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여우 7
오치아이 사요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16



삶은 언제나 누구한테나 사랑스럽다

― 은여우 7

 오치아이 사요리 글·그림

 강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5.4.30.



  아이를 낳아서 함께 살지 않는 사람은 아이하고 나누는 사랑을 어느 만큼 헤아리거나 알 만할까 하고 문득 생각해 봅니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고 혼자만 살았다면, 내가 하루 내내 아이를 돌보고 밥을 차려서 먹이고 입히고 씻기며 이것저것 손수 가르치고 보여주는 삶을 지내 보지 않았으면, 나는 무엇을 알거나 깨닫거나 느꼈을까 하고 문득 헤아려 봅니다. 나 스스로 아이와 함께 살지 않은 나날이었으면, 나를 낳아 돌본 어머니 마음을 얼마나 읽을 만했을까 하고 문득 곱씹어 봅니다. 곁님하고 아이들하고 시골마을에 보금자리에 마련해서 살림을 찬찬히 꾸리지 않았으면,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아줌마 이웃’ 마음을 어느 만큼 읽거나 살필 만했을까 하고 문득 되새겨 봅니다.





- “하루도 갈래?” “하루는 안 가! 그 여자애들 또 오면 어떡해! 이번에는 꼭 쫓아낼 거야!” “산책이나 그런 거 재미없어. 바깥은 북적북적 시끄럽기만 하고.” “그러니까 잠깐씩이라도 나가서 자꾸 익숙해져야지. 신의 사자도 요즘의 바깥 모습을 알아두면 좋잖아. 그래. 슈퍼에 가자! 감귤 사 줄게!” (12쪽)

- “여름뿐이라 짧게 느껴지지만, 그건 매미에게는 정해진 인생이니까.” “응.” “매미는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았으니까 괜찮아. 인간에게도 정해진 수명이 있는걸.” (18쪽)



  오치아이 사요리 님이 빚은 만화책 《은여우》(대원씨아이,2015) 일곱째 권을 읽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조촐한 일본 절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가 일곱째 권에서도 차분하게 흐릅니다. 앞선 여섯 권과 일곱째 권을 나란히 놓고 살피면, 일곱째 권에서도 앞선 여섯 권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이야기는 한 가지도 흐르지 않습니다. 모두 ‘수수한’ 이야기입니다. 흔한 이야기요, 너른 이야기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보잘것없다고 할 만한 자잘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단하지 않고 수수한 이야기를 엮은 만화책이 재미있습니다. 놀랍거나 짜릿하지 않고 투박하면서 흔한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이 살갑습니다. 크거나 거룩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에서나 마주할 만한 조그마한 이야기를 다룬 만화책이 사랑스럽습니다.





-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든 뭐든 옛날과는 달라. 너도 신주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 지금까지와는 달라진 거야. 하지만 신사는 변하지 않을 거고, 나 역시도 그래. 앞으로도 사라질 때까지 내 인생을 살아갈 뿐이지. 너도 네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거야.” (37쪽)

- “하고 안 하고는 별개로 쳐도, 좀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63쪽)



  오월이 무르익는 봄날 저녁은 개구리 노랫소리가 어마어마합니다. 다만, 시골에서만 이렇습니다. 그리고, 시골이라 하더라도 면소재지나 읍내에서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기 어려워요. 시골에서도 면이나 읍하고 한참 떨어진 두멧자락이 되어야 개구리 노랫소리가 쩌렁쩌렁 울립니다.


  늦은 밤이 되어도 잠들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이끌고 논둑길을 걷습니다. 등불 하나 없는 깜깜한 밤에 손전등조차 없이 논둑길을 걷습니다. 오늘은 비가 오면서 구름이 가득한 날이라, 밤에 별도 없습니다. 별빛에도 기대지 못하고 그저 스스로 밤눈을 밝히면서 논둑길을 걷습니다. 신나게 울어대는 개구리는 논둑길을 세 사람이 걷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마 개구리 스스로 저희가 내는 우렁찬 노랫소리에 ‘사람 발자국 소리’쯤 쉽게 파묻히기 때문이리라 느낍니다.


  들녘 한복판에 이르러서 걸음을 멈춥니다. 두 아이와 함께 들녘 한복판에 서서 눈을 감습니다. 깜깜한 밤에 들녘 한복판에 서니 그야말로 개구리 노랫소리와 도랑물 소리가 크게 울립니다. 가슴이 벌렁벌렁 뛸 만큼 싱그러운 소리입니다.




- “하루의 기억을 나눠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필요 없어. 저 녀석에게는 앞으로의 기억이 있잖아.” (117쪽)

- “그나저나 요리도 잘하시고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아뇨, 아뇨. 그렇게 대단하지 못 해요. 사실 저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못했으니까요.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났거든요. 마침 집에 있을 수 있는 직업이기도 했고, 마코토에게 엄마 노릇도 해 주고 싶어서, 누나에게서 배우고 친구에게서 배우고, 정말 필사적이었죠.” (150쪽)



  내가 시골집에서 아이들과 누리는 놀이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두 아이는 ‘잡기놀이’ 한 가지만 해도 한두 시간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래하고 웃고 떠들면서 신납니다. 장난감 하나 없이 마당에서 평상을 사이에 두고 잡느니 잡히느니 하면서 사뿐사뿐 걷다가 달리기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열 번 스무 번 읽은 그림책이라 해도, 백 번 이백 번 다시 읽으면서 새롭습니다. 어느 그림책은 두 아이와 함께 살면서 천 번 이천 번을 읽기도 했습니다. 그리 이름난 그림책이 아니어도, 아이들 스스로 재미나다고 여기는 그림책이라 하면, 천 번 이천 번은 가볍게 되읽습니다. 되읽을 적마다 새롭고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흐릅니다.


  만화책 《은여우》 일곱째 권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이 만화책이 낱권책으로 어느새 일곱째 권이 나오고 머잖아 여덟째 권이 나올 텐데, 앞으로도 수수하면서 투박하고 자잘한 이야기가 가득하리라 느낍니다. 도드라지지 않지만 사랑스럽습니다. 눈에 뜨이지 않지만 아름답습니다. 너와 나는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고, 나와 너는 모두 사랑스러운 이웃입니다. 아무래도 《은여우》라는 만화책은 늘 이 대목을 가만히 짚는구나 싶어요.





- “요시즈미 씨는 선생님 부탁으로 히와코를 돌보게 됐고, 아이들이 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가 되고, 오늘도 우연히 마코토의 친구들이 집에 와서 저와 요시즈미 씨가 여기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네에.” “그렇게 생각하면 참 대단하죠.” “대, 대단한 건가요?” “그럼요! 큰일은 아니지만 대단한 거예요.” (153쪽)



  선물꾸러미가 커야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선물이기만 하면 다 좋습니다. 그리고, 선물이 없어도 반갑습니다. 아이들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나 큰아버지나 이모나 외삼촌이나 이모부하고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어도 웃음을 그치지 못합니다. 전화로 나누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습니다. 밥을 드셨느냐는 둥, 무엇을 하시느냐는 둥, 보고 싶다는 둥, 흔한 인사말이 오갈 뿐인데, 아이들은 전화기를 붙잡은 몸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릅니다.


  책을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아이들하고 날마다 부르는 놀이노래와 자장노래는 지난 여덟 해에 걸쳐서 하루에 한 차례씩 불렀다고 쳐도 삼천 번쯤 부른 셈입니다. 하루에 몇 차례씩 부른 노래라면 만 번을 부른 노래도 있는 셈입니다. 그러고 보니, 큰아이하고는 어느덧 삼천 날이 가깝도록 함께 살았고, 얼추 만 차례에 가깝게 밥상을 마주했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큰일’은 아닐 테지만 대단합니다. 아니, ‘대단한’ 일도 아니라 할 테지만 멋집니다. 아니, ‘멋진’ 일도 아니라 할 테지만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오래오래 두고두고 수수한 밥 한 그릇을 함께 나눌 테고, 수수한 노래를 함께 부를 테며, 수수한 놀이를 함께 즐기겠지요.


  삶은 언제나 누구한테나 사랑스럽습니다. 오늘 밤도 이 대목을 느끼면서 두 아이 이부자리를 여밉니다. 두 아이 사이에 가만히 누워서 두 아이 가슴을 살며시 토닥입니다. 4348.5.1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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