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새 창비시선 118
김경희 지음 / 창비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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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8



시와 바람결

― 작은 새

 김경희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4.3.30.



  따스한 바람으로 바뀌는 겨울 끝자락에는 모두 따스하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직 바람이 쌀쌀하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포근하네 하고 생각이 바뀝니다. 이제는 차갑거나 시린 바람은 더 없으리라 느끼거든요.


  차가운 바람으로 바뀌는 가을 끝자락에는 모두 차갑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직 바람이 따뜻하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차갑네 하고 생각이 바뀝니다. 이제 한동안 차갑거나 시린 바람이 오겠구나 하고 느끼거든요.



.. 매양 탐나는 것은 / 만 톤의 물과 비누라서 // 빨래 솜씨 유명한 / 저 처녀 ..  (백합표)



  겨울에는 빨래를 하면 손이 얼어붙습니다. 여름에는 빨래를 하면 손이 시원합니다. 겨울에는 자전거를 타면 낯이 얼어붙습니다. 여름에는 자전거를 타면 땀이 주르르 흐르는 볼이 시원합니다. 추운 날이기에 겨울이고 더운 날이기에 여름입니다. 겨울에 불기에 겨울바람이고, 여름에 불기에 여름바람입니다. 겨울에는 여름이 그리울 만하고, 여름에는 겨울이 그리울 만합니다. 이리하여,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알맞게 흐릅니다. 따스한 바람 다음으로 더운 바람이 오지요. 더운 바람 다음으로 스산한 바람이 오지요. 스산한 바람 다음으로 차가운 바람이 오지요. 차가운 바람 다음으로 다시 따스한 바람이 오면서, 하루하루 새롭게 삶이 흐릅니다.


  바람을 느낄 줄 안다면, 철을 압니다. 철을 안다면 삶을 압니다. 삶을 안다면 사랑을 압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알고 싶은 사람은 바람을 먼저 알아볼 노릇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삶을 짓고 싶은 사람은 바람을 먼저 헤아릴 노릇입니다. 싱그럽게 마실 바람을 살피고, 서로 기쁘게 마실 바람을 돌아볼 노릇이에요.



.. 손에 들고 / 등에 지고 / 머리에 이었다 / 목에마저 걸 수만 있다면 걸고, // 밀어주는 손도 없는 맞바람 / 맞으며 안으며 품으며 / 길을 가는 사람 ..  (짐)



  오늘 나는 자전거를 몰면서 두 아이와 나들이를 갑니다. 이월 끝자락은 아직 썰렁하지만, 이월 끝자락이니 맨손으로 자전거를 탈 만합니다. 삼월이 코앞인 들녘을 바라보면 ‘겨우내 누렇게 시든 풀잎’ 빛깔이 새롭습니다. 아주 샛노랗습니다. 풀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릴 무렵에도 샛노란 풀빛인데, 봄이 코앞인 이월 끝자락에도 풀빛은 샛노랗습니다.


  가을에는 열매와 함께 샛노란 풀빛이라면, 겨울 끝자락과 봄 첫머리에는 ‘흙으로 돌아가려’고 샛노란 풀빛입니다.


  나는 이월 끝자락에 아이들과 자전거로 들녘을 가로지르면서 이 샛노란 풀빛을 듬뿍 마십니다. 바람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드는 샛노란 기운을 맞아들입니다. 내 몸과 마음도 샛노란 풀빛처럼 흙으로 돌아가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내 넋과 숨결도 샛노란 풀빛처럼 환하게 타오르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 벼랑 끝에서만 나는 꽃이었다가 / 그 벼랑 끝에서 언제나 한 걸음 더 내딛는 ..  (詩法)



  김경희 님 시집 《작은 새》(창작과비평사,1994)를 읽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작은 새’를 노래하고 싶은 시집 《작은 새》입니다. 큰 새도 어중간한 새도 아닌 작은 새입니다.


  작은 새는 누구일까요. 작은 새는 작은 새일 테지요. 매와 수리가 보기에 참새는 작은 새일 테지만, 나비와 잠자리가 보기에 참새는 큰 새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딱새는 작은 새일 테지만, 애벌레와 풀벌레가 보기에 딱새는 무척 큰 새입니다.



.. 어머니는 소금이 ‘달다’고 한다 / 물이 ‘달다’고 한다 / 올해도 아들딸들에게 나누어 줄 / 고추장 된장 간장이 소금에 물이 / 잘 맞아 달다고 웃으신다 ..  (어머니의 철학)



  겨울이 끝날 무렵에는 바람결이 바뀝니다. 뭍바람에서 바닷바람으로 바뀝니다. 겨우내 뭍바람을 맞으면서 땀을 뻘뻘 흘렸으니, 이제부터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땀을 덜 흘릴 만합니다. 그러나, 등바람을 좀 업고서 자전거를 달린다 하더라도, 가는 길과 오는 길은 같기에, 한 번 등바람이면 한 번 맞바람이에요. 한 번 등바람을 타고 가볍게 자전거를 달리면, 다른 한 번은 맞바람을 이기면서 힘차게 자전거를 밟아야 합니다.


  샛자전거와 수레에 탄 두 아이가 노래합니다. 앞머리에서 자전거를 이끄는 나도 노래합니다. 두 아이는 기쁘게 노래하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래합니다.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맞이하는 바람을 마시면서 노래합니다. 다 다른 넋으로 다 다른 기쁨을 노래하는 가락은 바람에 실려 마을 곳곳으로 퍼집니다. 아이들 목소리가 없는 이 시골마을에 우리 아이들이 새로운 노랫가락을 퍼뜨립니다.



.. 꽃이 되지 않는 풀 / 개가 되지 않는 강아지 // 한 뼘 하늘가에 / 풀 강아지 ..  (강아지풀-박용래 님께)



  아이들은 맨몸으로 나들이를 누립니다. 나는 이것저것 챙기고 꾸려서 나들이를 누립니다. 아이들은 근심도 걱정도 없이 웃고 노래하면서 나들이를 누립니다. 나는 온갖 짐을 잔뜩 짊어지면서 빙그레 웃고 노래하면서 나들이를 누립니다.


  내 어버이도 오늘 나처럼 온갖 짐을 잔뜩 짊어지면서 나(어린 나)를 데리고 나들이를 다니셨겠지요. 내 어버이도 오늘 나처럼 먼먼 지난날 기쁨으로 가득 차오르는 노래와 웃음을 퍼뜨리면서 골골샅샅 함께 누비면서 삶을 지으셨겠지요.


  다가오는 먼 앞날에는 우리 아이들이 새로운 아이를 낳아서 새롭게 나들이를 누리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잇는 새 노래가 포근히 흐르면서, 이 노래는 언제나 새삼스러운 글이 되고 책이 되고 시가 되고 문학이 되고 이야기가 되면서 이 땅에 곱게 깃들리라 생각합니다. 4348.2.1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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