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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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간 디디에 에리봉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우리 모두가 통과하게 되는 필연의 늙음과 죽음을 가지고. 가장 내밀한 사적 이야기를 공적인 장에 펼쳐 놓는 그의 쓰기에는 답이 없다. 묻어버릴 수 없는 질문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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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1-01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럽은 그나마 기본적인 사회 복지가 잘 되어 있어 다행이지마 한국의 경우 저 소득츠의 노년은 오로지 자식에게 의지해야만 합니다.나라의 보조는 일 부분이어서 독거 노인들은 누구의 보살핌도 없이 쓸쓸히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고 자녀가 있는 경우라면 요양원이라고 갈 수 있지만 비용 부담으로 자식들도 가난의 악습에 빠지게 되지요.
특히나 요즘은 남녀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 혼자사는 가구가 늘어나는데 향후 20~30년 내에 커다란 사화적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blanca 2026-01-02 09:03   좋아요 0 | URL
에리봉 얘기처럼 이 노인 복지에 관련된 구조적, 사회적 문제가 너무 거대해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아예 손 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다락방 2026-01-01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랭스도 안읽었는데 에리봉의 새 책이군요. 저 순간적으로 디디봉 이라고 쓰려고 했네요. 하핫.
한국가면 랭스 부터 읽어야겠어요. 불끈!

블랑카 님, 해피 뉴 이어!

blanca 2026-01-02 09:06   좋아요 0 | URL
디디에 에리봉이 쓴 여성 서사도 정말 공감이 많이 갔어요. 랭스는 걸작이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아, 오늘 영하 11도예요. 나갔다가 와, 정초부터 따귀 맞는 느낌이었네요. 다락방님도 해피 뉴 이어!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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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핌에 두 번밖에 가지 못할 것이었다."


이 첫문장의 '핌'은  "오랫동안 그곳은 내게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로 표현됐던 디디에 에리봉의 고향 랭스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원이다.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통해 고백한 디디에 에리봉의 계급 탈주의 오디세이는 이제 그의 어머니인 서민 여성 노동자의 내밀한 개인적 늙음과 죽음의 서사를 사회학적 역사적, 철학적으로 치열하게 재해석하는 속편으로 이어진다. 


디디에 에리봉은 스스로를 아주 나쁜 아들이라 지칭하지만, 어머니의 사후 씌어진 이 '사회학적 전기'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십대 시절부터 하녀와 가정부 일을 하다 만난 노동자 계급의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55년간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다 끝내 끝까지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요양원에서 고독사한 한 여인의 비참한 삶을 생생하게 복원하여 단순히 개인적 특수성에 한정시키지 않고 사회구조적, 제도적인 측면에서 조망하고 해석하여 유의미한 부고로 탈바꿈시켰다. 디디에 에리봉 특유의 내밀한 개인사의 사회학적 해부는 우리가 가족 관계 안에서 통과하는 필연적인 늙음과 죽음에 대해 그 어떤 이도 제시해주지 못했던 번뜩이는 통찰을 발견하게 한다. 


하지만 제약의 톱니바퀴들 안에서도 언제나 '게임'은 있다. 구조적 타성들에 의해 아무리 축소되고 위축되어 있다 해도 개인적 혹은 집단적 변화를 위한 자리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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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에리봉은 단순히 모든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 구조적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비록 늙음이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관계에서의 소외, 단절을 표상하는 요양원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한국의 상황과도 겹쳐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이 현재가 결국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글쓰기는 변화의 자리를 예비한다. "노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지경까지 다다른다."는 그의 적나라한 표현은 "늙는 것이 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한" 우리가 반드시 도달하게 되는 비참한 존재의 단계가 된다. 디디에 에리봉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공명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는 언제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면서도 그 안으로 침잠하는 대신 그 개인사를 사회학적 고배율 현미경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밝혀낼 수 있을까 싶은 지점까지 세세하게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난 아들이었고, 이제는 그렇지 않다. 어머니 생전에 우리 관계가 아무리 멀고 간헐적이었다 해도, 그리고 근본적으로 내가 평생 아들로서 노력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해도 난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었다.

-pp.154


이 한 대목만 놓고 본다면 사람들은 오해할지 모른다. 그래, 그는 가부장적 구조에서 한 몸에 기대를 받고 자라 어깨가 무거운 아들이구나. 이제 이런 고백은 진부하지 않나? 이렇게. 그러나 디디에 에리봉이 말한 아들의 의미는 다르다. 그는 노동자 집안에서 공부한 유일한 아이였고, 유일한 게이였다. 실제 그는 <랭스로 되돌아가다>의 대대적인 성공 이후 타인이 아닌 친동생에게서 그의 성정체성의 암시에 관련한 적대적인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모자의 관계는 사회적 편견의 지형을 고스란히 재현한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든의 어머니가 뒤늦게 빠진 사랑을 가장 먼저 고백한 이는 바로 디디에 에리봉이었다는 점은 그녀가 아들에 대해 가지는 모순적인 애증을 드러낸다. 즉 노년의 사랑과 동성애가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지대에 있다는 공통된 감각 말이다. 인종차별주의자에 극우로 변신한 늙은 노동자 어머니는 아들이 쓰는 글에서 자신이 차지해야 할 위치를 알았다. 이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존재, 다양한 층위에서 느끼는 정동이 결집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시선은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이야기해도 이 작가의 탁월한 글쓰기의 핵심을 보여준다. 즉, 그는 우리가 모두 단정하는 그것들의 지반을 기꺼이 흔들어댄다. 우리가 옳다,고 여기며 말하는 것들이 소외시키는 실재들에 대해서. 



디디에 에리봉이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한 문장에 응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철학에는 늙음의 자리는 없다."

이 철학은 실존주의다. 인간의 실존에 천착하는 이 철학에서 늙음을 은폐하고 묻어버리고 있다는 발견은 충격적인 발견이다. 인간 존재의 필연적 스펙트럼의 끝에 있는 시기를 부재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성립하는 철학을 우리는 신봉해왔다. 그러나 정작 거기에서 얘기하지 않는 것은 결코 '우리'로 연대하여 세력화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미래, 늙음이다. 


디디에 에리봉 어머니의 삶, 노년,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우리 자신의 그것에 대해 암시하고 촉구한다. 지금 소외시키는 그것들이 결국 우리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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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1-01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년에 홀로 있는 것은 참 슬프고 외로운 일이지요.특히 요즘은 비혼에 따란 1인 가구가 증가되는데 제대로 된 노후 대책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면 향후 십 수년내에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블랑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26-01-01 14:32   좋아요 0 | URL
결국은 다 홀로 그 길을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새해 벽두부터 조금 우울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괜히 그랬나 싶기도 해요.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차의 꿈>을 봤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광활한 북서부의 삼림 풍경을 따라가는 카메라 워크와 자연빛을 활용한 촬영 기법이 인상적인 영화다. 벌목꾼 로버트가 철도 건설 일을 하게 되며 우연히 목도하게 되는 폭력의 장면은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의 복선이 된다.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부부를 꼭 닮은 사랑스러운 딸을 얻고 생각지도 않았던 비극에 직면하게 된 한 사내의 일생을 잔잔하게 조망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결국 모든 것들과 서로 겹치고 얽히며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철도 노동자들, 벌목꾼들이 어두운 밤 타오르는 모닥불 옆에서 나누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아름다운 산문시처럼 들린다. 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원작자는 소설가 데니스 존슨이다. 




















데니스 존슨의 소설 <예수의 아들>은 <기차의 꿈>과는 많이 다르다. 열한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의 화자는 너무 젊고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거나 범죄를 저지른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보다 더 자유분방하고 더 대책 없는 나쁜 남자다. 현실에 있다면 그 누구도 결코 좋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인물이다. "요령을 모르고", "이질감, 겉도는 느낌, 깊은 패배감"에 휩싸여 있는 남자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날입니까?"라고 말하는 세계는 거부감이 들고 폭력적이지만 놀랍도록 통찰력이 번득이는 날카로운 문장들로 독자를 매혹한다. 소설 속 주인공의 여자를 대하는 태도나 대사는 분명 문제적인데 그가 삶에 대해 느끼는 혼란과 그 본원적인 절망에 대한 묘사의 통찰력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데니스 존슨의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급소를 가격하는 힘은 미국 소설 쓰기의 미학에 대한 하나의 교본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독특한 색감과 질감의 표지와 도발적인 편집도 훌륭하다. 


잠시 후 하디가 조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을 하는데요?"

그러자 조지가 말했다.

"생명을 구해요."

-데니스 존슨 <응급실>


그 생명을 구하는 남자는 본인은 정작 자기가 운전하다 토끼를 치고는 그 뱃속에 있던 새끼를 죽게 놔뒀다고 주인공을 저주하는 모순적인 캐릭터다. 읽는 이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허들을 가뿐히 뛰어넘어 그것을 현실적인 삶에 통합하는 놀라운 이야기들의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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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12-25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차의 꿈 봤어요. 요즘에도 이런 영화가 여전히 만들어지고, 또 보고 있구나, 생각하고 마음이 푸근해졌어요.

blanca 2025-12-25 17:51   좋아요 0 | URL
느린데 그 사이로 응축된 서사가 참 감동적이더라고요.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잘 봤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종종 듣는 <윤고은의 EBS 북카페>에서 화요일마다 방송하는 '무리하는 시인들'에서는 김소연, 김상혁 시인이 나와 그 주에 인상 깊게 읽은 시를 낭송하고 그 감상평을 전해준다. 나는 시집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고 시를 써본 적도 거의 없어서 사실 이 코너를 애정하게 될 줄 몰랐다. 우연히 듣게 된 방송에서 김소연 시인이 낭송해주는 시는 흡사 음악처럼 귀를 울렸다. 시어 하나하나, 그 시어 사이로 끼어드는 의도된 공백까지 시인이 읽어주는 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들렸다. 걷다가 '헉'하고 한번씩 멈추게 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시는 사람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행위까지 덧붙여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장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었다. 


아침에 유치원에 간 아들이 

저녁에 서른다섯 살이 돼서 돌아왔다

늦었네 하고 말했더니

벽에 걸린 뻐꾸기 시계를 그리운 듯이 올려다보면서

아들은 어른의 목소리로 응, 하며 대답했다

-요쓰모토 야스히로 <세계중년회의> 다녀오겠습니다! 중


김소연 시인의 목소리로 이 시의 이 대목을 듣는데 뭔가 가슴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감동이 있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 아침에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엄마와 종일 붙어있겠다고 발버둥 치던 아이가 어느새 성인이 되어 내 앞에 서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떠난다. 떠났다 돌아올 것이다. 그리움을 가지고. 


시란 이런 것이구나.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흘려보낸 것들을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게 소환하고, 또 그것을 누군가의 목소리로 듣게 되는 순간 그리운 그 시간들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왜 시를 쓰고 시를 읽고 시를 낭송하는지 알게 되는 시집이다.



















그리고 나는 내 친구 동생의 추도식에 참여하고 나서야 그의 아버지가 이 가슴 저미는 시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완벽했던 여름...... 가족 중 누구 하나도 죽어가지 않았던 그 여름을 기억한다."

-제임스 우드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한창인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쓴 추도사는 하나의 시다. 인생은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사후성"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저자 제임스 우드가 문학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종지부다. 돌이켜보고 돌아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비로소 성립하는 숱한 상실과 작별로 점철된 애달픈 이야기. 문학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저자의 망향의 그리움과 상실의 필연성을 오롯이 담아낸 짧지만 아름다운 강의록이다. 










AI가 마치 모든 것들을 점령할 것처럼 수선을 떨고 어수선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시를 쓰고 읽고, 소설을 쓰고 읽고 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태어나 살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없으니 그런 게 아닐까? 아마도 그게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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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12-22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소 라디오를 듣지 않아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 줄 몰랐네요. 시인들이 인상깊게 읽었던 시를 낭송해주는 프로그램이라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시에 대해서는 늘 어렵다 느끼는 편인데, 이상하게 주위에 시인도 많고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네요.

큰 아이가 대학생이 된 후로 자주 만나지 못해 한동안 섭섭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중에는 그런 존재가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라나는 시기에는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만, 다 자라서는 부모 품을 떠나야 하죠. 이제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인생이 펼쳐질테니까요.

시를 공부하는 큰 아이에게 저 프로그램을 알려줘야겠어요.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blanca 2025-12-22 15:58   좋아요 0 | URL
큰 아이가 시를 공부하는군요. 그럼 저 코너가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시인 두 명이 좋은 시를 선별해 와서 낭송해 주고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데 저처럼 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시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해주더라고요. 자식을 키우는 일은 부모가 전부였던 그 귀여운 시기보다는 사춘기를 통과해서 제대로 분리해 나가는 시기가 더 길고 어렵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두가 좋아하고 가지고 싶어하는 것에서 의연해지기란 쉽지 않다.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의한 위계에서 자유롭기란 더더욱 그렇다. 당연히 보이는 가치가 다가 아니고,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사랑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그런 원칙에 따라 살기란 시지푸스가 거대한 바위를 중력에 역행해 끌어올리는 것처럼 어렵다. 
















걸을 수 있는 길은 영원한 길이 아니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

-길을 찾는 책 도덕경, 켄 리우


<종이 동물원>의 sf 작가 켄 리우가 맞다. 사실 켄 리우가 뜬금 없이 도덕경에 관한 책을 썼다고 해서 놀랐다. 그러나 막상 운 좋게 그의 필체로 "May you find your own path."가 사인되어 있는 이 도덕경 판본을 읽어나갔을 때 왜 미래를 이야기하는 작가는 하필 이천오백 년도 전에 쓰인 노자의 사상을 다시 독해하고 번역하여 독자들에게 내밀었는지 십분 이해가 갔다.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질로 돌아가는데 이 정갈하고 아름다운 책은 큰 길잡이가 되어줬다. 특히나 "모든 생은 공포와 아름다움이 함께 추는 춤이다."라는 작가의 말은 더더욱 더. 


발생시키고, 키우고, 보호하고, 치유하고, 돌보고, 지킨다. 소유 없이 창조하고, 기대 없이 베풀며, 지배 없이 양육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형언할 수 없는 덕의 특성이다.

-길을 찾는 책 도덕경, 켄 리우


지금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보이는 것들이 지나고 나면 다 부수적인 것들이라는 걸 다시 한번 일깨우는 대목이다. 















놀라운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평면 도형들의 플랫랜드에서 사는 정사각형이다. 우연히 구와 함께 3차원 공간을 여행하게 된 정사각형은 그 새로운 관점을 설파하려다 사회적으로 불온 세력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다. 플랫랜드에서 다각형의 변이 모두 같지 않은 불규칙 도형들이 태어나면 그들을 균질화하기 위해 부모들이 위험한 수술을 감행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녀들을 정다각형으로 만들고 깎고 다듬어 최상위계층인 원에 가깝게 만들수 있다면, 부모들은 자식의 죽음도 불사한다. 각자의 차원에서 편견에 갇힌 도형들의 우화는 놀랍도록 인간 세계를 닮았다. 우리는 우리가 갇힌 세계 안의 절대적 가치와 관점 안에 갇힌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다른 차원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 관점이 영원한 족쇄가 되어버리는 걸 막을 수 없다. 이런 도형의 기하학적 세계가 여전히 현실감을 가지며 공명하는 지점은 이런 인간의 경향성을 간파하고 형상화한 작가의 통찰력도 통찰력이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회귀하고 마는 인간의 근원적 편향성을 탈피하는 게 그만큼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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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1-23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랫랜드는 과학소설이면서 수학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지요.예전 과학소설이 국내에 많이 번역되지 않았을 적에 과학 소설 리스트가 인터넷에 떠돈 적이 있는데 그때 구한다 구한다 하면서 깜빡 잊은 작품인데 blanca님 덕분에 읽어볼 마음이 다시 생겼네요.
그나저나 이런 작품이 19세기 후반에 쓰였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blanca 2025-11-24 10:45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저 생각보다 정말 너무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3차원의 세계를 인지한 2차원의 정사각이 저자라니 이 상상력이 정말... 주석 달린 걸로 다시 읽어볼까 싶을 만큼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