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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솔밭 ㅣ 창비시선 141
황명걸 지음 / 창비 / 1996년 1월
평점 :
시를 노래하는 시 90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하루
― 내 마음의 솔밭
황명걸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6.1.5.
물구나무서기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물구나무서기를 언제 했는가 하고 더듬으니 거의 서른 해 만입니다. 어릴 적에 하고는 다시는 안 하며 살았습니다. 몸이 무거워졌기 때문일까요, 마음이 무겁기 때문일까요.
요 며칠 사이에 춤을 춥니다. 이제는 내 마음결에 따라 춤을 춥니다. 걸음을 내디딜 적마다 춤짓이 됩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비가 바람을 타듯이 가볍게 춤을 추며 걷습니다. 여러 날 춤을 추다가 오늘은 문득 떠올라 물구나무서기를 합니다.
벽에 대고 발을 찹니다. 발은 가볍게 벽에 닿고, 아아 물구나무서기란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몸짓이었네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마흔두 살에 하는 물구나무서기는 하나도 안 힘들 뿐 아니라 아주 가볍습니다. 몸이 가볍게 달라지니 저절로 물구나무서기를 합니다.
.. 시골에 살면서 / 요즈음 나의 바람은 / 넓도 좁도 않은 솔밭을 / 내 마음밭에 키우고 싶음 뿐 .. (내 마음의 솔밭)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생각합니다. 벽에서 발을 떼고 팔로만 서고 싶습니다. 팔로만 선 뒤 천천히 팔걸음을 하고 싶습니다. 팔걸음으로 거닐면서 발로는 춤을 추고 싶습니다. 두 팔로 씩씩하게 이 땅을 짚으면서 두 발로 즐겁게 하늘을 휘젓고 싶습니다.
물구나무서기는 이 땅을 뒤집지 않습니다.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이 땅에는 위아래가 없는 터전인 줄 환하게 보여줍니다.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머리에 피가 쏠릴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위와 아래가 없으니까요. 중력으로 움직이는 지구별이 아니라 마음으로 움직이는 지구별이니까요.
.. 언젠가는 만나볼 고향의 처자를 희망 삼아 / 돼지껍질 반 접시에 소주 한 고뿌를 호강으로 여기며 / 질기게 기다리며 살아가는 / 고향 사람 초로의 날품팔이꾼 / 살아 있으면 내 작은삼촌 나이뻘 되는 / 삼촌 같은 고향 사람 .. (고향 사람)
황명걸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내 마음의 솔밭》(창작과비평사,1996)을 읽습니다. 황명걸 님이 시집을 펴낼 무렵에는 경기도 양평에서 ‘화랑까페’를 꾸렸다고 합니다. 2010년대가 깊어 가는 요즈음에도 화랑까페는 그대로 하실까요? 드문드문 시집을 낸 황명걸 님은 앞으로 다시 한 번 시집을 더 선보일 수 있을까요?
.. 한여름 한낮의 한길에서 / 난데없이 악쓰는 소리 비명 지르는 소리 / 전자오락실 앞에서 사람들이 / 땅굴 파는 두더지 때려잡기에 열이 올랐다 .. (미친 짓거리)
어리거나 젊은 사람만 물구나무서기를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물구나무서기를 합니다. 마흔 살이건 쉰 살이건 예순 살이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하려고 하면 누구나 물구나무서기를 하지요. 왜냐하면, 물구나무서기는 훈련을 거쳐서 하지 않거든요. 훈련을 거쳐서 더 놀라운 재주를 뽐내려는 물구나무서기가 아니라, 몸을 스스로 다스리면서 곱게 가꾸고 싶은 물구나무서기이거든요.
시를 잘 써야 시를 쓰지 않습니다. 마음이 있을 적에 시를 씁니다.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거나 문학잡지에 시를 선보였기에 시인이 아닙니다. 삶을 사랑하고 이웃을 아끼며 동무와 함께 웃는 사람이 시인입니다. 시집을 여러 권 냈기에 시인이 아니고, 마음이 착하게 흐르는 사람이 시인이에요.
.. 세살 난 딸 서정이가 / 은희의 〈꽃반지〉를 노래한다 / 신경통으로 고생하는 아빠 곁에서 / 오빠는 열심히 안마하고 / 엄마는 꼼꼼히 가계부를 적는데 .. (저녁의 불청객)
숲을 사랑하는 사람은 숲님입니다. 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들님입니다. 해를 사랑하는 사람은 해님입니다. 달을 사랑하면서 달님이요, 별을 사랑하면서 별님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시인입니다. 저마다 다 다른 숨결을 사랑하는 시인입니다. 황명걸 님은 시골을 사랑하면서 시골님이 되어 시집을 한 권 꾸렸지 싶습니다. 이 나라 수많은 고운 님들도 저마다 고운 넋을 살려서 고운 시집을 쓸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2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