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어서 배울 수 있는가



  책을 읽을 적에는 ‘책을 배운다’고 느낍니다. 씨앗을 심을 적에는 ‘씨앗심기를 배운다’고 느낍니다. 밥을 지어서 아이들한테 차려서 줄 적에는 ‘밥짓기와 밥차림을 배운다’고 느낍니다. 나무 곁에 서서 줄기와 가지를 살살 어루만지면 ‘나뭇줄기와 나뭇가지를 배운다’고 느낍니다. 조물조물 옷가지를 비벼서 빨래를 하면 ‘빨래를 배운다’고 느낍니다.


  놀이를 다루는 책을 읽기에 놀이를 배우지 않습니다. ‘놀이를 다룬 책’을 배울 뿐입니다. 놀이를 배우려면 몸소 놀이를 해야 합니다. 환경 문제를 건드린 책을 읽기에 환경 문제를 배우지 않습니다. ‘환경 문제를 건드린 책’을 배울 뿐입니다. 내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터전을 스스로 돌아보고 살펴서 깨달아야 비로소 ‘환경 문제가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목수는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옷장을 짜야 비로소 ‘목수 일’을 배웁니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대서 ‘목수 일’을 배우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인문학을 소리 높여 말하고 여러 가지 인문책이 나옵니다. 인문학 강의를 듣는 사람이 많고, 인문책을 읽는 사람이 많습니다. 강의와 책은 ‘인문 지식을 퍼뜨리는 구실’을 합니다. 그런데, 인문 지식을 머릿속에 담는다고 해서 사회가 달라지거나 정치를 바로잡거나 경제를 옳게 추스르지 않습니다. 책읽기는 언제나 책읽기이지, 삶읽기나 ‘삶 배우기’가 되지는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입시지옥에 길든 사람은 ‘삶 배우기’를 몸으로 나서서 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먼저 ‘책을 찾아서 지식을 머리에 담으’려 하기 일쑤입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림으로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알아야 하고,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모습을 보아야 하며, 본 것을 생각해야 하고, 보고 생각한 것에 이야기를 담아야 합니다. 이러고 나서 붓과 종이를 장만해서 손수 붓을 놀려야 합니다. 이런 기법과 저런 솜씨를 익혀야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글쓰기를 배우든 사진찍기를 배우든 이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먼저 살피는 사람이 드물고, ‘살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며, ‘살핀 것을 생각해서 이야기를 싣는’ 사람은 더더욱 드뭅니다.


  배우려면 보아야 합니다. 보면서 내 느낌을 키워야 합니다. 내 느낌을 제대로 알아채어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흐름을 걸어갈 수 있으면, 이때에 비로소 ‘배우는구나’ 하고 깨달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학교를 다니거나 강의를 듣거나 책을 본대서 배울 수 있지 않아요.


  바라보고, 느끼고, 알고, 받아들여서, 살고, 이리하여 이 모두를 아울러서 사랑하고 하루를 기쁘게 지어야 마무리가 될 테지요.


  책을 읽는 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저 ‘책읽기’일 뿐입니다. 책만 읽고 싶다면 책을 읽으면 되고, 삶을 가꾸거나 읽거나 짓고 싶다면 책을 내려놓고 눈을 떠서 둘레를 살펴본 뒤 온몸을 움직여서 하루를 가꾸거나 읽거나 지으면 됩니다. 4347.12.2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