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가 되려고 훈련할 수 없다



  람타가 곧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스터이다.”라고. 그러니, 우리는 마스터가 되려고 훈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스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스터가 아니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마스터가 무엇인지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며, ‘마스터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스터가 무엇인지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에, 그리고 마스터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늘 마스터’입니다.


  람타가 곧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라고.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모두 잊혀진 하느님(신)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언제 어디에서나 모든 것을 지을(창조)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사람’이면서 ‘하느님’인 줄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알’면 이 모두를 늘 언제 어디에서나 제대로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람인 줄 잊거나 잃’으며, 우리 스스로 ‘잊혀진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아예 안 하기까지 합니다. 그냥 ‘감정 차원에 허덕이거나 맴돌기를 즐깁’니다.


  이런 틀로 저 사람을 바라본다든지, 이런 잣대로 저 사람을 재려고 한다면, 이를테면 이런 보기도 들 수 있는데, ‘네가 창조한 것을 나한테 보여주어서 증명하면 네 말을 믿겠다’ 같은 말조차, 우리가 스스로 사람이며 하느님인 줄 잊거나 잃은 채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사람이면서 하느님이면, ‘남이 나한테 보여주어서 증명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껴서 알고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으로 느끼려 하지 않으면서 ‘내 몸뚱아리인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갖다 줘 봐’ 하고 아무리 말한들, ‘두 눈 앞에 갖다 주어’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뇌는 이런 것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가 이런 것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떴으면, ‘네가 아무리 보여주려고 온갖 증거를 들이밀면서 증명하려고 해도, 네가 보여주지 않았을 때에 나는 다 알았어’ 하고 말합니다. 또는 ‘네가 아무리 온갖 증거를 보여주면서 증명하려고 하지만, 이는 다 거짓이고 속임수인데’ 하고 말할 테지요.


  나는 ‘람타 공부’를 하면서 처음부터 참 아리송했습니다. 람타가 말하듯이, 또 람타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마스터”인데, 왜 람타 공부와 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훈련에서 마스터가 되려 할까요? 마스터인 우리들이 왜 마스터가 되려 하지요? (이 수수께끼는 2015년 1월 강화에서 열흘 동안 배우면서 나 스스로 궁금한 대목을 내가 나한테 물었기에 스스로 실마리를 다 풀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인데 왜 사람이 되려 하지요? 우리가 사람인 줄 모르니까 사람이 되려 하는구나 싶지만, 우리가 사람인 줄 모르더라도 우리는 늘 사람입니다. 아니면, 사람이라는 옷을 입은 인형일까요?


  제대로 바라보면 다 됩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제대로 바라보려면 ‘제대도 된 말을 써’야 합니다. 제대로 된 말을 새롭게 쓰려 하지 않고, 고정관념과 선입관으로 가득 찬, 게다가 정치권력이 우리를 바보(노예, 종)로 만들려고 망가뜨린 ‘얼토당토않은 얄딱구리한 한국말(그러니까 온갖 영어와 중국·일본 한자말로 범벅이 된 한국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면서, 이러한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헤아리지 않고, 이러한 뜻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냥저냥 쓰면서 ‘무슨 새로운 지식’이나 ‘어떤 새로운 삶’이 될까요?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쓰기 어렵다면 왜 어려운지 생각해야 합니다. 람타 공부와 훈련이 처음부터 쉬운 사람이 있다면 한번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람타 공부와 훈련을 여러 해에 걸쳐서 했는데, 언제나 쉽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두 손을 번쩍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말을 쓰기 힘들면 영어를 쓰셔요. 그렇지 않다면 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제대로 새롭게 배워서 쓰셔요. 한국말로 람타 공부와 훈련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영어나 독일말이나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쓸 노릇이고, 한국말을 앞으로도 쓸 생각이라면 ‘람타한테서 배우듯이’ 이제껏 정치권력이 우리한테 망가뜨린 채 쑤셔넣은 멍청한 한국말은 모두 활활 태우고 ‘새로운 한국말’을 배우셔요.


  람타 강의를 듣다 보면, 람타는 문득문득, “이 공부는 새로운 언어 수업이다” 하고 외칩니다. 거듭 이 말을 외칩니다. 그런데, 람타를 배우는 사람 가운데 ‘새로운 말’을 쓰려고 ‘새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뜻밖에 좀 드문 듯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왜 새로운 배움을 새로운 말로 배우려 하지 않고, 정치권력이 우리를 종으로 부리려고 억지로 뒤튼 말에 갇힌 채 람타를 배우려 하고, 또 ‘내 모습’을 바라보려 할까요?


  람타 훈련은 ‘언어 수업’이 아닌 몸으로 하는 삶입니다. 그러니, 훈련에서는 훈련을 잘 해도 얼마든지 깨어날 만하리라 느낍니다. 나는 람타 훈련 가운데 ‘숨보기(숨터뜨리기, 씨 앤 이)’ 훈련을 ‘마스터’했을 적에 엄청나게 크면서 크지 않고 엄청나게 뜨거우면서 뜨겁지 않으며 엄청나게 밝으면서 밝지 않은 ‘샛노란(금빛) 구슬’을 내 두 손에 모을 수 있었고, 이 금구슬이 두 손에 모이니 ‘두 손 모습’은 ‘꽃잎을 벌린 모습’이 아니라 ‘오른손이 위로 가고 왼손이 밑을 받치는 모습’으로 저절로 바뀌었습니다. 내 두 손이 이 모습으로 안 바뀌게 하려고 두 손에 내 몸을 써서 힘을 주려고 했지만 내 몸은 이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2015년 1월 강화에서도 그랬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러한데, 씨 앤 이를 할 적에 어느 때가 되면 내 손 모습이 ‘위(오른손)와 아래(왼손)를 살며시 덮는 모습’으로 바뀌는데, 이러한 손 모습으로 바뀌면서 금구슬이 나타나면, 내 몸이 방바닥에서 뜨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몇 센티미터나 몇 미터를 떠오르지는 않습니다만, 씨 앤 이를 가르치는 람타가 문득 “떠올라!” 하고 외치는 말 그대로 몸이 떠오릅니다. 이런 경험을 늘 하면서, 이런 것이 ‘훈련 마스터’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다만, 나는 훈련 마스터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람타 공부를 하는 분들이 자꾸 ‘마스터’를 말하기에, 왜 마스터인 우리들이 또 마스터가 되어야 하는가 궁금해 하면서 이런 일을 겪었을 뿐입니다. 마크 선생님이 말씀하듯이, ‘카드찾기 달인’이 될 생각이 하나도 없고 ‘금구슬 손에 쥐고 붕 떠오르기 달인’이 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스터 되기’가 우리가 갈 길이 아닌 줄 깨달아서, ‘마스터에도 일곱 단계’가 더 있는 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스터 일곱 단계’를 끝내면, ‘첫 일곱 단계’로 돌아오는 흐름도 깨달았습니다. 모든 흐름은 ‘알(씨앗) → 애벌레(고치) → 나비’로 이어지는 삶입니다. 우리는 양자역학(양자물리학)과 함께 람타를 배우는데, 온누리(우주)는 ‘두 결(양자)’로 이루어지되, ‘두 결’은 늘 ‘세 고리’가 되어서 움직입니다. 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으면 ‘공부 마스터’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마스터’이기 때문에, 훈련이나 공부에서 굳이 마스터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이러한 얼거리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삶을 제대로 바라보면 됩니다. 이를 제대로 바라보면, 비로소 나는 모든 공부와 훈련을 홀가분하게(자유롭게, 그러나 ‘자유롭게’는 ‘아무렇게나’나 ‘함부로 바꾸어서’가 아닌, ‘홀로 가벼운 몸과 마음이 되어 기쁘게’를 뜻합니다) 하면서, 내 삶을 손수 짓는 길을 걸을 수 있어요.


  나는 내가 그리는 모든 그림을 이룹니다. 어느 그림은 그림을 그리기 무섭게 1분 만에 이루고, 어느 그림은 한두 해 지난 뒤에 이룹니다. 언제 이루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 마음힘(집중력, 포커스)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내 몸뚱이가 깃든, 이 1차 단계 차원(세상)에서 내가 겪고(경험) 느끼면서 받아들일 새로운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은 곧바로 이루고 어느 것은 천천히 이룰 뿐입니다.


  창조란, 벼락에 콩 볶아먹듯이 할 수 있습니다만, 사람이라는 목숨이 지구별에서 1차 단계에 몸뚱이를 둔 까닭은, 벼락에 콩 볶아먹는 재미는 그리 기쁘지 않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가끔은 벼락에 콩 볶아먹는 재미를 누릴 만하지요. 그러나, 우리 삶이 기쁨이면서 아름다운 사랑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다 함께 이 길을 걷는 이웃이라고 느껴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나아가면서 웃고 노래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혼자서 저 멀리 앞으로 나아가려는 지구별 삶이 아니라,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차근차근 한 걸음씩 걸어서 함께 나아가려는 지구별 삶입니다.


  그래서, 나는 람타 공부와 훈련을 하면서 그때그때 새롭게 바라보아서 새롭게 깨달은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그러나, 내가 쓰는 이 ‘새로운 글’은 ‘마스터 되기를 보여주는 글’이나 ‘사람이 되는 삶을 보여주는 글’이 아닙니다. 함께 공부하고 훈련하는 이웃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삶을 바라보면서 찾고 짓는 얼거리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이러한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제대로 바라보면서 읽고 우리 스스로 삭일 수 있다’면, 저마다 기쁘게 공부와 훈련을 하면서, 저마다 제 결에 맞게 삶짓기(현실창조)를 할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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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생각을 나누면서 ‘말을 새롭게 스스로 지어’서 공부와 훈련이 날마다 기운차고 아름답게 거듭나기를 바라면서 여러 가지 ‘훈련 성과(창조한 결과)’를 글로 쓰지만, 이 글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느껴 주는 이웃이 있기도 하지만, 이러한 이웃 이야기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이웃이 있기도 하구나 싶습니다.


  어떠하든 대수로울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짓기는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하는 기쁜 놀이요 일이면서 웃음과 노래이니까요.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고 싶은 사람은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합니다. 삶을 날마다 짓고 싶은 사람은 삶을 날마다 짓습니다.


  고맙습니다.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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