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잠 애지시선 15
김열 지음 / 애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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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77



시와 모레

― 여수의 잠

 김열 글

 애지 펴냄, 2007.10.31.



  사라지거나 잊힌 말이 있습니다. 나라와 겨레마다 사라지거나 잊힌 말이 꽤 있으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이 서서 사회를 바꾸면서 힘으로 윽박지르려 할 적에는 평화가 사라지고 전쟁이 불거지면서 딱딱한 틀(제도권)이 울타리처럼 솟거든요. 서로 아끼는 삶이 아니라 서로 짓밟아서 빼앗으려는 전쟁이나 경쟁이 불거지면, 따사롭거나 너그러운 말은 어느새 주눅이 들어 사라지거나 잊힙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꽤 많은 말이 사라지거나 잊힙니다. 이를테면, ‘한가람 아파트’ 같은 데에서는 쓰지만, 막상 냇물을 가리킬 적에는 안 쓰는 ‘가람’ 같은 낱말이 잊힙니다. 한자말 ‘내일(來日)’은 있되, 한국말 ‘하제’는 사라집니다. 한국말에서 ‘어제’와 ‘오늘’은 있지만, 이튿날을 가리키는 낱말은 그만 사라졌어요. 그래도 ‘그제’처럼 ‘모레’라는 낱말은 있습니다. 이와 함께 ‘글피’라는 낱말이 있어요. 다만, 모레와 글피라는 낱말이 있어도 이 낱말을 알맞고 즐겁게 쓰는 사람은 차츰 줄어든다고 느낍니다.



.. 구두약 둥근 뚜껑 안에서 / 말달리도록 맨 처음 고안한 사람의 마음과 / 손을 넣어 구두를 빛나게 닦아주는 푸른 풀밭 같은 마음을 생각한다 ..  (말)



  ‘오늘’이라는 낱말은 “바로 이곳 이때”를 가리킵니다. ‘어제’라는 낱말은 “지난날”을 가리킵니다. “앞날”을 가리킬 낱말은 무엇일까요? 이제는 ‘모레’라는 낱말이 앞날을 가리켜요.


  어제에서 오늘로 흐르고, 오늘에서 모레로 흐릅니다. 오늘 이곳에서 어우러지는 우리는 씩씩하게 모레로 나아갑니다. 오늘 하루 즐겁게 살기에 모레가 그립고, 어제 하루 기쁘게 누렸기에 오늘이 아름답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사라지거나 잊힌 말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거나 잊히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사라져서 아쉽구나 싶은 말이 있지만, 사라지지 않아서 즐겁게 쓰는 말이 있어요. 우리 곁에 남은 말을 돌아보면서 이 말을 새롭게 엮어서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말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속내는 사라지지 않는 셈입니다. 어떤 말이 다른 말로 자리를 옮겨 우리 곁에 있는 셈입니다. 말에 깃든 넋은 늘 그대로 있으면서 언제나 새롭게 거듭나는 셈입니다.



.. 여수가 아니어도 좋았다 탁 트인 바닷가라면 좋았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한 유적처럼 떠 있는 섬들과 먼 바다로 떠나는 외양선 불빛이 닿는 높은 언덕이 있는 곳이라면 더 좋았다 여수행 열차표를 다짐이즛 꼭 쥐었던 건 오랜 병을 알고 있는 항구를 떠올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여수의 잠)



  어느 때나 똑같이 쓰는 말은 없습니다. 모습은 같아도, 쓸 때마다 느낌이 다른 말입니다. 날마다 밥을 똑같이 먹는다지만, 날마다 다르면서 언제나 새로운 밥입니다. 오늘 먹는 밥과 어제 먹는 밥은 같지 않아요. 오늘 먹는 밥과 모레에 먹을 밥도 같지 않아요. 언제나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새로운 밥입니다. 늘 새롭게 맞이하는 재미나고 기쁜 밥입니다.


  같은 노래를 날마다 불러도 언제나 다르면서 새로운 느낌이에요. 가만히 보면, ‘같은 노래’를 ‘똑같이 부를’ 수 없습니다. 부를 때마다 조금씩 다르고, 부르는 자리마다 조금씩 새롭습니다. 부르면 부를수록 새롭게 거듭나고, 가슴 깊이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피어납니다.



.. 옆 의자엔 여행용 가방이 불룩하게 앉아 있다 // 여행과 베이지색 코트의 소매는 낡아 보이지 않는다 ..  (역)



  김열 님이 빚은 시집 《여수의 잠》(애지,2007)을 읽습니다. 시를 쓴 김열 님은 한자말을 빌어 여러 가지 뜻과 느낌을 나타내려 합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생각합니다. 한국사람은 한자말을 빌거나 영어를 빌어서 ‘새로운 생각’을 나타내려고 여러모로 애쓰는데, 막상 한국말을 살려서 ‘새로운 생각’을 나타내려고는 못 하기 일쑤입니다. 늘 쓰는 한국말로는 재미난 결을 살리지 못하기 일쑤이고, 언제나 주고받는 한국말로는 사랑스러운 무늬를 살찌우지 못하기 일쑤예요.


  풀빛이라 하더라도 똑같은 풀빛이 없습니다. 도시사람이 흔히 먹는 상추만 하더라도 똑같은 상춧빛은 없습니다. 깻잎이라서 모든 깻잎이 똑같은 빛깔이지 않은데, 상춧잎빛과 깻잎빛도 다르고, 배춧잎빛이나 양배춧잎빛도 다 달라요.



.. 버드나무 잎사귀 화르르 늘어지던 / 겨울 / 부여읍 / 동남리 / 연꽃이 맨 먼저 피었다던 / 연꽃잎 졌다던 ..  (궁남지)



  흔하거나 너르다고 하는 곳에서 흐르는 숨결을 읽는다면, 삶을 늘 새롭게 지핍니다. 수수하거나 투박하다고 하는 것에 감도는 넋을 읽는다면, 삶을 언제나 새삼스레 짓습니다.


  삶을 이루는 수수께끼는 늘 내가 스스로 내어 내가 스스로 풉니다. 삶을 일구는 실마리는 늘 내가 처음에 맺고 내가 나중에 풉니다.


  내가 나를 보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남이 나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내가 남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내가 읽을 시는 내가 쓸밖에 없습니다. 네가 읽을 시는 네가 쓸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인이요, 문학가이며, 법률가인데다가, 교사요, 학자이고, 살림꾼이고,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한편, 하느님이고, 사람입니다.



.. 풀섶 제비꽃과 다섯 번 눈 맞췄다 / 여자는 뒤척이다 또렷한 / 턱선까지 이불자락을 끌어덮는다 / 이제 그만 이사를 가야 한다 / 바람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  (열아홉 번째 불면)



  나한테 찾아올 모레는 내가 짓습니다. 내가 밟고 지나간 어제는 바로 내가 지었습니다. 오늘 쐬는 바람은 내가 스스로 맞아들입니다. 숨을 한 차례 들이마시고, 숨을 두 차례 들이켭니다. 모두 내 뜻에 따라 내 몸이 움직이면서 마시는 숨입니다. 내 뜻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내 뜻이 있기에 나는 모든 것을 합니다.


  사랑도 미움도 내 뜻입니다. 전쟁도 평화도 내 뜻입니다. 꿈도 굴레도 내 뜻입니다. 무엇을 하든 내 뜻이니, 나는 내 몸짓을 가만히 살피면서 내 삶을 찬찬히 지을 수 있으면 됩니다. 여수에 가도 즐겁고, 고흥에 가도 즐거우며, 해남이나 강진에 가도 즐겁습니다. 통영에 가든 남해에 가든 늘 즐겁습니다. 어디로 가든, 내 몸은 바로 내 뜻에 따라 가니까, 내가 스스로 즐겁습니다.


  집을 또 옮기든 다시 옮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즐겁게 옮기면 돼요. 한 곳에 내처 머무르든 말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즐겁게 살면 돼요. 시 한 줄에는 내 숨결이 고이 깃듭니다. 4348.2.9.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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