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문학과지성 시인선 178
김신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4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3



시와 이곳에서

―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김신영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96.4.25.



  나는 늘 이곳에서 바람을 마십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도 마시고, 한들한들 부는 바람도 마십니다. 따사롭게 부는 바람도 마시며, 포근하게 부는 바람도 마셔요. 때로는 차갑게 부는 바람을 마시고, 어느 날에는 스산하게 부는 바람을 마십니다.


  어떠한 바람이든 기꺼이 마십니다. 어떤 바람이 불든 씩씩하게 마십니다. 어떻게 부는 바람이라 하더라도 고맙게 마십니다.


  왜냐하면, 나는 바람을 마셔야 살 수 있는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나한테 밥이나 소금이나 물이 없어도 살 수 있으나, 나한테 바람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나는 밥을 달포쯤 끊거나 소금이나 물을 열흘이건 보름이건 입에도 못 댈 수 있습니다만, 바람 한 줄기는 1초라도 끊을 수 없습니다.



.. 여기 황폐한 문지방이며 무너진 흙담을 / 일으키어 내 출렁이는 바닷과 별들과 / 유성이 되어도 좋은 밤을 맞고 싶다 ..  (가벼운 섬 1)



  꽃이 핀 나무 곁에 서서 꽃바람을 마십니다. 꽃바람을 마시면서 생각합니다. 꽃바람이란 이처럼 향긋하고 놀랍구나. 꽃바람을 마시면서 나뭇줄기를 쓰다듬습니다. 네가 나한테 이렇게 놀라우면서 멋진 바람을 베풀어 주니, 너는 나한테 아름다운 님이로구나.


  꽃바람을 나누어 준 나무한테 입을 맞춥니다. 아직 꽃몽우리가 터지지 않은 나무 옆에도 서서 나뭇줄기를 살살 어루만지다가 입을 맞춥니다. 어떤 나무이든 모두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거든요.



.. 매일 내분이 이는 종로 오가 / 기독교연합회관 십층에서 나는 책을 만든다고 / 죽을 쑤는데 옆건물 기독농민회에서 머리에 붉은 두건 / 두른 전대협 예수들 연좌농성, 퇴근 시간 다되도록 일렁이고 ..  (개방 압력)



  김신영 님이 선보인 시집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문학과지성사,1996)을 읽습니다. 김신영 님이 선보인 시집에는 김신영 님이 누린 삶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김신영 님이 지은 웃음과 눈물이 드러나고, 김신영 님이 바라본 이웃과 동무가 드러납니다.


  웃음과 눈물은 좋은 웃음이나 나쁜 눈물이 아닙니다. 그저 웃음과 눈물입니다. 이웃과 동무는 좋은 이웃이나 나쁜 동무가 아닙니다. 모두 그대로 이웃과 동무입니다.


  좋은 시가 있을까요? 나쁜 시가 있을까요? 독재부역을 하지 않았으나 맹숭맹숭한 시라면, 이러한 시는 좋은 시일까요? 맛깔스럽게 빚었으나 독재부역을 한 시라면, 이러한 시는 나쁜 시일까요?



.. 소풍 가는 학생들 쏟아져내리고 / 지하철 환승역 나갈 출구가 없다 // 역은 최상의 포화 상태, 긴 줄을 세우는 거대한 / 공포의 특급 놀이시설이 된다 아무도 나갈 수 없다 / 역무원은 목이 쉰 호루라기를 쉭쉭 불어대고 ..  (환승역에서)



  이곳에서 시가 태어납니다.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서 시가 태어납니다. 흔히들, 사진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찍는다고 말하는데, 사진만 바로 오늘 이곳에서 찍지 않습니다. 시도 바로 오늘 이곳에서 태어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글쓴이 스스로 겪고 느끼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아파하고 한숨쉬고 노래하고 춤추고 짝짓기를 한 모든 이야기가 시라는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 아산만까지 따라온 詩集은 / 산보다 바다보다 넓어 보였다 ..  (復原)



  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사진을 읽을 줄 압니다. 사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시를 읽을 줄 압니다. 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만화를 읽을 줄 압니다. 만화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시를 읽을 줄 압니다. 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동화를 읽을 줄 압니다. 동화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시를 읽을 줄 압니다.


  그러니까, 시는 읽되 사진이나 만화나 동화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시읽기’를 겉훑기로만 한다는 뜻입니다. 사진이나 만화나 동화를 읽을 줄 아는 넋이나 마음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시를 읽으면서 아름답게 사랑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 새는 구름을 부르며 하늘에 오르고, / 나는 노래를 부르며 꿈에 오른다 ..  (마른 종자 활동 장치)



  문학평론을 쓰는 이들은 사진을 찍을까요? 문학비평을 하는 이들은 만화책을 읽을까요? 문학평론을 쓰는 이들은 아이를 낳아 말을 가르칠까요? 문학비평을 하는 이들은 갓난쟁이한테 젖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갈거나 하면서 아이와 함께 삶을 지을까요?


  우리는 평론이나 비평을 하기 앞서 삶을 먼저 지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를 쓰거나 읽기 앞서 삶을 먼저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이 없이는 아무런 평론이나 비평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삶을 모른다면 어떠한 시도 쓸 수 없습니다. 삶이 없다면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삶을 모른다면 헛소리일 뿐입니다.



.. 고속도로에 들어선다 / 길은 많지만 / 나는 고속도로를 탄다 / 통행료를 지불하고서 /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권한 누린다 / 신호등에 걸릴 염려 없는 곳 /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되는 곳 ..  (고속도로)



  좋은 삶은 없습니다. 좋은 시는 없습니다. 그저 삶이 있고, 그예 시가 있습니다. 나쁜 삶은 없습니다. 나쁜 시는 없습니다. 그대로 삶이요, 고스란히 시입니다.


  이곳에서 시가 태어나고, 이곳에서 시를 읽습니다. 이곳에서 시를 노래하고, 이곳에서 시를 사랑합니다. 4348.3.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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