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사는 재미
이오덕 지음 / 산처럼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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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을 읽는다



착하고 참다우면서 곱게

― 거꾸로 사는 재미

 이오덕 글

 범우사 펴냄, 1983.5.25.



※ 책풀이 ※

1983년에 처음 나온 《거꾸로 사는 재미》는 2005년에 ‘산처럼’ 출판사에서 새롭게 나왔다. 거의 1970년대에 쓴 수필을 모은 책으로, 이 땅에서 교사가 되어 아이들과 지낸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준다. 삶을 사랑하고 숲을 어루만지려고 하는 꿈을 담은 이야기이다. 정치권력이 시키는 일하고는 늘 거꾸로 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길하고 함께 가려고 하는 숨결을 보여준다.



..



  ‘착하다’는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곱다’는 “눈이나 귀나 마음으로 받는 느낌이 좋다”를 가리킵니다. ‘상냥하다’는 “마음이 시원스러우면서 부드럽다”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착한’ 사람이라고 할 적에는, 이녁을 마주하는 느낌이 좋으면서, 함께 바른 삶길을 가는 한편, 시원스러우면서 부드러운 숨결이 흐르도록 이끄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착한 사람은 너그럽습니다. 잘잘못을 함부로 따지지 않습니다. 포근하면서 넉넉한 품으로 기쁘게 감쌉니다. 빙그레 웃고 즐겁게 노래합니다. 부드러운 말씨와 몸짓으로 아름다운 바람을 끌어들입니다.


  나쁜 짓을 안 한다고 해서 착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쁜 짓이란 무엇일까요? ‘착한 일’이 아니라면 ‘나쁜 짓’이 될 테니까, 포근하지 않고 넉넉하지 않으며 기쁘지 않을 때에 ‘나쁜 짓’이라 할 만합니다. 웃음이 없고 노래가 없을 때에도 ‘나쁜 짓’이 된다고 할 만합니다. 부드럽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바람하고 동떨어질 적에도 ‘나쁜 짓’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는 ‘나쁜 짓 안 하는 사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하지 말자고 하기보다는, ‘착하게 살면서 어깨동무하는 사람’일 때에 가없이 사랑스럽습니다. 착하게 꿈을 꾸면서, 착하게 노래를 할 때에 기쁩니다.



.. 유달리 포플러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울타리 안에서 사람들의 보호를 받거나 고고한 자리에 서 있는 나무가 아니라, 짓밟히고 버림받은 개울가에서 항상 우리들과 함께 있는 나무가 되어서 그런지 모른다 … 하늘은 잃지 말아야 하는 것,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 것. 하늘은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열 사람, 스무 사람의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가져야 하는 재산이다 … 아아, 붉은 벽돌집이 쳐다보이는 우리 속 얼어붙은 시멘트바닥에 갇혀 그 아무도 찾아 주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낮과 밤을 영원히 기다려야 했던 목숨 … 자연을 상품으로 사고판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이다 … 과연 인간이 저 냇가에 굴러 있는 돌 하나를 멋대로 뒤집어 놓을 권리가 있는 것일까 … 인간적이라 함은 자연을 지각하는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다 ..  (16, 35, 66, 87, 88, 89쪽)



  마음씨가 고운 사람은 언제나 착한 말씨와 몸짓이기 마련입니다. 착한 사람이 곱지 않은 일이란 없으며, 고운 사람이 착한 마음이 아닌 일이란 없습니다. 착함과 고움은 언제나 함께 흐릅니다. 착한 기운과 고운 숨결은 늘 같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참 착하네 하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고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참 곱네 하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어김없이 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다만, 얼굴만 이쁘장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은 안 착하거나 안 곱지만, 얼굴만 이쁜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저 얼굴만 보기 좋다고 할 만한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얼굴만 이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몹시 힘들리라 느껴요.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얼굴만 이쁜 채 산다면, 마음은 안 착하고 안 고운 삶이라면, 스스로 얼마나 괴로울까요. 밉거나 막된 짓만 일삼느라 마음씨가 거칠거나 메마르다면, 스스로 얼마나 고단할까요.


  밉거나 막된 짓을 하기에 둘레에서 힘들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바로 한 사람이 힘듭니다. 밉거나 막된 짓을 하는 사람 스스로 가장 힘듭니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 밉거나 막된 짓을 하는 슬픈 사람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괴롭히니까, 나도 다른 사람을 괴롭혀도 되지 않습니다. 누가 나한테 막말을 쏟아부으니까, 나도 다른 사람한테 막말을 퍼부어도 되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때렸으니, 나도 다른 사람을 때려도 되지 않아요.



.. 자연과학은 자연을 사랑하고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하고 있으며, 그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생명을 살생하는 방향으로만 달리고 있다 … 이들은 자연 속에서 살다 보니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기보다 그런 것을 느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의 피상적 문화에 정신이 팔리고 있는 것이다 … 긴 겨울 동안 험하고 추운 산길을 다니던 학교 아이들은 할미꽃을 보고 비로소 봄이 왔다고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것이 그것을 꺾고, 버리고, 짓밟고 하는 비뚤어진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 평화와 공해 없는 사회는 그런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건강한 인간의 사랑과 지혜와 선의에 넘치는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악한 정신으로 만들어진 물질문명과는 전혀 반대편에서 나타나야 할 새로운 정신문명만이 인류를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  (19, 27, 40, 80쪽)



  ‘참’과 맞서는 ‘거짓’입니다. 참을 밝히면 거짓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참답게 살지 않으면 거짓스레 사는 꼴이요, 참말을 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일삼는 셈입니다.


  참되게 사는 사람은 꾸미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참이기에 꾸밀 까닭이 없습니다. 못생겼으니 꾸며야 한다고요? 아니에요. 못생겼으면 그저 못생겼을 뿐이에요. 다리를 절면 그저 다리를 절 뿐이에요. 키가 작으면 그저 키가 작을 뿐이에요. 힘이 여리면 그저 힘이 여릴 뿐이에요. 노래를 잘 못 부르면 노래를 잘 못 부를 뿐이에요. 돈이 없으면 그저 돈이 없을 뿐이에요.


  없는데 있는 척하려고 하니까 꾸미고, 꾸미다 보니 거짓이 됩니다. 있는데 없는 척하자니까 꾸미고, 꾸미다 보니 거짓말이 늘어납니다.


  없다고 해서 나쁘지 않습니다. 있다고 해서 좋지 않습니다. 그저 스스럼없이 어깨를 펴고 활짝 웃으면서 기쁘게 노래하면 됩니다. 스스럼없이 이웃과 사귀고 거릴 것 없이 동무와 손을 잡으면서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는 삶을 지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있는 것을 안 쓰면 고여서 썩습니다. 없는 것을 억지로 잡아끄니까 다툼이 생깁니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니 스스로 괴롭습니다. 없는 그대로 홀가분할 마음이 못 되니 스스로 얽혀듭니다.


  참말은 참말을 낳고,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습니다. 참다운 삶은 언제나 참다운 삶으로 맑게 흐르고, 거짓스러운 삶은 언제나 거짓스러운 수렁에 허덕입니다.



.. 사람들이 고양이를 학대할 수는 있어도 고양이를 이겨낼 수는 없을 것이다. 고양이의 수난시대는 인간 문명의 막다른 시대일지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을 이토록 학대하는 사람들이 땅 위의 주인으로 언제까지나 복 받고 잘 살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 분명히 살아 움직이던 그 무수한 생명들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 아무의 기억 속에도 슬픔 속에도 흔적조차 남김이 없이. 하늘 향해 구원을 청하는 소리 한 번 내어 보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 목숨들. 생명이란 이토록 허무한 것인가? 올챙이와 인간과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 포플러는 포플러같이 키워야 하고 소나무는 소나무로 키워야 한다. 어린 생명을 천성 그대로 죽죽 뻗어나게 하라. 개성이 살아나게 하라 … 동물들은 아무것도 땅에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먹는 음식의 포장물을 어디에 어떻게 처리할 계획도 생각도 없이 함부로 만들어 내기만 한다 ..  (59, 77, 96, 190쪽)



  이오덕 님이 쓴 수필책 《거꾸로 사는 재미》(범우사,1983)를 새롭게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책은 2005년에 스물두 해만에 새옷을 입고 다시 나오기도 했습니다(‘산처럼’ 출판사에서 새롭게 펴내 주었습니다). ‘똑바로’나 ‘반듯이’ 사는 재미가 아닌 ‘거꾸로’ 사는 재미를 말한다고 하는 책입니다.


  ‘거꾸로’라고 한다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하고 맞선다고 할 만한 몸짓입니다. 거꾸로 가는 길이란 똑바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똑바로’는 무엇이고, ‘거꾸로’는 무엇이 될까 하고 돌아봅니다. 어떤 몸짓이 똑바로이고, 어떤 말짓이 거꾸로가 될까 하고 헤아립니다.


  이오덕 님이 “거꾸로 살기”를 하겠노라 다짐하던 때는 1980년대이고 1970년대이며 1960년대이자 1950년대입니다. 군사독재정권 총칼이 서슬 퍼렇던 무렵에 “거꾸로 살기”를 하겠노라 말씀합니다. 군사독재정권이 시키는 일을 “똑바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새마을운동을 앞세워 정치와 행정은 제비집을 허물라고 시키지만, 이오덕 님은 왜 제비집을 허무느냐고 묻습니다. 나라에서 ‘자연보호’를 외친다면, ‘자연보호’에 걸맞게 제비집을 지키고 보살펴야 할 노릇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 정직은 어른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서 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심성이다 … “교장 선생님, 제비집 있는 것 더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오히려 자연스런 풍경으로 아름답게 보시면 안 됩니까? 뜯는 것도 여간 수고가 아니지요. 자연보호한다고 나뭇가지에 애써 새집도 만들어 달아 주는 판인데, 제비가 불쌍하지 않아요?” …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교육의 최고 최상의 목표다 … 자유당은 교육자들을 사람 가르치는 스승이 되게 하지 않고, 세금 징수 사무원으로 전락시켜 놓았다. 그러고는 온갖 지시와 명령을 내리고, 장부를 만들게 하고, 보고를 하게 하고, 행정 방침들을 외게까지 했다 ..  (265, 275, 286, 315쪽)



  군사독재정권은 언제나 ‘경제발전’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경제발전은 온 나라 사람이 다 함께 넉넉하게 누릴 수 있는 ‘나아지는 살림살이’가 아니었습니다. 경제성장율이라고 하는 숫자만 높이려는 경제발전이었고,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스스로 삶을 짓던 사람들을 도시로 내쫓아서 ‘값싼 일꾼(공장 노동자)’이 되도록 내몰던 경제발전이었습니다. 사람을 바보로 만들면서 숫자놀음을 하던 경제발전을 외친 군사독재정권입니다. 어른과 아이 모두 바보스럽게 뒹굴도록 바보짓을 시키던 군사독재정권입니다. 어른들은 경제발전으로 치닫는 허수아비가 되도록 숫자놀음에 얽매이게 내몰고, 아이들은 입시지옥에 허덕이는 꼭둑각시가 되도록 숫자싸움에 얽어들도록 들볶은 군사독재정권이에요. 그러니, 이런 정치와 행정과 사회와 교육과 문화가 판치는 나라에서 “거꾸로 살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독재정권에서 “똑바로 살기”를 한다면, 정치 입맛과 독재 입맛에 맞추는 꼴이 됩니다.


  한국에서 정치와 사회를 주무르던 이들은 “바르게 살기”를 외치기도 합니다. 온 나라 곳곳에 커다란 돌을 세워서 “바르게 살기”라는 글씨를 새깁니다. 학교에서는 ‘바른생활’이랑 ‘도덕’을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막상 사람들이 ‘바른말’을 하지는 못합니다. ‘바른글’도 못 쓰고 ‘바른넋’이 되지 못합니다. 숫자놀음과 숫자싸움에 휘말리는 사람들은 입으로만 “바르게 살기”를 외칠 뿐, 참길이나 참말이나 참삶하고는 자꾸 동떨어집니다. 나라에서 “바르게 살기”를 시키면 시킬수록 사람들은 “거꾸로 살기”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 나는 그저 생겨난 대로 자연스럽게 정직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 서민적이고 토착적인 말이 중간층을 대표하는 말에 쫓겨나고, 그것은 다시 도시의 상업자본층을 중심으로 한 말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에게 좌석을 양보해 주는 것은 아름다운 덕이요 예의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자리를 빼앗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평등한 인간의 권리를 무시한 시대착오의 우둔한 돌머리들인 것이다 … 교육자란 그 어느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말에 대한 자각을 철저히 가지지 않으면, 그 영향이 곧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만큼 깊이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 콘크리트 안에 갇혀 시험점수만 따기 위해 서로 악착같이 다투어야 하는 이 아이들은 손가락에도 발가락에도 상처 하나 없이 고이 자라나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깊고 커다란 상처가 나 있을 것이다 ..  (111, 124, 133, 144, 161쪽)



  이오덕 님은 《거꾸로 사는 재미》라는 책을 내놓으며 머리말에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사실은 노을의 얘기며 감나무나 새들의 얘기였는지 모르지만, 내 양심은 그런 것보다도 눈앞에 전개되는 삶의 아픈 얘기들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자연을 말하더라도 괴로운 자연의 진실을 얘기하도록 했다.” 하고 밝힙니다. 그러고 보니, 《거꾸로 사는 재미》를 내놓은 지 스무 해쯤 지난 2002년에 《나무처럼 산처럼》이라는 책을 내놓으셨고, 이무렵에 이르러야 비로소 노을과 감나무와 새하고 얽힌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노을 이야기를 얼마나 하고 싶으셨을까요. 감나무와 새 이야기를 얼마나 쓰고 싶으셨을까요. 아이들과 기쁘게 웃음꽃을 피우는 삶을 얼마나 노래하고 싶으셨을까요.


  그렇다고 1950∼90년대에 노을과 감나무와 새 이야기를 안 쓰시지는 않습니다. 쓰시기는 쓰시되 ‘아픈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슬픈 이웃’ 이야기를 쓰고, ‘괴로운 아이’ 이야기를 씁니다. 아이들이 웃음을 잃어야 하는 까닭을 쓰고, 아이들한테서 노래를 빼앗은 바보스러운 어른들 이야기를 씁니다.


  곰곰이 되새깁니다. 아픈 나무는 예나 이제나 똑같이 있습니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농약바람과 비료바람과 비닐바람과 기계바람과 시멘트바람이 불었습니다. 요즈음 시골을 보면, 어디에나 농약과 비닐을 아주 많이 씁니다. 낡은 비닐은 바람에 날려 나뭇가지에 볼썽사납게 매달립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비닐을 아무 곳에서나 태우는데, 농약병과 막걸리병도 함께 태웁니다. 플라스틱이 타는 연기가 마을을 덮습니다. 어느 집에서나 비닐과 플라스틱 쓰레기를 똑같이 태웁니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 적에는 마을길을 넓힌다면서 큰나무를 베어 넘겼고, 요즈음은 큰나무 때문에 그늘이 지면 곡식이 덜 여문다면서 큰나무를 베어 없앱니다. ‘숲정이’는 옛말이요, 도랑에서 가재나 미꾸라지를 잡을 수 없습니다. 개똥벌레를 볼 수도 없습니다.


  슬픈 이웃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도시에서 철거민이 생겼다면, 요즈음은 시골에서 송전탑과 핵발전소와 핵쓰레기처리장과 군부대 때문에 사람들이 쫓겨납니다. 괴로운 아이는 외려 오늘날에 더 많다고 할 만합니다. 입시지옥은 나날이 더 커지고, 입시지옥을 가로질렀어도 일자리 얻기가 빠듯합니다. 노래를 빼앗긴 아이들은 신나게 어울려 놀지 못한 채 술과 담배와 게임과 스포츠 구경을 빼고는 딱히 할 수 있는 놀이가 없고, 배운 놀이가 없으며, 물려받은 놀이조차 없습니다.



..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서 받은 은혜가 너무 넓고 크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절실하게 느낄 수 없는 것을 입으로만 말해서 머릿속에 지식으로 외우게 하는 것은 오히려 반발을 살 염려조차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다만 서로 도우면서 즐겁게 놀고 공부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효도고 나라사랑은 자연히 되는 것이다 … 아이들은 본디 옷차림에 관심이 없다. 아이들에게 사치와 허영을 강요하고 물들게 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스런 옷으로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흙바닥에서 뒹굴고 햇볕에 살갗을 그을리게 하는 것이 좋다 … 외국에 가져갈 선물로 밤을 따고, 그 외국에서 호미를 사들고 가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야말로, 그 나라의 그러한 면이야말로 참된 선진국의 모습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  (151, 153, 172, 183쪽)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비가 멎고 바람이 잠듭니다. 철마다 새로운 꽃이 핍니다. 철 따라 바람결이 바뀌고, 언제나 새로운 날씨가 찾아옵니다. 아이들은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놀이를 물려받지 못합니다. 요새는 ‘전통놀이 되살리기’ 같은 일을 꾀하기도 하지만, ‘죽은 놀이’를 문화재로만 바라볼 뿐, 여느 마을에서 여느 사람들이 ‘우리 겨레가 오래도록 물려주고 물려받은 놀이’를 기쁘게 즐기지 못합니다.


  둘레를 돌아보면, 도시나 시골 어디에도 너른 마당이 없습니다. 이른바 ‘광장’이 사라졌습니다. 도시나 시골 모두 너른 마당은 상업시설과 주차장한테 빼앗겼습니다. 도시에서는 상업시설과 주차장과 아파트가 너른 마당에 들어섰다면, 시골에서는 공장과 발전소와 골프장과 관광단지가 너른 마당에 들어섭니다.


  줄다리기 같은 놀이를 할 만한 너른 터가 없습니다. 고싸움을 할 만한 너른 터가 없습니다. 연날리기를 하거나 쥐불놀이를 할 만한 너른 들이 없습니다. 멧토끼를 잡거나 꿩을 잡으러 오르내릴 숲이나 골짜기가 없습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구슬치기나 돌치기나 고무줄놀이를 할 만한 손바닥만 한 빈터조차 사라집니다. 어디에나 자동차가 섭니다. 아이들은 자동차에 치이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배우지 못한 채 ‘교통안전 수칙’을 외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동무들과 신나게 뛰놀지 못하면서 ‘교통안전 생활화’를 해야 합니다.



.. 남의 과수원을 멀리서 구경하면 아름답지만 그것을 피땀으로 가꾸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토록 괴로운 것이다.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한갓 환상이 아니고 무엇일까 … 사물의 현상을 겉으로만 보는 눈은 대상에 파고들지 못하며, 그것은 보는 사람의 자기 중심으로 된 안이한 기분일 뿐이다. 그러나 사물을 내면에서 보는 눈은 그 사물의 생명을 붙잡는다 … 자기 자신을 열등시하는 교장들이 무슨 교육을 하겠는가? 모멸은 남들로부터 받기 전에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다. 맨 끝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등감을 갖지 않고 자랑스럽게 자기 일을 해야만 교육이 된다 … 교육자에게는 지식도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을 전달하는 기술도 갖춰야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참된 인간으로 키워 보고 싶어하는 열성이다 ..  (179, 180, 231, 236쪽)



  이오덕 님은 학교에서 거꾸로 살기를 합니다. 이오덕 님은 어린이문학과 문학비평에서 거꾸로 살기를 합니다. 이오덕 님은 글쓰기와 한국말을 바라볼 적에 다시금 거꾸로 살기를 합니다.


  윗자리라고 하는 데에서 시키는 행정과 서류를 받아들이면 아이들이 괴롭습니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문단권력에 녹아들면 돈과 이름을 날릴 만하지만, 문학을 누릴 아이와 어른 모두 아름다움하고 동떨어집니다. 이냥저냥 지식을 자랑하거나 뽐내는 글을 쓰면 책을 잘 팔는지 모르나, 삶다운 삶을 찾으면서 말다운 말을 찾으려고 하니 온통 가시밭길입니다.


  권력과 돈과 이름값하고는 등을 지는 거꾸로 살기입니다. 아이들과 웃음과 놀이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삶입니다. 독재정권과 새마을운동과 행정서류하고는 등을 돌리는 거꾸로 살기입니다. 흙과 나무와 시골하고 손을 맞잡으려는 삶입니다.


  지구별 어느 나라를 바라보아도, 어느 곳에서나 어버이는 아이한테 ‘말’을 물려줍니다. ‘글씨’부터 가르치려는 나라는 없습니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덴마크이든 핀란드이든, 베트남이든 스리랑카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칠레이든 브라질이든, 모두 ‘제 나라와 제 겨레가 먼먼 옛날부터 입으로 가르치고 입으로 배운 말’을 어버이가 기쁘게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그렇지만, 한국을 돌아보면, 한국에서는 ‘말’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말다운 말을 쓰는지 안 쓰는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떠도는 말(유행말)을 아무렇지 않게 쓸 뿐이며, 딱딱하고 굳은 지식말과 한자말과 영어를 함부로 쓸 뿐입니다.


  학교에서도 아이가 말을 배우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이니 ‘한국말’을 슬기롭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레 배워야 할 텐데, 초등학교에서 하려는 몸짓은 고작 ‘영어 더 빨리 가르치기’와 ‘한자 더 많이 가르치기’일 뿐입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생각하면서 슬기롭게 쓰도록 가르치기’를 이끄는 교과서가 없고, 이러한 길을 걸으려는 교사도 매우 드뭅니다.



.. 문학은 민중들이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농민들이 소설은 읽지도 않는다. 도시의 서민들도 안 읽는다 … 인간 사회의 참모습을 파악해야 한다. 역사와 사회를 외면할 때 결코 인간답게 살 수 없다. 철학이 없이 동시고 동화를 쓸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학생들이 농촌에 가서 농민들과 함게 땀흘려 일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그런 체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 우리가 아이들에게 바랄 것은 인간스런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개성과 창조적 재질을 발휘하는 일입니다 … 유교라는 것이 아이들 기를 죽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온갖 형식의 예법을 강요하면서 기를 죽여 놓는다 ..  (207, 208, 220, 245, 254쪽)



  이오덕 님은 “거꾸로 사는 재미”라고 이야기합니다. 거꾸로 사는데 무슨 재미일까요? 거꾸로 살면서 어떤 재미일까요? 독재정권을 거슬러서 거꾸로 사니, 독재하고는 등돌릴 테지요. 총칼을 앞세우거나 주먹으로 윽박지르는 몸짓하고는 등돌립니다. 이리하여, 자유와 평화와 아름다움이 자랍니다. 새마을운동 따위와 거슬러서 거꾸로 사니, 새마을운동은 손사래칠 테고, 경제개발이나 숫자다툼은 처음부터 따지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꿈과 평등과 사랑이 자랍니다.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그대로 내몬다면, 아이와 어버이가 모두 괴롭습니다. 입시지옥에 갇힌 아이들이 가장 괴로울 텐데,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모는 어른도 호젓하거나 홀가분하거나 기쁠 수 없습니다. 입시지옥을 그대로 두면서 학원강사나 과외교사가 되어 돈을 벌면 무슨 재미나 보람이 있겠습니까.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몰지 않고, 아이 손을 맞잡고 들노래를 부르고 들놀이를 함께 누리면, 아이와 어버이가 모두 즐겁습니다. 입시가 아닌 삶을 생각하고, 지옥이 아닌 사랑을 찾으려 할 때에, 아이와 어버이가 모두 기뻐요.


  다른 아이들이 모두 대학교에 간대서 우리 아이들이 꼭 대학교에 갈 까닭이 없습니다. 아예 초등학교부터 안 가도 됩니다. 굳이 학교나 학원에 보내어 영어를 가르쳐야 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시골집에서 영화와 책으로 천천히 영어를 함께 배워도 됩니다.


  다른 어른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노동자가 된대서, 나까지 도시로 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시골지기로 지내면 됩니다. 시골에서 시골일을 하고 시골노래를 부르면서 시골밥을 먹으면 됩니다. 시골바람을 마시고, 시골꿈을 꾸면서, 시골사랑을 아이들한테 물려주면 됩니다.


  삶을 찾아서 이 길을 걷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거꾸로 간다고 보일 수 있지만, 나는 내 길을 씩씩하게 걷습니다. 사랑을 헤아리며 이 길을 걷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거꾸로 달리는 듯이 보일는지 모르나, 나는 내 길을 튼튼하게 걷습니다. 이오덕 님이 《거꾸로 사는 재미》에서 들려주는 삶노래는 언제나 사랑노래요 꿈노래입니다. 4348.5.1.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이오덕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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