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창비시선 180
노향림 지음 / 창비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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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4



시와 제비집

―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노향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8.10.24.



  아이도 어른처럼 발냄새가 납니다. 어쩌면 아이한테서는 어른한테서보다 발냄새가 더 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일하거나 쉬기도 하지만, 아이는 한자리에 가만히 앉거나 쉬는 일이 없거든요. 학교와 학원만 맴돌아야 하는 아이라면 오늘날 수많은 어른처럼 발에 땀이 날 틈이 없을 테지만, 개구지게 뛰놀 줄 알 뿐 아니라 언제나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은 발냄새가 퐁퐁 납니다.



..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던 / 김 스테파노가 운명했다 ..  (창)



  저녁이 되어 아이들 옷을 갈아입힙니다. 아이들이 많이 어릴 적에는 옷을 모두 어버이가 벗기고 입혀야 하지만, 아이들이 차츰 자라면서, 이제 옷을 벗거나 입는 일은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많이 컸어도 손씻기와 발씻기를 혼자 하도록 맡기지 못합니다. 큰아이는 혼자 할 수 있을 테지만, 작은아이는 어버이가 해 주어야 합니다.


  작은아이만 손발을 씻길 수 있지만, 큰아이가 서운해 할 수 있어요. 아니, 큰아이는 딱히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하고 싶어 하기에, 큰아이는 혼자 하도록 할 수 있는데, 그래도 두 아이를 함께 자리에 앉히고 손발을 뻗도록 해서, 대야에 발을 담그라고 말합니다. 이런 뒤 나는 두 아이 앞에 쪼그려앉아서 발을 비누로 문지르고 발가락 사이까지 구석구석 씻습니다.


  아이들은 발가락이 간지럽다면서 하하 낄낄 웃습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이 아이들만 할 적에 내 어머니가 내 발을 씻기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와 형 발을 씻길 적에 나와 형이 짓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기운을 차리셨으리라 느낍니다.



.. 야윌수록 / 맑은 쟁쟁한 악기 소리들을 / 내는 가을풀들은 혼자서 하루 종일 / 흔들린다 ..  (풀잎 일기 1)



  옷을 갈아입고 이를 닦으며 손발과 낯을 씻은 아이들은 개운합니다. 물도 마시고 쉬도 누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앞서 마저 놉니다. 이제 마지막 힘까지 쏟아부어서 놀고 나면 비로소 까무룩 잠들 테지요. 길면서 짧고, 짧으면서 긴 하루가 저뭅니다. 새끼 제비 같은 아이들과 지내는 하루는 밤에 닫고 아침에 엽니다. 어미 제비처럼 보내는 하루는 새벽 일찍 열고 밤 늦게 닫습니다. 올해에도 봄이 새로 열렸으니, 곧 우리 집 처마 밑에 어른 제비가 찾아올 테고, 어른 제비는 알을 까서 씩씩하게 새끼 제비를 돌보겠지요.



.. 해묵은 갈대들이 / 물속을 무시로 드나들며 / 무릎을 꺾고 / 또 꺾었다 ..  (물의 나라 1)



  노향림 님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창작과비평사,1998)을 읽습니다. 노향림 님은 바다와 섬을 그리는 노래를 꾸준히 쓰셨구나 싶습니다. 노향림 님이 쓴 시 가운데 ‘압해도’ 이야기는 압해섬 한쪽에 싯돌로 섰다고도 합니다.



.. 텅 빈 주차장 앞길로 / 강바람이 불어온다. / 바람과 나는 늘 아는 이 길로만 다닌다. // 바람이 몇번씩 몸부림칠 때마다 / 수양버드나무 메마른 가지 사이로 불빛 몇송이 / 흐린 눈을 숨기고 있다가 납작 엎드린다 ..  (밤길)



  신안군에 있는 압해섬과 여러 섬을 찾아가던 때를 가만히 그립니다. 나는 신안군 여러 섬을 다닐 적에 다른 무엇보다 ‘제비집’을 보았습니다. 아니, 어디를 가든 제비집이 잘 보였고, 제비 날갯짓을 쉽게 마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제비집이나 제비 날갯짓을 보았을까요? 괜히 나만 제비 날갯짓이랑 제비집을 눈여겨보았을까요?


  노향림 님은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을 노래로 부르는데, 오늘날 적잖은 섬이나 마을에 제비가 찾아가지 않습니다. 제비뿐 아니라 다른 새도 찾아가지 않습니다. 꾀꼬리가 찾아가지 않는 섬과 마을이 퍽 늘었습니다. 종달새를 만날 수 있는 섬과 마을도 많이 줄었습니다. 뜸부기는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청둥오리가 내려앉아서 다리쉼을 하는 섬이나 마을은 몇 군데가 될까요?



.. 경비행기들이 일직선으로 사라진 하늘가에 / 스사스사 아으아으 쇳소리를 내며 / 숨차게 주저앉는 가을 / 그들은 모두 어디로 쉬엄쉬엄 흩어져갔을까 / 담그늘 밑에 까부라져 뒹구는 수레국화 몇점 ..  (가을 서정)



  새마을운동이 휘몰아치던 때부터 제비집을 마구 허물었습니다. 지난날에는 사람들이 제비집을 함부로 허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옛날 사람들은 제비집뿐 아니라 참새집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새가 짓는 둥지와 보금자리를 섣불리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어요. 아이들이 더러 새알을 훔쳐서 먹더라도 새집을 다치게 하지는 않아요. 이러면서 사람들은 ‘둥지’와 ‘보금자리’라는 낱말을 ‘사람이 살뜰히 지내는 집’을 가리키는 이름으로도 썼습니다.


  새마을운동 깃발은 아직도 골골샅샅 나부낍니다. 새마을운동 깃발이 나부끼는 곳에는 농약과 비료와 비닐이 춤을 춥니다. 앞으로 이 나라에 어떤 새가 찾아들 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앞으로 제비는 바다를 가로질러 한국으로 애써 찾아올는지, 아니면 더는 안 찾아올는지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4348.3.2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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