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삶 55 위아래



  삶에는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사람한테는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별에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지구에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어디에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알아보기 쉽’거나 ‘이야기를 나누기 좋’도록 위와 아래를 나누기도 하고, 왼쪽과 오른쪽을 가르기도 하며, 새·하늬·마·높(동·서·남·북)으로 살피기도 합니다.


  내가 바라보면 이곳은 왼쪽일 테지만, 나와 마주보는 사람한테 이곳은 오른쪽입니다. 내가 선 곳이 위라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보면 아래입니다. 내가 동쪽으로 간다고 하지만 저쪽에서는 서쪽입니다. 그러니, 모든 곳은 어느 곳도 아닌 셈입니다.


  말에도 위아래가 없습니다. 이 말을 쓰니까 높임말이 되지 않고, 저 말을 쓰기에 낮춤말이 되지 않아요. 위아래라고 하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좋고 나쁨’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높임말이라고 할 적에도 ‘틀에 맞추는 겉말’을 쓸 때에는 높이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느 말이나 수수한 말이나 투박한 말을 쓰더라도 ‘마음으로 서로 높이려는 넋’일 때에 비로소 높임말입니다. 겉보기로는 높임말 시늉이나 흉내라 하더라도 ‘마음으로 서로 깎아내리거나 낮추려는 넋’이라면 낮춤말이에요.


  높임말도 위아래도 없다면, 사람 사이에서도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더 높은 사람이 따로 없고, 더 낮은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 사이에 경계나 신분이나 계급을 둔다면, ‘더 높다는 자리’에 서는 사람이야말로 더 낮다는 자리로 스스로 가면서 제 삶을 갉아먹는 셈입니다. 이웃사람을 ‘더 낮다는 자리’에 내리깔려고 한다면, 더 낮다는 자리에 내리깔리는 사람이야말로 더 높다는 자리로 저절로 올라서는 셈입니다.


  위와 아래가 없지만,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흐릅니다. 삶이란 흐름입니다. 다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흐름이 아닙니다. 삶을 이루는 일곱 조각을 돌고 도는 흐름이 아닙니다. 첫째 조각에서 둘째 조각으로 갔다가, 셋째와 넷째와 다섯째와 여섯째를 지나 일곱째 조각으로 간 뒤, 다시 첫째 조각으로 돌고 도는 흐름이 아니라, 그저 흐르고 새롭게 흐르는 삶입니다.


  흐름은 늘 한꺼번에 이루어집니다. 따로따로 나누어 일곱 갈래인 듯이 말하기는 하지만, 첫째에서 일곱째에 이르는 흐름은 한결입니다. 한결로 한꺼번에 흐릅니다. 첫째에서 둘째로 간다 싶으면 어느새 셋째에 있고, 셋째에서 넷째로 간다 싶으면 곧바로 다섯째입니다. 그래서 첫째에서 일곱째로 곧장 가고, 일곱째로 곧장 가면 어느새 첫째입니다. 마치 제자리걷기를 하는 듯하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제자리걷기가 아닌 흐름이요, 흐름이면서 삶입니다. 어제와 오늘과 모레가 늘 한꺼번에 이루어지듯이, ‘삶흐름’도 늘 한꺼번에 함께 나란히 나타납니다.


  위아래가 없는 흐름인 줄 읽을 수 있다면,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 나이가 더 적은 사람하고 삶을 어떻게 가꿀 때에 아름다운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위아래가 아닌 흐름이 삶인 줄 바라볼 수 있다면, 나이가 더 어린 사람이 나이가 더 든 사람하고 사랑을 어떻게 나눌 때에 즐거운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한테 어떤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제 꿈을 바라보면서 제 길을 걷기에 제 사랑이 샘솟아 기쁘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우리는 다 함께 노래하는 길로 흘러서 갑니다. 우리는 겉모습이 아닌 참모습을 바라보려 합니다. 우리는 겉치레가 아닌 속가꿈으로 삶을 지으려 합니다. 달력에 따라 찾아오는 하루가 아니라, 어제를 마무리하고 오늘을 새롭게 여는 하루입니다. 오늘을 새롭게 열면서 모레로 나아가고자 하루를 즐겁게 닫습니다. 열면서 곧바로 닫고, 닫으면서 곧바로 엽니다. 위이기에 곧바로 아래이고, 아래이기에 막바로 위입니다. 물결입니다. 물결치는 흐름입니다. 물결치는 흐름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물결은 위와 아래가 없이 위아래로 흐르는 결이듯이, 사랑은 바로 내 가슴에서 스스로 길어올립니다. 삶은 언제나 바로 오늘 이곳에 있습니다. 4348.3.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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