모 채석장 시리즈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임재철 옮김, 이리에 데츠로 해설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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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어느 한 장면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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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화제인 인공지능의 가장 큰 취약점은 인공 신경망의 학습을 통한 창발 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의 기원을 제대로 밝혀내기 힘든 지점과 맞물려 있다. 우리의 몸 안에 담긴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의식과 마음이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심리학자, 뇌신경학자, 물리학자들이 오랜 세월 여러 가지 이론으로 밝혀내 보려 애썼지만 결국 우리 앞에 놓인 건 우리의 신경망을 닮은 물리적인 기계의 출현이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설명할 수 없다면, AI의 특이점 도래 앞에서도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 저널리스트 조지 머서의 이 책은 이런 우리 의식의 기원을 다양한 시각에서 탐사한다. 마음의 물리학, 뇌와 양자론, 우주론까지 확장되는 스펙트럼은 경이롭다. 우리의 머릿속 신경망이 AI의 인공 신경망, 더 나아가 우주의 모습까지 닮았다는 발견은 결국 지금의 기술 발달이 우리의 자유 의지로 이룬 성과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미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저자 또한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론과 결국 실재가 아닌 관찰자인 우리 자신을 포함한 관계의 파악이 의식의 핵심에 있음을 언급한다. 

우리 자신을 관찰하는 일은 우리를 관찰하는 관찰자인 우리 자신을 포함하는 재귀성과 결국 AI 또한 그런 한계 안에서 작동함을 암시한다. 인간의 의식의 기원을 탐사하며 결국 그 과정에서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 그것이 가지는 함의에 놀라운 통찰을 제공하는 책이다. 


















불문학자이자 영화 비평가인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제국의 음모>는 프랑스의 제2제정,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과 의붓동생 내무대신 드 모르니의 쿠데타를  드 모르니가 남긴 두 개의 문서로 독해하는 이야기다. 하나는 국민들 앞으로 쓴 인쇄물 <포고>, 다른 하나는 놀랍게도 입법원 의장이 된 그가 오펜바흐까지 동원해 만든 오페레타 부파의 각본이다. 십 년의 시차를 두고 우유부단한 의붓형에게 쿠데타를 종용해 '제국'을 설립한 그가 미련 없이 그 권력의 사다리에서 내려와 일종의 희가극을 만들고 상영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농담처럼 보인다. 저자 하스미는 사생아로 태어나 자신의 신분을 발명해 낸 드 모르니의 이 행적 자체가 "역사적으로 조금도 본질적으로 여기기 어려운 것들을 형태짓는 냉소적인 역사성"이라 명명한다. 대단한 의도도 역사 의식의 자각도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저지른 권력 탈취의 종말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사실 연락 한번 거의 않던 두 형제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갑자기 의기투합하여 이 불법적인 권력 탈취의 쿠데타를 통해  "애매하고 희박한" 역사적 우연의 격동을 만드는 장면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다. 우애랄 것도 없는 나폴레옹 형제는 근대국가에서 일어난 최초의 쿠데타의 주역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역사가 본질적이고 의도적인 주류의 흐름에 의한 도식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두 책 모두 인간의 자유의지와 의식적인 결단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는 의식도 환각일 수 있다. 각자 다른 시점에서 세상의 실재를 읽어나가려는 시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이 두 책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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