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47. ‘사람’과 ‘국민’과 ‘백성’
― 누가 ‘이곳’에서 쓰는 말인가
요즈음은 정부에서 ‘국민(國民)’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예전에는 나라에서 ‘백성(百姓)’이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요즈음 생각 있다는 사람은 ‘시민(市民)’이나 ‘서민(庶民)’라는 낱말을 쓰는데, 한동안 ‘민중(民衆)’이나 ‘민초(民草)’ 같은 낱말이 두루 나돌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름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을 가리킬 수 있고, 권력과 동떨어진 채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모저모 살피면, 정부에서 쓰는 말이나 지식인이 쓰는 말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이뿐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을 좀처럼 안 쓰고, 여느 자리에서 사는 사람이 흔히 쓰는 ‘이웃’이라는 말도 어지간해서는 안 씁니다.
‘국민’은 일제강점기에 천황을 섬기던 이웃나라에서 한겨레를 짓밟으면서 퍼뜨린 한자말입니다. 이리하여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었어요. 그렇지만 ‘국민투표’라든지 ‘국민의 소리’라느니 하면서, 이 낱말을 제대로 씻거나 떨치려는 사람은 거의 안 보입니다. 지난날 조선에서는 신분이나 계급으로 사람을 가른 탓에, 사람을 ‘사람’으로 말하지 않았고, ‘이웃’이란 시골자락에서 수수하게 흙을 짓던 사람들이 마을을 조촐히 이루어 서로 주고받는 이름이었어요. 그래서 지난날 조선에서는 임금과 백성이 이웃 사이가 아니었으며, 양반과 농사꾼도 서로 이웃 아이가 아니었어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쓰던 말이 ‘백성’이요, 이런 낱말에는 예전 사회와 정치 얼거리가 고스란히 깃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일는지 헤아릴 노릇입니다. 우리는 국민도 백성도 아니지만, 시민이나 서민도 아닙니다. 낱말로만 보아도 ‘시민’은 “시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군이나 읍이나 면에서 사는 사람은 군민이나 읍민이나 면민이에요. 오늘날은 도시사람이 92%가 넘는다지만, 여느 사람을 함부로 ‘시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벼슬이나 특권이 없는 사람을 ‘서민’이라 한다는데, 이 또한 사람을 계급과 신분으로 가르는 이름입니다. 지식인은 ‘민중·민초’ 같은 이름을 한자말로 짓지만, 정작 민중이나 민초라 할 사람은 한자 권력이나 지식하고는 등진 채 살았습니다. 지식인이 “여느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을 쓰려 했다면, 여느 사람 살림과 터전을 헤아려 ‘시골사람’이나 ‘들사람’ 같은 이름을 써야 올바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너와 나 사이에 울타리를 걷어내어 오롯이 ‘사람’이라고만 써야지요.
지난날 ‘훈민정음’은 한자를 중국말대로 읽도록 적으려고 쓴 소릿값(발음기호) 구실을 하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이라는 그릇은 권력자와 지식인만 살짝 썼을 뿐, 여느 자리에서 살던 사람(백성)은 이러한 그릇을 알지도 배우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채 ‘입으로 말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날 ‘한글’은 한국말을 담는 그릇입니다.그런데 오늘날 한글이라는 그릇에는 한국사람이 생각을 주고받는 이야기가 담기기보다는, 온갖 한자말과 영어가 어수선하게 섞일 뿐 아니라, 번역 말투와 일본 말투가 두루 파고들어 짬뽕이 됩니다.
짬뽕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짬뽕이 되면서 한국말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춥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잊으면서 어떤 생각을 말이나 글로 담으려 했는지 잊습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잃거나 팽개치면서 어떤 넋을 말이나 글에 실어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가까지 잃거나 팽개칩니다.
‘사람’과 ‘人間’은 다릅니다. ‘사람’과 ‘human’은 다릅니다. 이러한 말이 태어난 곳도 다르고, 이러한 말을 쓴 발자취와 나날도 다릅니다. 오늘날에는 나라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북돋우기보다는, 학교교육으로 아이들을 가두어 입시지옥으로 내몰아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몰다가, 대학교를 마치면 다시 취업지옥으로 몰아세워서 도시에서 돈벌이에만 사로잡히도록 들볶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사람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 새로 아이를 낳을 적에도 사람다운 숨결을 쉬지 못합니다. 말이 말다웁기 앞서 사람이 사람다운 삶이 없습니다. 말이 말답게 서기 앞서 사람이 사람답게 설 수 있는 터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백성도 국민도 시민도 서민도 민중도 민초도 대중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입니다. 모두 똑같이 사람으로 이 땅에 서서 다 함께 이웃이자 동무입니다. 사람으로서 쓸 말을 생각할 노릇이고, 이웃끼리 주고받을 말을 헤아릴 노릇이며, 동무끼리 나눌 말을 살필 노릇입니다.
깨끗하다는 토박이말을 살린다거나, 지식을 키우려고 한자말이나 영어를 섞어 써야 한다거나, 죽은 옛말을 살린다거나, 사자성어를 부려 써야 한다거나, 시사상식을 키워야 한다거나, 이런 허울이나 저런 틀에 갇히지 말 노릇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면서 쓸 말을 찾고, 이웃과 이웃이 아낄 말을 깨달으며, 동무와 동무가 어깨를 겯을 말을 지어서 가꿀 노릇입니다.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는 ‘어떤 말’로 ‘국무회의’ 같은 자리를 마련했을까요?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는 ‘한국말’을 썼을까요, 아니면 중국말을 썼을까요? 지난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뿐 아니라 양반은, 그무렵 이 나라에서 99%를 웃돌던 여느 시골자락 흙지기가 수수하게 쓰던 ‘한국말’로 정치나 정책을 펼쳤을까요, 아니면 중국말로 말과 글을 썼을까요?
오늘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대통령과 공무원과 지식인과 학자와 교사는 어떤 말을 쓰는가요? 교과서에 얽매인 말을 쓰는가요?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쓰는가요? 높고 낮은 신분이나 계급이라는 울타리를 걷어내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한국말’을 여느 사람 눈높이로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쓰는가요?
한자말을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든 안 쓰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토박이말을 잘 캐내든 말든 놀랍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사랑을 밝히는 사람다운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사람으로서 ‘이웃과 동무를 아끼는 사랑을 밝히는 사람다운 말’을 날마다 새롭게 배워서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4347.12.23.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