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지 않는 손 - 서정홍 동시집
서정홍 지음, 윤봉선 그림 / 우리교육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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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34



아이를 쓰다듬는 손은 나중에

― 닳지 않는 손

 서정홍 글

 우리교육 펴냄, 2008.5.30.



  오늘 내 손은 두 아이를 쓰다듬습니다. 두 아이한테 내가 어버이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 아이를 쓰다듬으면서 하루를 마감합니다. 두 아이는 내 손길을 받으면서 새근새근 잠들지요. 아이들도 꿈을 꾸고, 나도 꿈을 꿉니다. 우리는 다 함께 가슴에 꿈을 하나씩 품으면서 기쁘게 노래합니다.



.. 하루 일 마치고 돌아온 / 어머니, 아버지는 / 밤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 서로 발톱을 깎아 주고 / 서로 어깨를 주물러 줍니다 ..  (어른이 되면)



  큰아이가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듯해서, 살며시 큰아이 손을 잡습니다. 큰아이한테 소근소근 말을 겁니다. 큰아이는 아버지 말을 들으면서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가 새근새근 잠들었다 싶을 무렵 살며시 일어나서 옆방으로 나오니, 두 아이가 번쩍 눈을 뜨고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합니다. 으잉? 너희들 자는 척했니? 그래 그렇구나. 너희들 마음은 그렇구나.


  아이들이 소근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습니다. 일부러 듣지는 않습니다. 조그마한 시골집에서는 작은 소리도 옆방까지 잘 들립니다. 나는 아이들 말소리를 들으면서 즐겁습니다. 아마 두 아이도 아버지가 저희 귀에 대고 따사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적에 몹시 즐거우면서 설렐 테지요.



.. 나무로 만든 / 숟가락과 젓가락도 닳고 / 쇠로 만든 / 괭이와 호미도 닳는데 /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  (닳지 않는 손)



  삶을 밝히는 말은 아주 쉽습니다. 왜냐하면, 쉬운 말이 넋을 살찌우고, 넋을 살찌운 말은 다시 삶을 살찌우기 때문입니다. 늘 먹는 수수한 밥이 날마다 몸을 살찌우듯이, 늘 주고받는 말은 마음을 살찌웁니다.


  이러구러 꾸미는 말은 삶을 살찌우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꾸미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럭저럭 덧붙이는 말은 삶을 북돋우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덧붙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저 사랑입니다. ‘선물을 주는 사랑’이나 ‘옷을 새로 주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은 그저 사랑입니다. 다른 것을 꾸며서 덧붙이지 않습니다. 꽃은 꽃 그대로 꽃이지, 꽃에 다른 빛깔을 입혀야 더 곱지 않고, 무언가 스티커를 붙여야 더 예쁘지 않습니다.


  양념을 치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양념만으로는 밥을 먹을 수 없을 뿐입니다.



.. 그런데 요즘은 양복 한 벌 값이 / 한 해 내내 먹을 쌀값보다 비싸다지. / 그렇게 비싼 옷들이 / 집집마다 옷장에 가득 쌓였다지 ..  (옛날이야기 4)



  서정홍 님 동시집 《닳지 않는 손》(우리교육,2008)을 읽습니다. 동시집 《닳지 않는 손》은 서정홍 님이 살아온 나날을 적은 책이고, 이 책은 바로 이녁 아이한테 물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버이요 아버지로서 지은 삶을 담은 책이면서, 아이가 앞으로 물려받아서 새롭게 가꿀 수 있기를 바라는 꿈을 실은 책입니다.



.. “아버지, 농촌에는 왜 / 할머니와 할아버지밖에 살지 않을까요? / 할머니와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 누가 농사지을까요? / 우린 무얼 먹고 살지요?” ..  (‘고구마 캐기’ 행사에 다녀와서)



  나는 아이들한테 글을 적어서 건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적어서 건네는 글을 받습니다. 나는 아이들한테 그림을 그려서 건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그려서 건네는 그림을 받습니다. 아이들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서 아버지한테 내밉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쓴 글과 그린 그림을 받습니다.


  나는 아이들과 늘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글과 그림을 선물로 주고받을 뿐 아니라, 노래를 선물로 주고받습니다. 꿈과 사랑을 선물로 주고받습니다. 이야기와 숨결을 선물로 주고받습니다.


  받을 마음으로 주는 선물이 아니라, 그저 주는 선물입니다. 주면서 자꾸 줄 수 있는 선물이요, 주기에 언제나 줄 수 있는 선물입니다. 나누기에 늘 나눌 수 있는 사랑이요, 나누면서 한결같이 나누며 웃음이 피어나는 사랑입니다.



.. ‘어머니, 공부하기 싫은 사람은 / 공장에서 죽도록 일만 해야 합니까? / 사람들 머리도 예쁘게 깎아 주고 / 빵도 맛있게 만들어 주고 /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  (하고 싶은 말)



  시는 시인이 쓰지 않습니다. 사랑을 가슴에 품는 사람이 시를 씁니다. 노래는 가수가 부르지 않습니다. 사랑을 가슴에 심는 사람이 노래를 부릅니다. 웃음은 익살꾼이 베풀지 않습니다. 사랑을 가슴에 두는 사람이 웃음을 퍼뜨립니다.


  서정홍 님은 시인일까요? 네, 시인이지요. 시를 쓰기에 시인이 아니라, 사랑을 가슴에 품고 아이를 어루만지니 시인입니다. 시집을 선보였기에 시인이 아니라, 아이와 부를 노래를 꿈꾸면서 흙을 가꾸기에 시인입니다. 강의도 하고 글도 쓰기에 시인이 아니라, 내 보금자리에서 삶을 짓는 길을 걸어가기에 시인입니다.



.. 산이고 들어고 가는 데마다 / 농약을 뿌려 대는 바람에 먹을 게 없어요. / 산에 들에 먹을 게 없어 사과밭에 왔더니 / 사과밭 주인이 타앙 타앙 총을 쏘아 댔어요. // 작은 도시고 큰 도시고 가는 데마다 / 자동차 매연과 공장 굴뚝 연기 바람에 / 집 지을 데가 없어요. // 사람 발길이 뜸한 / 전봇대 위에 집을 지었더니 / 순찰 아저씨가 화를 내면서 / 집을 부수었어요 ..  (애물단지)



  겨울에 꽃이 핍니다. 추운 바람을 맞지만, 이 겨울에도 낮에는 고운 볕이 있기에 싱그러이 꽃송이가 터집니다. 동백나무에서도 꽃이 피지만, 들판에서도 조그맣게 꽃이 핍니다. 다른 어느 풀보다 유채나 갓은 한겨울에 꽃을 피웁니다. 냉이와 봄까지꽃도 한겨울에 꽃을 피웁니다. 사진가한테 널리 알려진 몇몇 ‘이름난 겨울꽃’이 아니어도 들판을 살펴보면 온갖 들꽃이 올망졸망 피어나서 ‘겨울나물’이 되어 줍니다. 이 겨울나물은 사람한테뿐 아니라 숲짐승한테도 고마운 밥입니다. 목숨을 살리고, 목숨을 살찌우며, 목숨을 북돋웁니다. 삶을 키우고, 삶을 가꾸며, 삶을 짓습니다.



.. 지난봄에도 올봄에도 / 창원대로에 벚꽃이 피었어요. // 한 해 내내 매연을 마시고도 / ‘야, 봄이다 봄이야!’ / 보란 듯이 벚꽃이 피었어요. // 자동차 매연도 / 봄한테는 이길 수 없나 봐요 ..  (봄)



  겨울에 잠든 땅이 깨어나서 봄이 피어납니다. 봄에 피어나는 흙은 여름에 한껏 자랍니다. 여름에 한껏 자란 흙은 가을에 무르익습니다. 가을에 무르익은 흙은 겨울에 다시 잠듭니다. 한 해가 흐르듯이 한 철이 흐르고, 한 날이 흐릅니다. 이러한 결에 따라 한 삶이 흐릅니다.


  나는 다시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깁니다. 밤이 깊으니 아이들은 깊이 잠듭니다. 아이들이 이불을 잘 덮는지 살피고, 이 작은 몸뚱이에 깃든 숨결이 꿈을 피우는 꽃송이로 여물기를 바랍니다. 나도 아이들 곁에서 함께 피어나는 꽃이 될 테며, 아이들은 나를 믿고 또 나한테 기대면서 기쁘게 웃음보따리를 풀어 놓겠지요. 나도 아이들을 믿고 또 아이들한테 기대면서, 우리는 스스로 홀가분하면서 함께 어깨동무하는 길동무가 되겠지요. 4348.1.28.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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