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소리 3
라가와 마리모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467



내가 부르는 소리

― 순백의 소리 3

 라가와 마리모 글·그림

 이상은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3.6.25.



  설날을 앞두고 시골에서는 마을마다 ‘큰 청소’가 한창입니다. 그동안 시골을 떠나 살던 사람들이 시골에 계신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절을 하러 오기 때문입니다. 도시사람은 시골에 모처럼 찾아와도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줄 못 느낄 테고, 풀이 얼마나 자랐는지, 또 고샅이 어떠한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니, 이런 모습을 아예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동차로만 움직일 뿐이니까요. 무엇보다 도시에는 풀도 꽃도 나무도 둘레에 없습니다. 자동차가 오가기에 알맞도록 아스팔트 찻길이 있을 뿐입니다. 나무를 심는다 하더라도 시늉일 뿐이고, 그나마 시늉으로 심은 나무조차 제대로 바라보거나 쓰다듬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그래도 시골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설을 앞두고 풀을 뽑습니다. 아니, 설 앞이니 풀을 뽑지는 않고 밭두렁과 논두렁을 태웁니다. 온통 불잔치입니다. 이곳에서도 불을 피우고 저곳에서도 불을 피웁니다. 불을 피우는 김에 이런저런 쓰레기도 함께 태웁니다. 나중에 설이 지나고 보면, 설을 맞이해서 도시에서 가지고 온 선물꾸러미에 있던 플라스틱과 종이도 함께 태워요.


  마을에서는 곳곳에 불을 지르느라 부산하고, 면소재지에서는 마을방송으로 ‘논둑과 밭둑을 함부로 태우지 말라’고 알리느라 부산합니다. 면소재지 공무원은 마을을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그저 면사무소 책상맡에서 녹음테이프로 방송을 할 뿐입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집은 온통 새하얀 연기에 둘러싸입니다. 마당에 서도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고, 창문을 꼭꼭 닫아도 연기 냄새가 스며듭니다.




- “간판? 연주자를 그런 기준으로 보십니꺼?” “보지. 나는 일반론으로 하는 말이야.” (27쪽)

- “사와무라 마츠고로, 네 할아버지 맞지? 그 연주는 신기였어. 그런데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아는 것은 일부 연주자와 그 지방 사람들뿐. 평생 가난에 찌들었지?” “할배는, 그래도 행복했어예!” “난 말이야! 그 재능을! 그 보배를! 후세를 위해 남기지 않은 게 안타까워 죽겠다고! 마츠고로는, 보물을 혼자 끌어안고 죽어 버렸어!” (28∼29쪽)



  낮이 지나면서 비가 옵니다. 겨울비입니다. 겨울비는 마을마다 지핀 불을 잠재웁니다. 곳곳으로 퍼지던 연기는 비를 맞으면서 사그라듭니다. 이제 조금 숨을 쉴 만합니다. 겨울을 떠나 보내려는 비가 오면서 시골자락은 한결 샛노란 빛이 되고, 겨우내 시든 누런 풀잎은 곧 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흙이 될 테지요.


  뒤꼍에 서서 비를 맞으며 겨울눈을 바라봅니다. 우리 집 복숭아나무와 매화나무에 돋는 겨울눈을 쓰다듬습니다. 앞으로 한 달 뒤면 움이 틀까요. 아니면 보름 뒤에 움이 틀까요. 포근하게 부는 바람과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은 들과 숲과 마을에서 자라는 나무가 새롭게 깨어나도록 북돋웁니다. 나는 아이들과 이 고운 바람과 기쁜 햇볕을 맞이하면서 웃고 노래합니다.




- “다른 사람이 쓰는 게 더, 내가 쓰면 샤미센이 불쌍할 것 같아서.” “불쌍해? 샤미센의 마음을 니가 아나?” (38쪽)

- “샤미센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잖아?” “응?” “사와무라가 가르쳐 주면 좋겠는데, 라고 다른 애들도 생각할 거야.” “그치만도 나는 누가 갈키 주나?” “뭐? 사와무라도 누군가한테서 배우고 싶었어?” (39∼40쪽)



  라가와 마리모 님이 빚은 만화책 《순백의 소리》(학산문화사,2013) 셋째 권을 읽습니다. 샤미센을 켜는 아이들이 나오는 《순백의 소리》인데, 셋째 권에서는 ‘샤미센을 켠 적이 없는 동무’한테 샤미센을 가르쳐야 하는 아이가 나오고,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소리를 어떻게 삭혀야 할는지 헤매는 아이가 나옵니다.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하고 똑같이 낼 수 있는 소리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한테서 소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새롭게 들려줄 수 있는 소리란 무엇일까요.


  아마 할아버지도 처음에 혼자서 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할아버지도 처음에 ‘어린이’였을 적에는 이녁 할아버지나 둘레 다른 사람한테서 소리를 물려받았으리라 생각해요. 온갖 소리를 받아들이면서 마음으로 담고, 온갖 소리를 하나하나 녹여서 ‘내 소리’로 누리는 동안, ‘새로운 내 소리’ 하나가 태어났으리라 생각해요.




- “한 가지 걱정이 있는데, 니는 처음부터 잘 치는 사람만 봐 오지 않았나. 우선은 초보자를 상대로, 썽내지 말그라.” (59쪽)

- “내 주위엔 그 정도는 당연히 켜는 사람밖에 없었다. 소리도 제대로 못 내는 사람이 대회까지 얼마나 늘지 내 우예 아노? 대회 때, 나는 느그들 수준에 맞춰 줄 생각 없다.” (61∼62쪽)



  내가 부르는 소리는 내가 사는 소리입니다. 내가 부를 소리는 내가 살아갈 소리입니다. 내가 부른 소리는 내가 살아온 소리입니다. 나는 언제나 내 삶에 따라 내 소리를 빚습니다. 내 소리는 오롯이 내 삶이면서 내 꿈이요 내 길입니다. 내 소리는 옹글게 내 사랑이면서 내 빛이며 내 손짓입니다.


  더 나은 소리가 없고 덜떨어지는 소리가 없습니다. 대회에 나가서 1등이 되어야 훌륭한 소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다운 소리를 찾을 때에 나 스스로 즐겁습니다. 나다운 소리를 찾으려고 저마다 새롭게 배워서 새롭게 거듭나려고 애써요.




- ‘이때 나는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나 있었다. 자기 자신의 무엇에 짜증이 나느냐고 그걸 알면 이렇게 짜증나지도 않지!’ (96∼97쪽)

-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소리가 되고 싶다!’ (105쪽)

- “다들 나한테는 관심 없다. 내 뒤에 버티고 있는 할배의 ‘소리’를 듣고 싶은 것뿐이지.” (128쪽)



  빗소리를 듣습니다. 이제 겨울빗소리는 끝납니다. 이월이 무르익다가 삼월로 접어들면, 이때부터는 봄빗소리입니다. 겨울비와 봄비는 다르고, 가을비와 여름비는 달라요. 겨울볕과 봄볕은 다르며, 겨울노래와 봄노래는 다르지요.


  똑같은 날이 없으니 똑같은 소리도 없습니다. 똑같은 하루가 없으니 똑같은 노래도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으니 똑같은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는 늘 모두 다른 꿈을 가슴에 품고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다른 삶을 짓습니다. 만화책 《순백의 소리》에 나오는 아이들이 웃고 노래합니다.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이 겨울빗소리를 가만히 귀여겨들으면서 내 하루를 웃고 노래합니다. 4348.2.15.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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