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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래가 되었다
조태일 지음, 신경림 엮음 / 창비 / 2004년 9월
평점 :
시를 노래하는 시 97
시를 읽는 사람은 노래를 사랑해
― 나는 노래가 되었다
조태일 글
신경림 엮음
창비 펴냄, 2004.9.25.
봄에 꽃이 필 무렵 어김없이 벌이 찾아듭니다. 아직 이르다 싶은 삼월에도 벌이 찾아듭니다. 사월이면 벌이 무척 많이 늘어납니다. 사월에 피어나는 꽃은 삼월보다 훨씬 많아요. 마당에 선 동백나무에 동백꽃이 한창이던 때에는 벌도 수백 마리가 윙윙거렸습니다. 동백꽃이 거의 다 진 이즈음에는 동백나무 둘레에 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채꽃과 갓꽃이 곳곳에 흐드러지다 보니 갓꽃밭과 유채꽃밭은 벌떼로 아주 시끄럽다 싶을 만합니다.
벌떼는 매화가 매화꽃을 터뜨릴 적에도 몰리고, 모과나무가 모과꽃을 터뜨릴 적에도 몰립니다. 군데군데 피어나는 민들레꽃에도 벌이 내려앉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냉이꽃과 별꽃에도 벌이 내려앉습니다. 벌과 나비는 꽃을 가리지 않습니다. 모든 꽃에 살며시 내려앉아서 꿀이나 꽃가루를 받아먹습니다. 이러면서 꽃가루받이를 해 주어요.
.. 내 어릴 적 / 산속에서 길을 잃고 / 엄마야! 엄마야! 엄마야! / 울부짖던 그 소리 .. (메아리)
어젯밤에 아이들과 마을 논둑에 서서 별바라기를 하며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개구리는 보름쯤 앞서 깨어나서 노래를 들려줍니다. 풀밭 여기저기에도 풀벌레가 깨어나서 드문드문 노래를 들려줍니다. 아직 왁자지껄한 노래는 아닙니다. 개구리 노랫소리도 드문드문 들릴 뿐입니다.
모두 노래를 부릅니다. 낮에는 낮노래를 부르고, 밤에는 밤노래를 부릅니다. 노는 아이들은 놀이노래를 부르고, 일을 하는 어른들은 일노래를 부릅니다. 마실을 다닐 적에는 마실노래를 부르지요. 나는 밥을 지으면서 밥노래를 부르는데, 아이들은 밥을 먹으면서 밥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과 내가 부르는 밥노래는 사뭇 다릅니다.
..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 / 그곳이 나의 고향, / 그곳에 묻히리 .. (풀씨)
조태일 님은 1999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시집 《나는 노래가 되었다》(창비,2004)는 조태일 님이 저승길로 떠나고 난 뒤에 신경림 님이 새로 엮어서 내놓은 책입니다. 조태일 님이 그동안 내놓은 시집 여러 권에서 추리고 가리고 골라서 엮은 시집입니다.
시집을 읽을 때마다 한 가지를 떠올립니다. 우리는 ‘시’라고 하는 글을 책으로 읽는데, 시가 깃든 책인 시집은 ‘노래책’과 같구나 싶어요. 시는 삶을 노래한 글이고, 삶을 노래한 글을 묶은 책이니, 시집은 언제나 노래책이 되리라 느낍니다.
.. 꽃들, 줄기에 꼼짝 못하게 매달렸어도 / 바람들을 잘도 가지고 논다. // 아빠꽃 엄마꽃 형꽃 누나꽃 따라 / 아기꽃 동생꽃 쌍둥이꽃 / 바람들을 잘도 가지고 논다 .. (꽃들, 바람을 가지고 논다)
노래는 소리에 담은 가락입니다. 그저 흐르는 소리는 그저 소리이지만, 소리에 가락이 담기면 노래로 거듭납니다. 그저 흐르는 자동차 소리라든지 버스 소리라든지 기차 소리는 그냥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고즈넉하게 들을 수도 있으나, 시끄럽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자동차가 끊이지 않는 고속도로 옆에 서면 온갖 자동차가 내는 소리가 시끄러워 귀청이 찢어질 듯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소리도 내 마음에 따라서 노래로 들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마다 다 다르게 달리면서 내는 소릿결을 느껴서 가락을 헤아리면 노랫가락이 됩니다.
개구리와 풀벌레와 꾀꼬리가 들려주는 소릿가락을 들으면서 시끄럽다고 느낄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개구리와 풀벌레와 꾀꼬리가 들려주는 소릿가락을 노래로 들을 사람이 있어요. 어느 때에는 반가운 소리이기에 노래요, 어느 때에는 달갑잖은 소리이기에 시끄럽습니다.
.. 자유가 시인더러 / 시인이 자유더러 / 멱살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하지만 / 전혀 알아들을 수 없네. / 우리 같은 촌놈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네 .. (자유가 시인더러)
네가 나한테 들려주는 말이 내 마음에 스며들어 사르르 녹는다면, 네 말은 나한테 노래와 같습니다. 내가 너한테 들려주는 말이 네 마음에 스며들지 못하고 사르르 녹지도 못한다면, 그저 담벼락에 부딪혀서 떨어지는 돌멩이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아요. 따스한 사랑을 품고 스며드는 말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로 듣는 말은 노래가 됩니다. 이와 달리, 아무런 사랑을 담지 않은 말은 이야기도 노래도 되지 못합니다. 다투는 말이 되면서 시끄럽구나 하고 느끼는 소리로 머뭅니다.
자유가 시인더러 무슨 말을 했을까요. 시인은 자유더러 무슨 소리를 했을까요. 둘은 서로 노래를 불렀을까요. 둘은 서로 노래하는 마음이었을까요.
.. 파란 하늘 아래 / 잠자리 날고 // 잠자리 날개 아래 / 파란 연못 잠들었다 .. (대낮)
시를 읽는 사람은 노래를 사랑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시를 사랑합니다. 시를 읽으면서 노래가 저절로 흐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시가 저절로 솟아납니다.
아이들은 모두 시인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읊는 말에는 언제나 가락이 실려서 노랫말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노랫말처럼 된다기보다 그예 노래가 됩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어른한테서 배우는 노래가 아니라, 놀면서 스스로 기쁘고 신나서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어른들 누구나 시인입니다. 왜냐하면, ‘어른’이라는 사람은 ‘아이’로 태어나서 신나게 놀고 기쁘게 노래하면서 하루하루 살다가 어느새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작가라는 이름이 있기에 시인이 아닙니다. 삶을 노래하기에 시인입니다. 시집을 내거나 잡지에 작품을 싣기에 시인이 아닙니다. 삶을 사랑하면서 빙그레 웃고 노래하는 가슴으로 하루를 열기에 시인입니다.
.. 타고난 시골솜씨 한철 만나셨다 / 산1일번지에 오셔서 / 이불 빨고 양말 빨고 콧수건 빨고 / 김치, 동치미, 고추장, 청국장 담그신다. / 양념보다 맛있는 사투리로 담그신다 .. (어머님 곁에서)
조태일 님이 그동안 부른 노래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시선집 《나는 노래가 되었다》로 새롭게 태어난 조태일 님 노래를 가만히 생각합니다. 이제 조태일 님은 이승이 아닌 저승에 있습니다. 조태일 님은 더는 삶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태일 님이 부른 삶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삶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삶노래를 부르고, 우리 아이들이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삶노래를 부릅니다. 앞으로는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새롭게 아이를 낳아 저희 아이들한테 새롭게 삶노래를 물려주겠지요.
노래가 흐르고 흐릅니다. 생각과 꿈이 흐르고 흐릅니다. 사랑과 삶이 흐르고 거듭 흐릅니다. 언제나 새로우면서 아름답게 춤추는 노래가 흐릅니다. 삶을 사랑하기에 시를 쓰고, 삶을 꿈꾸기에 시를 읽습니다. 삶을 아름다이 가꾸면서 시를 쓰고, 삶을 사랑스레 보듬으면서 시를 읽습니다. 4348.4.17.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