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닷 Photo닷 2015.6 - Vol.19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208



사진을 함께 짓는 즐거운 숨결

― 사진잡지 《포토닷》 19호

 포토닷 펴냄, 2015.6.1.

 정기구독 문의 : 02-718-1133



  사진잡지 《포토닷》 19호(2015.6.)를 읽습니다. 《포토닷》 19호는 사진가 박진영 님이 일본 후쿠시마에서 찍은 ‘산요 선풍기’를 겉그림으로 보여줍니다. 지난 2011년에 일본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터지는 일이 벌어졌고, 후쿠시마라는 시골마을은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땅도 사람도 마을도 숲도 짐승도 벌레도 새도 사라졌습니다. 이동안 일본 사회는 좀 달라졌을까 모르겠는데, 한국 사회는 그리 달라진 모습이 없지 싶습니다. 한국에서 핵발전소를 걷어내자고 하는 목소리가 정부 정책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고, 도시는 자꾸 커지기만 하면서, 전기를 큰 발전소에서 만드는 얼거리는 그대로 이어집니다.


  일본 후쿠시마에서 사진을 찍은 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일본 후쿠시마에서 찍은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마음이 될까요? 사진은 무엇을 찍어서 보여주고, 사진을 읽는 사람은 사진에서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려서 나눌까요?


  “지금 우리 사진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사진을 생산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풍요로운 적은 없었다. 많이 보고, 계속 찍고, 늘 보여주는 것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53쪽/최연하).”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사진기도 꾸준하게 새로 나오고, 사진기를 장만해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꾸준하게 늘어납니다. 이제 사진을 안 쓰는 신문 기사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언제 어디에서나 사진이 아주 넓게 쓰이고 퍼집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회에서 사진은 어떤 몫을 맡거나 어떤 구실을 할까요?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길에서 동무가 되거나 길잡이가 될까요? 문화나 예술이라는 자리로만 나아갈까요? 모든 손전화와 태블릿에 사진찍기 기능이 있는데, 집이나 학교나 마을에서는 아이들한테 사진을 어떻게 가르치거나 보여주는가요?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 가운데 사진을 찬찬히 배우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우리 둘레에 사진은 어디에나 있지만, 이렇게 많은 사진을 어떻게 읽거나 사진에서 무엇을 읽을 만한지 들려주는 자리가 무척 드뭅니다. 사진이론이나 사진강의는 아직도 서양 이론에 기댈 뿐 아니라, 여느 사람들 삶하고 동떨어진 어려운 말투성이입니다. 한국에서 찍어서 읽는 사진이지만,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 사회를 헤아리면서 사진을 읽지 못하는데다가, 사진을 찍는 전문가는 더 전문스러운 길로 나아가기만 합니다.


  “‘아무 일도 없다’라는 사실이 내 사진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내 사진은 그동안 우리가 포토저널리즘에서 보았던 클리쉐나 어떤 극적인 장면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 뉴스에 필요한 사진이 갖는 역할에 익숙하고 그것을 이해하지만 내 사진의 역할은 관찰자들이 그 안에 담긴 은유를 스스로 생각하고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65쪽/칼페쉬 라티그라).” 같은 이야기는 어떻게 헤아릴 만할까 궁금합니다. 보도사진이든 예술사진이든 굳이 ‘극적인 장면’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모전 1위를 거머쥘’ 만한 모습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가장 멋진 사진이나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하고,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저마다 제 삶을 사랑하는 숨결을 사진 한 장에 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사진이 ‘넘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사진이라기보다 넘치는 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움은 평등으로 나아가고, 평등은 평화로 이어집니다. 자유와 평등과 평화는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과 평화는 언제나 사랑을 밑바탕으로 둡니다.


  이와 달리 ‘넘치는’ 사진은 자유가 아닙니다. 맘대로 찍는다고 해서 자유롭게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그저 넘치고 넘칠 뿐인 사진은 자유와 가깝지 않고, 평등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평화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넘치기만 할 뿐이면서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헤아리지 않는 사진은 ‘사랑’을 밑바탕으로 못 둡니다.




  “포토샵의 대중화 이후 사진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이제 사진관에 증명사진을 찍으러 오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익히 알고 있는 상식이 돼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포토샵을 거치지 않은 사진만큼은 진실을 말한다고 믿는다. 덕분에 이런 지점을 노리는 어떤 사진은 조작의 과정을 거치고도 진실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또 어떤 사진은 포토샵을 쓰지 않고도 거짓의 조짐을 드러내기도 한다(69쪽/이기원).” 같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넘치는’ 사진은 참(진실)을 다룬다고 여기기 어렵습니다. 거짓이 마치 참이라도 되는듯이 다루는 사진이 넘치고 다시 넘칩니다.


  사진을 함께 짓는 사람은 서로서로 아끼는 마음이 됩니다. 사진을 함께 짓는 사람은 서로서로 보살피고 보듬으면서 삶을 가꾸려는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프로든 아마추어든 관계없이 사진은 형상을 다루고, 그 안에 의미가 심어져 있다. 카메라라는 도구를 가지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형상화하는 것이 기호작용이고, 이를 알아야 그 사람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81쪽/진동선).” 같은 숨결을 헤아릴 때에 비로소 사진을 즐겁게 찍습니다. 사진 한 장에는 언제나 마음을 담습니다. 착한 마음이든 궂은 마음이든, 언제나 마음을 담습니다. 참을 고스란히 보여주든, 참을 비틀거나 감추든, 언제나 마음을 담습니다.


  참을 보여주는 사진은 참된 마음을 보여주고, 참을 비틀거나 감추는 사진은 참답지 못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른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산으로 들로 다니며 아름다운 풍경을 기록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마을과 그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83쪽/사진아카이브연구소).”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합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모습을 찍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사진찍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아름답다고 느끼는 모습을 찍되, 내 곁에 늘 따사롭거나 포근하게 흐르는 삶을 사랑스레 찍을 수 있다면, 그지없이 ‘새로운 아름다움’이 되리라 느낍니다. 이리하여, “나에게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쁘니까 예쁘게 찍는 것이다 …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사람을 찍는다는 것이지, 배경이 아니다. 제일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가 찍은 아이의 사진이다(97, 99쪽/김현성).”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천천히 밑줄을 긋습니다. 예쁘니까 예쁘게 찍습니다. 착하니까 착하게 찍습니다. 고우니까 곱게 찍습니다. 즐거우니까 즐겁게 찍습니다. 웃음은 웃음 그대로 찍고, 눈물은 눈물 그대로 찍습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찍고, 어른은 어른답게 찍습니다.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그저 찍습니다. 그저 수수하게 찍고, 그저 어깨동무를 하면서 찍습니다. 그저 사랑을 속삭이는 손길로 찍고, 그저 마음을 나누려는 뜻으로 찍습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19호 끝자락을 읽으니, “2014년에 올라온 모터쇼 모델의 사진은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2015년의 게시판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풍경사진도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가족을 찍은 사진이나, 추억이 담긴 공간, 사건이 기록된 사진은 남은 일생에서 끊임없이 재소환되고 재해석될 여지가 남는다. 이처럼 ‘나의 이야기’가 담긴 사진은 모터쇼의 모델이나 유명 출사지의 풍경보다 훨씬 더 긴 생명력을 부여받는다(117쪽/이기원).”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사진 한 장이 얼마나 ‘긴 생명력’으로 읽히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참말 그렇지요. 모터쇼 모델뿐 아니라 운동선수나 연예인이나 모델 사진도 이와 같을 수 있어요. 이야기는 없이 ‘이쁘장하다는 모습’만 찍는다면, 이런 사진은 어느 한때 반짝일 수 있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찍으면, 이런 사진은 눈부시게 반짝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두고두고 흐르면서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이야기 있는 사진’이 매우 드물다고 할 만합니다. 집과 학교와 마을에서 ‘이야기 있는 사진’을 찍고 읽으면서 어깨동무하는 길을 말하거나 가르치는 자리가 매우 드물다고 할 만합니다.


  “사진이 있기에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이 없어도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진을 곁에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니 삶을 즐겁게 밝힐 수 있습니다. 사진을 곁에 놓지 않더라도 마음자리에 이야기꽃을 그림으로 넉넉하게 그려서 담으면 삶을 기쁘게 북돋울 수 있습니다 … ‘전업주부’로 일하는 수많은 어머니는 사진을 모르거나 사진기를 쥘 겨를이 없지만, 마음에는 언제나 사랑과 웃음과 꿈과 노래와 이야기가 흐릅니다. 아이랑 오순도순 놀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 사진 한 장을 함께 찍기에 더욱 즐겁습니다. 곁님이랑 도란도란 말을 섞고 살림을 보듬는 동안 사진 한 장을 살짝 찍기에 더욱 기쁩니다(127쪽/최종규).” 같은 이야기를 되새깁니다.


  두 손에 사진기를 쥐어도 사진을 찍고, 두 손에 사진기를 안 쥐어도 사진을 찍습니다. 필름이나 디지털파일에 앉힐 때에만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을 때에도 사진입니다. 마음에 따사로이 아로새겨서 언제 어디에서나 흐뭇하게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은 ‘마음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서로 아끼는 이야기를 찍은 사진은 필름이나 디지털파일이 아니어도 한결같이 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노래를 찍은 사진은 대형사진기나 중형사진기가 아닌 작은 디지털사진기로 찍어도 깊으면서 너른 맛과 멋을 베풉니다.


  사진은 사진기로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삶으로 찍습니다. 사진은 경력이나 졸업장으로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랑으로 찍습니다. 사진은 이론이나 학식으로 읽지 않습니다. 사진은 이야기로 읽습니다. 사진은 유명작가나 비평가 눈길에 따라 읽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라도 따스한 마음으로 노래하듯이 읽습니다. 4348.6.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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