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가면 44
미우치 스즈에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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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513



네 눈은 어떤 마음을 보는가

― 유리가면 44

 미우치 스즈에 글·그림

 서수진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0.1.15.



  눈을 뜨면 눈으로 봅니다. 눈을 감으면 눈으로 못 봅니다. 눈을 뜨면서 마음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 있을 텐데, 마음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눈을 감아도 둘레를 환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눈을 감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 보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차분히 있으면, 내 마음이 네 마음을 읽습니다. 눈을 살며시 감고 서로 마주하면, 우리는 눈이 아닌 마음에 기대면서 서로 한결 따스하고 넉넉하게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눈을 감고 서로 마주할 때에 참다운 삶과 사랑을 읽는다고 할 만합니다. 눈을 감은 사람한테는 얼굴 생김새나 몸매가 대수롭지 않아요. 눈을 감은 사람한테는 으리으리해 보이는 건축양식은 대단하지 않아요. 눈을 감은 사람한테는 오로지 마음과 생각과 삶과 사랑만 대수롭습니다.




- ‘전장을 걷는다. 성스러운 존재로서 걷는다! 난 바람! 스쳐 가는 바람! 성스러운, 홍천녀의 마음.’ (6∼7쪽)

- ‘츠기카게 선생님! 전 아직 여신이 뭔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아요. 그 홍천녀의 고향에서 본 아름다운 산과 숲과 계곡. 비, 안개, 무지개 속에, 인간이 만든 건 무엇 하나 없었다는 것! 그 세계에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는 것! 대자연이 키워 준 몸에 마음이 깃든다. 내 마음! 우리는 이 몸에 깃든 존재! 마음이 있어 움직임도 있다. 예전에 선생님께 배운 거예요, 츠기카게 선생님! 제 마음이 있어 제 육체가 움직이듯이, 여신의 마음이 있어, 세상이 움직입니다!’ (14∼16쪽)



  미우치 스즈에 님이 빚은 만화책 《유리가면》(대원씨아이,2010) 마흔넷째 권을 읽으면, 연극 연습을 하다가 그만 눈을 다친 아유미가 나옵니다. 아유미는 눈을 다치기 앞서 츠기카게 선생님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아주 멋있게 홍천녀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유미는 멋있게 연기를 할 뿐, 다른 마음을 연기에 담지는 못합니다. 이런 모습은 눈썰미가 깊은 다른 사람도 알아차립니다.


  여느 사람들은 아유미가 예쁘고 멋있다고 여깁니다. 여느 눈길로는 아유미야말로 홍천녀를 연기할 만한 배우라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홍천녀를 몸소 연기한 츠기카게 선생님을 비롯한 눈밝은 사람들은 아유미한테 없으나 마야한테 있는 숨결을 느낍니다. 마야한테는 늘 넘치지만 아유미한테서는 늘 찾아볼 수 없는 숨결을 느껴요.




- “그 애 마음이 너무 강해서 다른 배우들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도 흠이었지. 하지만 한 가지, 그 아인 그 연기 속에서 아코야로 살고 있었어. 솔직히 놀랐네. 그 아이가 목표로 한 게 홍천녀의 리얼리티였을 줄이야!” (31쪽)

- “왜 그러세요, 선생님?” “겐조. 그가 변한 것 같아.” “예?” “하야미 마스미 말야. 눈 속의 차가운 불이 꺼졌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56쪽)



  《유리가면》 마흔넷째 권에서 아유미는 ‘눈을 잃다’시피 하면서 모든 삶이 흔들립니다. 이제껏 두 눈에 기대어 살아온 나날을 비로소 처음으로 돌아봅니다. 지난날에 헬렌 켈러를 연기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막상 ‘눈이 없는 삶’이 무엇인지 알면서 연기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유미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눈앞이 흐려졌으니 연기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눈앞이 흐려진 삶을 고스란히 맞아들이면서 ‘홍천녀를 마음으로 맞아들여 연기하는 길’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아유미는 아직 스스로 잘 모르지만, 마야는 ‘눈을 잃다’시피 한 나날을 늘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모르는 채 자랐고, 어머니는 다른 사람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일꾼이었으며, 마야도 늘 온갖 심부름과 일을 떠맡아야 했습니다. 마야는 연극표 한 장을 얻으려고 한겨울에 바다에 뛰어들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삶을 아유미는 하나도 모르지요. 아유미로서는 ‘보거나 듣기’는 했어도 ‘몸으로 겪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 “키타지마 마야같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아가씨와 같은 배역을 놓고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요. 홍천녀는 아름다운 여신의 역이니, 그만 한 미모가 받쳐줘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아, 할멈. 그 애는 연기를 하면서 점점 빛이 나는 애야. 무대에선 아주 다른 사람인걸. 외모의 아름다움은 그 빛 앞에선 아무 쓸모도 없어 … 그 애한텐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늪 같은 면이 있어. 뭐가 감춰져 있는지 모르는 신비한 늪. 가끔 그 늪의 바닥에서 반짝이는 빛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63쪽)



  아픈 적이 없는 사람은 아픔을 모릅니다.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모릅니다. 길을 걸은 적이 없는 사람은 ‘걷는 여행’이 어떠한가를 모릅니다. 자가용을 몰은 적이 없는 사람은 ‘자가용 달리는 맛’을 모릅니다.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은 아이키우기를 모릅니다. 아이를 낳은 사람은 ‘아이를 안 낳고 지내는 삶’을 모릅니다. 사내로 사는 사람은 가시내를 모르고, 가시내로 사는 사람은 사내를 모릅니다. 서로 모릅니다. 그런데, 서로 모르는 줄 제대로 바라보지 않거나, 슬기롭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일쑤입니다.


  서로 모르면서 다른 삶인 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배울 수 있습니다. 서로 모르면서 다른 삶인 줄 제대로 안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배우지 못하면서 쳇바퀴를 돌고 맙니다.




- “난 ‘인형’의 사진은 찍지 않아! 마음이 없는 건 안 찍지. 홍천녀의 ‘탈’에는 관심 없어!” (73쪽)

- “키 작고 아무 장점도 없지만, 무대 위에선 여신도 될 수 있으니까요! 헬렌 켈러랑 해적이랑! 로봇도 됐었는데요 뭐!” “고럼 고럼, 늑대소녀도 했었지.” “아하하하. 전 연극이 좋아요! 무대 위에서 수많은 인생을 살아 보고 싶어요!” (169쪽)



  마야나 아유미는 학교에서 연기를 배우지 않습니다. 두 아이는 학교나 학원 같은 데에서 ‘연기를 하는 솜씨’라든지 ‘연기에서 바탕이 될 몸짓’을 배울 뿐입니다. 학교나 학원 같은 데에서는 ‘연기를 하는 마음’을 배울 수 없고, ‘삶을 짓는 마음’도 배울 수 없습니다.


  아유미한테 없는 모습이란 ‘스스로 삶을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마야한테 있는 모습이란 ‘스스로 삶을 사랑하면서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이리하여, 마야는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얼마든지 홍천녀를 연기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언제나 ‘그 마음’이 되면서, ‘내 몸을 다스리는 숨결’을 제대로 바라보아서 읽기 때문입니다. 4348.5.3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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