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맥퀸 - 광기와 매혹 현대 예술의 거장 (개정판)
앤드루 윌슨 지음, 성소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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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사가 된다는 건 거물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심지어 자기 분야에서 전위적인 선구자의 역할을 맡는다는 건 대체 어떤 부담감과 압박감을 가져오는지 그 당사자의 마음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명제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그 두 세계의 균형점을 찾아 그 지점에서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사적 개인과 공적 개인의 두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그 분열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통합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없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누리는 명성, 권력, 재력에만 주목하고 그 뒤안길에서 흘릴 눈물은 흔히 무시해버린다. 이제 그러한 이름을 가지고 자신에게 어떤 목적이 있어 다가오는 이들, 상업적 이윤을 끊임없이 창출해야 하는 부담감, 혁명적인 새로움을 항상 창출해야 하는 부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어린 시절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한 천재를 좀먹어 가는 과정에 동행하는 일은 참으로 힘겨웠다. 마치 그의 주변인, 심지어 그 자신에게 들어가 그러한 고강도의 삶을 체험하는 느낌, 그리고 그 비극적인 결말. 과연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알렉산더 맥퀸. 그의 이름은 거의 하나의 고유 명사가 되었다. 노동자 계층 가정에서 자라나 성적 학대와 빈곤에 시달리던 그가 최상류층으로 진입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다. 열두 살이 되자 그는 패션계의 거물이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고 능청스럽게 이야기한다. 패션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디자이너들의 경력을 찾아봤다고 한다. 소년의 꿈은 실현되었다. 고모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진학하게 된 패션 스쿨 패션쇼에서 그는 '보그'의 이사벨라 블로의 눈에 들게 된다. 이후로 둘의 기이한 공생 관계는 난임이었던 블로가 맥퀸을 자신의 아들이자 또다른 자아로까지 생각하는 관계로 진전하게 된다. 천재적인 패션 디자이너에 빠진 블로는 맥퀸을 자신의 상류층 세계에 끌어들이고 지원하여 알렉산더 맥퀸이라는 브랜드를 완성하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맥퀸은 전위적이고 반역적이었고 혁명적이었다. 패션쇼 자체를 보수적인 세계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하나의 퍼포먼스로 그 자신의 위인전으로 격상시킨다. 언론의 혹평과 호평은 항상 동시에 쏟아져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인간 본능의 어둡고 심오한 악마적 분위기에 그는 침잠한다. 그의 노골적이고 기이한 옷들과 쇼는 그 자신을 유명하게도 만들었지만 그의 아킬레스건이 되기도 했다.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되었을 때 그에게 가해진 어마어마한 압력과 부담은 상상 이상이었다. 패션계는 냉엄하고 잔혹한 자본주의의 집약체였다. 그는 소진되었고 구속되었다. 약물과 방탕한 생활과 천재적 성취는 혼재되었다. 끊임없이 사랑하고 배신하고 배신 당하고 이용하고 이용 당하고 실험하고 선도하고 창조하고 절망하고 넘어지고 무너졌다 다시 일어섰지만 영혼의 쌍둥이 같았던 블로의 자살과 어머니의 죽음은 결국 그를 허물어뜨렸다.


"죽음은 슬픈 일이죠. 우울하지만 동시에 낭만적이에요. 죽음은 인생이라는 한 주기의 끝이에요. 무엇이든 끝을 맺어야 해요. 죽음은 새로운 것이 태어날 공간을 마련해 주니 긍정적이죠."


악동 훌리건이라는 호칭을 얻었던 맥퀸은 6형제 중 막내였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할 것 같았던 엄청난 부를 거머쥔 후에도 노모 앞에서는 목이 메는 아들이었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을 믿을 수 없었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던 어린 시절의 상흔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 물었을 때 그가 한 대답은 슬프다. 대답은 "엄마보다 먼저 죽는 거요."였다. 맥퀸은 그러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썼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머니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는 약속과 자신이 세상을 향해 남긴 작품들이 남길 의미들을 기약하며 그는 새로운 것이 태어날 공간을 예비하고 떠나 버렸다. 


맥퀸의 친구는 그가 아무리 대가들에게 극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도 자존감이 낮았다고 얘기한다. 돈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들, 순간의 새로움에 탐닉해서 끊임없이 그것을 강박적으로 쥐어짜야 하는 패션계, 본질적 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 교환되는 세계에서 그는 불행했다. 그의 모습에서 읽는 자들은 스스로의 단편들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긴 채 사라져버린 그의 비극적인 결단이 남기는 여운이 가지는 두려움에서 우리의 삶,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자본주의의 무모한 룰렛 돌리기에 잠식 당하지 않기 위해 과연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 더 난해하고 심오한 질문에 둘러싸일지도 모른다. 맥퀸은 죽어서도 이렇듯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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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내려서 신난 멍뭉이처럼 연휴 왔다고 여기저기 인사댓글 달고 다니는 syo입니다.
blanca님, 복된 연휴 되세요^-^

blanca 2020-01-24 13:21   좋아요 0 | URL
멍뭉이 ㅋㅋ syo님도 즐거운 신나는 연휴 되기를 바랍니다. 날씨도 따뜻해서 한층 더 좋네요.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건축학도가 칠십 대의 노장 건축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보낸 한 때가 어떤 식으로 그의 삶에 각인되는지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절창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풍광, 귓가에 들리는 듯한 소리의 감각에 대한 표현들, 시간의 경과 속에 변전하는 것들에 대한 천착,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땅에 건물을 짓는 행위에 대한 심오한 탐구는 건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단숨에 흡입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시종일관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대한 오마주가 투영되어 있다. 특히나 라이트가 노년에 만든 일종의 젊은 건축도들의 도제 시스템의 장소인 '탤리에신'은  이야기의 배경인 건축 사무소의 영감을 제공해 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시스템, 노건축가의 카리스마로 운영되는 시스템, 실현되지 못한 설계들, 그럼에도 그곳에 있었던 청춘들이 계승한 스승의 미완성의 꿈들. 간토 대지진을 견뎌낸 라이트의 제국호텔에 대한 이야기.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자연스럽게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진혼곡이 된다.

















라이트는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할 정도로 세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유명한 건축가다. 그가 생의 후반에 건축한 별장 '낙수장'과 '구겐하임 미술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차를 넘어선 영감과 경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의 성취와는 별개로 그의 사적인 삶에는 많은 논란의 지점이 있다. 아버지로서 무책임했고 남편으로서 불성실했으며 사적 개인으로서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약속을 어겼고 거짓말을 남발했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고객의 아내를 가로채고 산적한 문제들에 무책임하게 도피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러한 일들을 수습하고 여전히 속아주는 무리들이 그의 성취들을 가능케 한 역설은 어느 드라마보다 극적이다. 그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은 처절한 비극과 배신극과 불굴의 의지와 무모한 낭만적 열정이 결합된 막장 드라마와 위대한 성취가 혼재된 복합적인 융합체다. 그래서 그의 삶을 그의 성취와 함께 이야기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칭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침묵할 일도 폭로해야 할 일도 많은 인생이다.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로 건축 비평가 에이다 루이즈 헉스터블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다룬 것은 이 균형의 지점을 절묘하게 포착해 낸 저자에 대한 맞춤한 경의라고 생각한다. 평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이 쓰는 대상에 대한 애정 없이는 결코 제대로 완성해낼 수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지만 그의 공과를 치우침 없이 평가하고 존경하지만 비판 받아야 하는 지점을 놓치지 않는 꼼꼼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저자의 저력이 놀랍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다. 하나는 그가 지어 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실제로 산 것이다. 

-에이다 루이즈 헉스터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20세기 건축의 연금술사>


헉스터블의 언명은 머리말에 있다. 그녀는 '두 개의 삶'이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는 이 역사적 건축가가 자신의 삶을 이미 자신이 남기고 싶었던 그래서 창조해 냈던 또 다른 삶으로 표현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서전을 썼다. 그리고 이 자서전은 실체적 진실이라기보다는 라이트가 가공한 진실로 윤색해 낸 삶이다. 그러나 그 거짓은 저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라이트는 이단아였고 독불장군이었고 아웃사이더였고 반역자였다. 스스로를 '위대한 건축가'라 칭하는 기염을 토했다. 심지어 그의 일종의 제자 양성 도제 시스템이었던 펠로십조차 거대한 사기극이자 싼값에 젊은 건축학도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 그러한 일로 그를 고소한 이들도 있었다. 출생 연도부터 출신 학교 등 그가 스스로 설명한 많은 것들의 진실성이 의심 받았다. 금전에 무책임해서 수시로 돈을 빌리고 안 갚았고 공사 대금은 언제나 예상보다 훨씬 불어나 있었으며 현장을 자주 비웠다. 그의 건축물 또한 무너지기도 했고 빗물이 새고 여러 하자를 드러냈다. 이러한 많은 결점들이 그에게 치명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더 의아할 정도다. 그럼에도 그의 건축물들은 여느 다른 동시대의 동료들의 그것들 위로 우뚝 솟아오르는 결정적인, 선도적인 탁월한 점이 있었다. 그 누구도 그가 만들어 낸 것들을 도저히 모방해 낼 수 없었다. 그의 설계는 반 세기가 훌쩍 지나서야 실현될 수 있는 것들도 있을 정도로 급진적이고 혁신적이었다. 이 딜레마를 헉스터블은 정확히 지적한다. "예술에 있어서는 위대하지만 태도에 있어서는 왜소했다."는 그녀의 평은 함축적이다. 


그가 조강치처를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여인과 함께 할 보금자리로 설계한 '탤리에신'에서의 비극은 오래도록 뇌리에 박힐 정도다. 그가 떠나 있던 시간에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은 무참하게 살해 당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삶의 비극 앞에서도 라이트는 일어난다. 그곳이 몇 번이고 화재에 전소되어도 라이트는 없는 돈을 끌어들여 재건한다. 심지어 육십이 훌쩍 넘어 남들은 은퇴할 연령에 이르러서도 그는 가장 정력적으로 일에 뛰어들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제자 양성 시스템을 자급자족 공동체로 만들어 낸다. 그의 위대한 성취는 이러한 생의 후반기에 이루어진다. 이 대책없는 몽상가의 투지와 무모함은 그가 이루어 낸 예술적 성취가 빚진 대목이다. "완벽함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헉스타블의 말은 라이트를 가장 잘 집약해서 표현한 문구다. 그는 완벽해지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천재성을 발현할 수 있었다는 역설의 지점에 우뚝 선 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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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1-2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트 평전 읽어보고 싶네요. 소설보다 더 극적인 인물인 듯@_@;;;;;

blanca 2020-01-23 17:40   좋아요 0 | URL
이건 소설가도 생각해 내지 못할 극적인 일들이 빵빵 터지는 인생이더라고요. 놀라운 건 남들 다 은퇴할 나이에 역사에 남을 업적 또한 빵빵 터뜨리고요. 요새 예술가들, 소위 위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 중이랍니다. 자기 분야에서는 프로지만 나머지는... 반드시 수습해 주고 받아주고 이해해 주고 처리해 주는 반려자가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 흥미롭더라고요.
 

전자책은 종이책을 대신할 수 있을까? 수많은 갑론을박이 있어왔다.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마존만 봐도 거의 실물의 책에 가깝게 구현했다는 평을 듣고 심지어 절판된 종이책까지 쉽게 읽을 수 있는 킨들조차 종이책 시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실시간으로 클릭 한번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책을 구입할 수 있고 자리도 차지하지 않고 심지어 물속에서도 읽을 수 있는 이북이 있음에도 무겁고 번거로운 종이책이 여전히 매대에 놓여있는 이유가 뭘까.


킨들과 카르타가 있다. 원서야 배송료나 배송 기간을 생각하면 킨들이 비교우위다. 킨들은 새로운 세대를 계속 시도하며 종이책의 장점과 단점을 골고루 분석해 종이책과 전자책의 접점의 지대에서 완벽체에 가깝게 구현해 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느낌이다. 터치감도 시각의 피로도 개선도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설명하기 힘든 이물감, 실재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느낌은 여전하다. 마음대로 줄치고 긋고 메모할 수 없다. 물론 하이라이트, 메모 기능이 있지만 한 박자씩 미끄러진다. 내가 읽은 책은 전자책장에 있지만 정말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이 없다. 책의 실물이 없이 활자는 내려앉지 않는다. 


거의 몇 개월만이었을까. 한참만에 꺼낸 카르타는 'NO POWER'라며 울어댄다. 아무리 충전해도 요지부동이다. 인터넷에서 온갖 노하우를 섭렵하여 실험해본다. 재부팅을 해보려 끝이 뾰족한 드라이버로 미친듯이 리셋 버튼을 뚫어버릴 태세로 찔러도 보고 아예 그 상태에서 충전을 해서 효과를 봤다는 사례에 드라이버를 고정시키고 충전도 해보다 무응답에 던져버렸다.


며칠의 시간이 흐른 뒤 책장에 앉은 먼지를 보니 나는 여전히 책의 실물을 줄여야겠기에 다시 도전한다. 드라이버로 이미 만신창이가 됐을 리셋 버튼을 강박적으로 찔러댄다. 여전히 부팅조차 안 된다. 마음을 비우고 서비스 센터에 보내야 겠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 아예 셀프로 보드를 갈아볼까 하는 마음까지 들려는 찰나 다시 검색을 해보니 충전 케이블을 교체해 보라는 조언에 솔깃한다. 다시 찔러대기 시작하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읽었던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의 표지가 반갑게 나타난다. 오기로 고,쳤,다.


와, 어쩔 수 없이 오늘 주문하려 했던 책들은 조금 참고 전자책을 주문해야 하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실물의 책들을 영접하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고장나면 꺼지면 읽을 수 없는 전자책들에 대한 비호감은 여전하지만 책을 이고 지고 살지 않으려면 전자책과 친해져야 한다. 이게 사실은 다 상호대차까지 신청해서 한참 걸어 빌려온 에밀 졸라의 <인간짐승>의 너무나 낡은 책 상태, 불친절한 소설 도입부 때문이다. 에밀 졸라로 실패해 본 경험은 없는데 도저히 다 못 읽을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에밀 졸라가 여성을 묘사하고 자신의 이야기에 끌어들이는 방식이 거슬린다. 그 시대상을 핍진성 있게 드러낸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작가가 여성에게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시선이 때로 필요 이상으로 거칠고 폭력적이다. 물론 편견이나 의도적 무시, 성적 상품화가 에밀 졸라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에밀 졸라는 비겁하지 않은 작가이지만 섬뜩한 면이 있다. 여성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가 노출될 때가 있다. 너무 잘 알아서일까, 그는 절망을 서슴지 않고 나는 그 어두움이 때로 참 싫다.


















그래서 빌려온 책을 읽지 않게 됨으로써 새로운 책을 준비해야 하고. 읽고 싶은 책들은 대기 상태이고. 다 살 수는 없고. 그런 상태다. 이북 리더기를 자가 수리했으니 전자책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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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1-1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르타ㅠㅠ 읽지도 않으면서 생각날 때마다 충전만 해놓는 상태-_- 왜 샀나 모르겠어요 이 욕심ㅠㅠ 아무리 애써봐도 전자책과 친해질수는 없겠는데 이미 한참 과포화상태인 책장을 보면 한숨만=_=;;;

blanca 2020-01-19 16:29   좋아요 0 | URL
달밤님, 그래도 잘 관리하시네요. 저는 아예 방치하다 아예 못 쓰는 줄 알았답니다. 전자책보다 실물책이 훠얼씬 좋은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리 목록이 있다손 치더라도 딱 어떤 페이지을 찾아 읽는 그 느낌도 없고, 되팔 수도 없고. 저는 두 번 읽을 것 같지 않은 책은 전자책으로 읽으려 하는데 전자책으로 읽어버린 책이 너무 좋은 경우 초난감입니다. 여하튼 책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좀 덜해지면 좋은데 그게 어려우니 말이에요.
 
나의 문구 여행기 -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용기에 대하여
문경연 지음 / 뜨인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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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이 되면 교보문고 문구 코너 다이어리 판매대는 여전히 붐빈다. 내지를 그득 채우지 않더라도 새해에는 무언가 좀더 계획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일종의 의식처럼 종이 플래너를 사는 습관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무리 스마트폰을 껴안고 살아도 내가 새해에 가지는 비장한 결심에는 종이와 연필이 필요한 법이다. 그 틈에 중후한 노신사가 서서 다양한 다이어리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당신에게 새해는 당신을 둘러싼 젊은이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겠지만 여전히 새로운 결심과 의지와 파이팅을 품고 있을 것이다.


나날이 죽어간다고 이곳저곳에서 애도하는 활자의 시대에 여전히 아날로그적 문구 시장은 건재하다. 쓰지 않는 연필이라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연필들을 수집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종이 노트, 다이어리 꾸미기(일명 다꾸), 스티커, 스탬프, 엽서, 파일 등에 다양한 브랜드가 생겨나고 확장된다. 사람들은 꼭 그것들을 백프로 소비하지 않아도 소유하고자 수집하고자 하는 열망에 기꺼이 굴복한다.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고 대단한 공간을 요구하지 않는 이 시장이 죽지 않는 것에 안도한다. 동네 문방구가 하나둘씩 문을 닫아도 그 안에서 고작 연필 한 자루, 노트 한 권, 지우개 한 개를 한 시간이 넘게 고르며 주인 아주머니와 근황을 주고 받던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사랑은 비단 책에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문구에게까지 확장된다. 이 사랑은 그런데 왠지 떳떳하지가 않다. 그게 문제였다. 문구 사랑은 왠지 내밀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불러온다. 


'아날로그 키퍼'라는 범상치 않은 문구 브랜드를 운영하는 저자도 그러한 저어함을 고백한다. 이 책의 표지에는 심지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용기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 전쟁에 뛰어드는 대신 문구덕후는 63일간의 문구 여행을 감행한다. 파리에서 베를린에서 바르셀로나에서 런던에서 상하이에서 그녀가 찾아간 곳은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문구점이었다. 문을 열기 전 대기했다 주인이 장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설레어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구 여행이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웠다. 문방구에 찾아가고, 사진 찍는 게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이 멋진 문방구를 눈으로만 담으면 되지, 왜 사진을 찍고 글을 써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배배 꼬인 마음을 이겨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잔뜩 흡수했다. 마음껏 호들갑을 떨었다. 

-p.180


그녀의 호들갑이 때로 생략했던 기록들이 쑥스러워했던 사랑이 열정이 이 책의 골조다. 그 여정에서 사회에서 주입한 것들이 아닌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세상을 향해 표현하는 일은 통속적이지 않다. '아날로그 키퍼'에서 구입한 소위 떡메모지의 그 평범하지 않은 격자무늬도 주인장의 마음을 알고 나니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를 목도하는 느낌이다. 그 사랑은 언뜻 가벼워보이지만 제대로 느끼면 묵직하다. 사랑하는 것을 끝까지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의 시연에 전염된다. 내가 제대로 미처 표현 못했던 사랑들에 무언가를 제대로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은 이 아름다운 음각의 각인들이 남아 있는 하얀 책에 대한 되돌려 보내지 못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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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때부터 열한 살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정확히 체르니 50번의 1번까지 마쳤다. 집안이 넉넉해서도 재능이 넘쳐서도 아니었다. 지금 와서는 본인이 피아노를 배우고 자유롭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과 열정이 빚어낸 우연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때로 믿었던 것 같다. 지금도 공부하라고 닦달하던 엄마의 모습이 아닌 피아노 연습하라고 잔소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사학년 때 그만둔 피아노로 참 길게도 덕을 봤다. 중학교 때 아이들 앞에서 한창 인기였던 소피 마르소 주연의 '라붐'의 영화 주제가를 연주했던 기억, 고등학교 때 기악 시험 합주에서 굳은 손가락으로 엉망으로 친 피아노 때문에 음악 선생님께 신 나게 야단맞고 다시 연습해 제대로 완주했을 때 받은 칭찬, 둘째를 가지기 전 동네 아이들과 함께 다닌 피아노 학원. 


잠시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했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 한 연주로 마치 재능있는 아이인 것처럼 착시 효과를 주던 시절에도 나는 내가 열정도 소질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게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바흐를 치면서부터다. 바흐는 정말 그렇게 행복한 대가족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면서 빚에 시달리고 요절한 모차르트보다 가혹했다. 왼족 새끼 손가락까지 오른손 엄지 손가락의 강도와 활용을 요구하다니. '바흐인벤션'은 나를 결국 피아노앞에서 몰아냈다. 한 마디로 양손을 충분히 흠뻑 사용하기를 바라는 그 기대치를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왼손은 왼손다웠다.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피아노를 전공하려면 그러한 평범성은 당연히 제약 요인이었다. 진지하게 피아노를 그만 치고 싶다는 나의 요청에 응한 엄마의 마음을 지금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음을 알고 체념했던 걸까. 엄마가 그렇게나 염원했던 음악가에 대한 열망은 아무도 실현시켜주지 못했다. 지금도 엄마도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 버지니아 로이드는 그러한 평범했던 나보다 훨씬 재능이 있었다. 피아노를 시작한 나이는 나보다 많았지만 무려 13년간 피아노를 배웠고 고등학교 조회 때는 학교 조회에서 대표로 반주를 했고 절대 음감을 가졌다. 고등학교 졸업 20주년 동창회에서 많은 이들이 그녀가 피아노를 여전히 칠지 궁금해할 정도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유망한 전망을 지녔던 소녀였다. 이 책에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가 되지 않은 여자의 피아노에 얽힌 일종의 애증의 연대기를 손녀와 비슷하게 음악적 재능을 지녔던 할머니 앨리스의 삶과 교차시키며 짚어가고 있다. 여성이 음악, 특히 피아노 연주에 소질과 재능을 보여도 남자들과는 달리 전문 음악가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구조적 한계, 또한 클래식 연주 위주로 형성된 음악계에서 즉흥연주나 재주에 관심을 가질 때 그것이 일종의 일탈로 간주되는 경직된 시선에 대한 이야기는 왜 그 많았던 '피아노 앞의 여자들'이 피아노 앞을 떠나게 되는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방증이다.


피아노를 매개로 버지니아 로이드도 할머니 앨리스도 인생에서 가장 큰 상실의 시차를 공유한다. 앨리스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결국 장차 버지니아를 낳게 될 버지니아의 아버지를 입양함으로써 치유하고 버지니아는 양지에 내어놓을 수 없었던 즉흥연주에 대한 열망을 재즈 피아니스가 됨으로써 실현한다. 결국 할머니 앨리스는 손녀인 이 책의 저자 버지니아를 얻게 됨으로써 자신의 고향에 두고 온 음악에 대한 애정을 실현하게 되는 셈이다. 


피아노는 그녀의 정체성이다. 내가 지금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숱하게 울며불며 매달렸던 그 고투의 시간들이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손가락은 끊임없이 굳는다. 한 달만 피아노를 치지 않아도 손가락은 내가 연주하고 싶은 선율을 어색하게 튕겨낸다. 그래도 여전히 쇼팽의 에튀드 중 '나비'를 연주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등뒤에서 속도가 빨라지지 않나 나를 감시하는 선생님도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야단치는 엄마도 아닌 나 홀로 내가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연습으로 기계적인 타건이 아닌 쇼팽이 원했던 바로 그 느낌, 그 연결에 가까이 가 닿는 느낌으로. 그게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왜냐하면 나의 정체성 속에서 피아노는 여전히 패배감으로 기억되는 말줄임표이므로 무언가 제대로 된 마침표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낭만적인 믿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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