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는 눈빛 166. 빨래터가 있는 곳


  빨래터가 있는 곳에서는 빨래터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다만, 빨래터를 사진으로 찍기 앞서, 빨래터에서 놀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며, 빨래터에 끼는 물이끼를 걷어냅니다. 옛날에는 마을사람 누구나 빨래터에서 빨래를 했으니 물이끼가 낄 일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마을사람 누구나 집에 놓은 빨래기계로 빨래를 하니까 물이끼가 자꾸 낍니다. 옛날에는 따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없어도 마을사람 마음에는 빨래터에서 빨래하고 놀고 어우러지고 이야기하던 삶이 깊이 아로새겨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사진기 있는 사람이 많으나 마을에서 빨래터로 빨래를 하러 나오거나 빨래를 하면서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울 일이 없습니다.

  샘터가 있는 곳에서는 샘터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다만, 샘터를 사진으로 찍기 앞서, 샘터에서 물을 긷고, 샘터에서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샘터에서 다리를 쉬면서 하루를 돌아봅니다. 옛날에는 시골사람 누구나 샘터에서 물을 길었으니 샘터는 만남터 구실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시골사람 누구나 집에서 물꼭지를 틀어서 물을 씁니다. 옛날에는 따로 사진을 찍거나 녹음기를 다루는 사람이 없어도 시골사람 가슴에는 샘터에서 만나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가 꽃으로 열매로 씨앗으로 넓게 드리웠습니다. 오늘날에는 사진기며 손전화기며 온갖 기계가 많으나 시골 샘터에서 사이좋게 만나서 이야기잔치를 누리는 일이 없습니다.

  기계가 없던 때에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있던 때에는 기계가 없어도 두레와 품앗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기계가 있는 때에는 이야기가 자취를 감춥니다. 이야기가 없는 자리에 기계만 춤을 추면서 더 많은 생산과 소비와 효율과 경제성장을 부추깁니다.

  기계가 있어도 이야기가 있으면 사진이 태어납니다. 기계가 없어도 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은 안 태어납니다. 삶을 가꾸려는 마음으로 날마다 새롭게 웃고 노래할 적에 이야기가 자라면서 사진이 태어납니다. 삶을 가꾸려는 손길이 사라지거나 스러지거나 잊혀지면, 새롭게 웃거나 노래할 일이 없어서 이야기도 사진도 태어날 길이 없습니다. 4348.6.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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