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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면 4
스즈에 미우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3월
평점 :
만화책 즐겨읽기 510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
― 유리가면 4
미우치 스즈에 글·그림
해외단행본팀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0.4.30.
아무리 맛난 밥을 먹더라도 몸이 꽁꽁 묶였다면, 밥맛이 없습니다. 으리으리한 호텔에 묵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 발짝조차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면, 으리으리한 호텔은 감옥입니다. 온갖 시설을 훌륭하게 갖춘 학교라 하더라도 입시지옥만 바라본다면, 온갖 시설은 모두 부질없습니다. 읽은 책이나 갖춘 책이 많아도 지식을 머릿속에만 담으면서 자꾸 다른 책을 장만하기만 한다면, 수많은 책과 지식은 모두 덧없습니다.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무나 밝은 저 웃음은. 나와 같은 역을 하게 되어 벌벌 떨며 불안해 할 줄 알았더니. 마치, 마치 나 같은 건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한 저 웃음. 이 아유미 따위는.’ (11쪽)
- “극단 온딘이 어떤 〈키 재보기〉를 하는지, 아유미가 어떤 미도리를 연기하는지, 나하고는 상관없어. 나는 내 미도리를 연기할 뿐.” (30쪽)
미우치 스즈에 님 만화책 《유리가면》(대원씨아이,2010) 넷째 권을 읽으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유리가면》에 나오는 츠기카게 님과 마야는 연극을 둘러싸고 고단한 가시밭길을 걷습니다. 두 사람을 비롯해서 다른 여러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과 못살게 구는 무리가 있습니다. 삶에서 연극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고 할 만한 두 사람한테서 연극을 빼앗으려고 하는 모질거나 못난 사람과 무리라고 할까요.
그런데, 츠기카게 님이나 마야는 둘레에서 아무리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더라도 다시 일어섭니다. 다시 일어서면서 웃고, 다시 기운을 차릴 뿐 아니라, 이제껏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모습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 “아유미와 경쟁한다니 역시 뛰어난 재능을 가진 굉장한 미인이겠지?” “그냥 평범한 여자애지요. 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 소녀라고 할까.” (49쪽)
- “이곳에서 당신과 겨루다니, 재미있게 됐군요.” “겨뤄? 일부러 같은 연극을 고르고, 무대 연습을 못하게 조작하고, 우리 순서를 온딘의 바로 뒤로 잡고, 뒷공작이 대단하시던데. 사실은 내가 두려운 거겠지. 오노데라 씨.” (74∼75쪽)
곰곰이 따지면, 츠기카게 님이나 마야가 아무 볼 일이 없을 만큼 하찮다고 여긴다면, 이 둘을 괴롭힐 사람도 못살게 굴 무리도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아주 대단하기 때문에 자꾸 괴롭히려 합니다. 괴롭혀서 쓰러뜨리려 하고, 못살게 굴어서 무너뜨리려 하지요.
그리고, 두 사람은 아주 대단한 숨결과 넋으로 연극길을 걷기 때문에, 둘레에서 이 둘을 아무리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든 끄떡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파서 울고, 때로는 슬퍼서 넘어지지만, 언제나 새롭게 기운을 차리는 두 사람입니다. 언제나 새삼스레 웃음꽃을 피울 줄 아는 두 사람이에요.
- “아유미의 완벽한 연기도 멋지지만, 하지만 이 아이의 미도리도 신선해 보이지 않아? 아유미가 이 장면에서 어렴풋한 성숙미를 느끼게 했던 것에 비하면, 이건 과연 소녀의 사랑이구나, 하는 느낌이군요.” (92쪽)
- “나 왠지, 아유미보다 이 마야라는 애의 미도리에 더 호감이 가는데.” “왜일까? 아유미 쪽이 훨씬 예쁘고 연기력도 있는데, 이쪽 미도리가 더 매력적으로 보여. 불가사의해, 이 아이.” (102쪽)
〈홍천녀〉라는 연극을 선보인 츠기카게 님한테 사람들이 끌린 까닭이나, 마야가 보여주는 연극에 사람들이 끌리는 까닭은, 밑바탕이 같습니다. 두 사람은 빈틈없는 무대보다 아름다운 무대를 보여줍니다. 츠기카게 님은 빈틈없는 모습까지 있으면서 아름다운 무대를 보여주었다면, 마야는 아직 아름다운 무대만 보여줄 수 있으나, 마야와 맞서는 아유미를 바라보면서 마야도 ‘빈틈없이 보여주는 무대’를 차근차근 꿈꾸면서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그리고, 아유미라는 아이도 마야를 맞잡이로 바라보고 살피면서, 아유미한테는 없으면서 마야한테 있는 숨결이나 넋이 무엇인가를 하나씩 깨달으려고 합니다. 아유미는 오늘 이곳에서 보여주는 무대만으로도 빈틈이 없지만, 빈틈없는 연기만으로는 사람들 가슴을 울리거나 건드릴 수 없는 줄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아무리 빈틈없이 연기를 하더라도, 빈틈없는 연기는 ‘빈틈없는’ ‘연기’일 뿐인 줄 천천히 알아차리려 합니다.
그렇다고 빈틈없는 연기가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빈틈없는 연기는 늘 빈틈없는 연기에서 맴돌 뿐입니다. 빈틈없는 연기는 나빠질 일이 없습니다만, 이와 마찬가지로 좋아질 일도 없습니다. 나빠지지도 않으나 좋아지지도 않기 때문에, 빈틈없는 연기를 지켜보는 사람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숨결이 없고 살내음이 없으며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숨결이 없는 빈틈없는 연기는 곧 질리기 마련입니다. 살내음이 없는 빈틈없는 연기는 머잖아 지치기 마련입니다. 사랑이 없는 빈틈없는 연기는 이내 시들기 마련입니다.
- “대단해, 저 애. 그냥 절을 하는 것만으로 관객의 주목을 한몸에 받다니. 멋지게 관객의 호흡을 붙잡았어.” “아유미도 참, 우연일 뿐이야.” “그렇겠지.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119쪽)
- “마야, 연극을 하고 있을 때의 너는 볼품없는 아이가 아니야. 연극을 할 때면 항상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어떤 때는 시골 아가씨, 어떤 때는 말괄량이 마을 처녀. 왕여노롣, 요정으로도, 우등생도 될 수 있고 우주인도 될 수 있어. 천 가지, 만 가지의 가면을 쓰고 천 가지, 만 가지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거야. 남들은 그저 한 사람으로서 단 하나의 인생을 살아갈 뿐이지만, 넌 달라.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멋진 일이냐! 연극을 해라, 마야! 그래야 넌 비로소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어. 그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비로소 너라는 인간의 가치가 나타나는 거야.” (158∼159쪽)
사랑은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장마가 들어도 곰팡이가 피지 않습니다. 사랑은 배고파도 힘들지 않습니다. 사랑은 가난해도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은 아무 배운 지식이 없어도 어리석지 않습니다. 사랑은 외딴 곳에 있어도 쓸쓸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먼 길을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습니다.
사랑은 바로 삶을 이루는 기둥이요 뼈대이며 살점이고 모든 빛과 고요입니다. 사랑은 바로 삶을 키우는 노래이고 춤이며 웃음이자 이야기입니다.
《유리가면》에 나오는 마야한테는 ‘사랑’이 있습니다. 남녀 사이에 오가는 짝짓기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고요하면서 그윽한 사랑입니다. 따스하면서 너른 사랑입니다. 고마우면서 반가운 사랑입니다. 꿈으로 나아가는 날갯지이 되는 사랑입니다. 4348.5.2.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