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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50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1998년 10월
평점 :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22
어버이가 함께 놀기를 기다리는 아이
― 고릴라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장은수 옮김
비룡소 펴냄, 1998.10.29.
어느 어버이가 되든 모두 같을 텐데, 회사에 나가야 하는 어버이는 아이와 어울릴 겨를이 없습니다. 아침 일찍 회사에 가려고 짐을 꾸려야 하고, 저녁에는 늦게까지 일을 마무리지어야 하는데, 곧잘 일이 밀리기도 하고, 회사에서는 밥자리나 술자리가 저녁 늦도록 이어지기도 합니다. 밥자리나 술자리가 따로 없고 밤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기운이 처지기 마련이에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힘을 쏟아야 하니까요.
돈을 버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어른들이 회사에서 돈을 버는 일만 하다 보니 아이하고 눈을 마주칠 틈을 내기 어렵습니다. 따로 가게를 내어 장사를 하는 분은 아이하고 말을 섞을 틈조차 내기 어렵기 일쑤입니다. 그나마 회사원이라면 퇴근하는 때가 있지만, 한국에서 가게를 꾸리거나 저잣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분들은 저녁 아홉 시나 열 시까지 가게 불빛을 밝혀요. 밤새도록 열어야 하는 가게도 있습니다.
.. 한나는 고릴라를 무척 좋아했어. 고릴라 책도 읽고, 고릴라 비디어도 보고, 고릴라 그림도 그렸지, 하지만 진짜 고릴라를 본 적은 없었어. 아빠는 한나랑 동물원에 가서 고릴라를 볼 시간이 없어. 너무 바빠서 시간이 나질 않거든 .. (2쪽)
모든 아이는 제 어버이하고 놀고 싶습니다. 아이들한테는 또래동무도 있어야 할 테지만, 누구보다 어버이가 있어야 합니다. 어버이는 없이 또래동무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이한테 또래동무가 어버이보다 더 대수롭다면, 아이는 모두 따로 살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어버이와 한집에서 살면서 밥상맡에 둘러앉거나 잠자리에 나란히 눕는다면, 아이와 어버이가 서로 아끼고 보살피면서 사랑으로 삶을 짓는 뜻이 있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이 또래동무와 신나게 놀 수 있는 까닭을 헤아려 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래동무와 신나게 놀더라도 저마다 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저희(아이)를 기다리는 어버이 품으로 돌아갑니다. 노느라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옷을 벗고 말끔히 씻은 뒤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밥도 맛나게 먹지요. 이러고 나서 살가운 자장노래를 들으면서 새근새근 자요.
그러니까, 어버이로 지내는 모든 어른들은 이 대목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또래동무가 있어야 함께 놀 텐데, 아이들은 언제나 ‘우리 집’에서 느긋하면서 넉넉하게 사랑을 받을 때에 비로소 또래동무하고 신나게 놉니다. 아이들이 또래동무와 즐겁게 뛰놀 수 있도록 어버이는 집살림을 잘 가꾸면서 오직 사랑으로 ‘우리 보금자리’를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 그 다음 날에도 아빠는 너무 바빴어. 아빠는 “지금은 안 돼. 토요일 날 어때?” 하곤 했지. 하지만 주말이 되자 아빠는 너무 지쳤어. 아빠와 한나는 아무것도 함께할 수 없었어 .. (6쪽)
앤서니 브라운 님이 빚은 그림책 《고릴라》(비룡소,1998)를 읽습니다. 수많은 짐승 가운데 ‘고릴라’에 마음이 사로잡힌 아이는 고릴라 그림책도 보고 노래도 부르고 영화도 봅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와 지내는 아버지는 바깥일에 지나치게 바쁩니다. 여느 때에도 바깥일에 마음을 쓰고, 집에 돌아와서도 바깥일만 바라보며, 주말이 되어도 바깥일에서 놓여나지 못합니다.
아이는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아이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다시 기다리고 끝까지 기다립니다.
아이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이가 기다리는’ 줄 알까요? 아이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다리는’ 줄 알아챌까요? 저(아이)를 낳았으면 부디 저(아이)를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고, 손을 맞잡고 나들이를 다니며, 활짝 웃음짓는 밝은 몸짓으로 노래와 춤을 함께 누리기를 바라는 줄 언제쯤 알 만할까요?
.. 한나와 고릴라는 오랑우탄 우리에도 가고, 침팬지 우리에도 갔어. 너무 멋졌지. 하지만 슬퍼 보이기도 했어 .. (18쪽)
그림책 《고릴라》가 아니더라도, 나부터 우리 아이들과 처음부터 잘 놀지 못했습니다. 나도 아이들 어버이로서 아이들과 신나게 노는 몸짓이 못 되기 일쑤였습니다. 아이들이 “함께 춤춰요!” 하고 까르르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도 ‘춤을 어떻게 추지?’ 하고 스스로 멋쩍어 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재우면서 자장노래를 부르고, 아이들과 자전거마실을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과 노는 동안 노래를 부르다 보니, 이렇게 예닐곱 해를 날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지내다 보니, 내 노랫소리를 내가 스스로 제법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엄청나게 빼어난 노래꾼’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저와 신나게 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대단한 부자’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저를 기쁘게 바라보면서 따스히 안고 넉넉히 품어 주기를 바랍니다.
.. 고릴라가 말했어. “한나야, 이제 돌아가야지? 내일 또 보자.” .. (26쪽)
사랑하는 마음이 될 때에 웃습니다. 사랑하는 숨결이 될 때에 노래합니다. 사랑하는 삶이 될 때에 아이와 손을 잡고 하루를 짓습니다. 아이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옆구리를 살살 간지럼을 태워도 기쁩니다. 아이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저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기만 해도 웃음보가 터집니다. 아이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엉덩이를 실룩실룩 가볍게 몸을 흔들어도 까르르 노래하고 웃으면서 함께 춤을 춥니다.
그림책 《고릴라》는 우리 어버이한테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아이하고 눈을 마주치자고 이야기합니다. 그저 아이와 손을 잡자고 이야기합니다. 그저 아이와 날마다 다문 한 시간이라도 말을 섞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자고 합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아이를 바라봐요. 우리를 사랑하는 아이를 따사롭게 껴안아요. 우리와 노래하면서 즐겁게 새 하루를 열고 싶은 아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나들이를 해요. 4348.4.21.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