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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32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35
걸어온 길을 돌아보다
― 천재 유교수의 생활 32
야마시타 카즈미 글·그림
학산문화사 펴냄, 2012.9.25.
한낮에 뒤꼍으로 가서 복숭아나무를 들여다보려 하니, 복숭아나무 옆에 마을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서 해바라기를 합니다. 우리 집에서 밥을 얻어먹는 아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뒤꼍에서 자라는 복숭아나무는 볕을 아주 잘 받습니다. 볕이 아주 잘 드는 자리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복숭아나무는 무럭무럭 큽니다. 마을고양이도 이 자리가 겨울볕이 아주 좋은 줄 잘 아는 듯합니다. 날마다 아침과 낮과 저녁으로 복숭아나무를 들여다보는데, 오늘 낮에는 마을고양이 낮잠을 깨우고 싶지 않습니다.
며칠 앞서 장미나무 한 그루를 옮겨심었습니다. 꼭 옮겨심으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우리 집 뒤꼍 장미나무 한 그루가 그만 뚝 끊어졌습니다. 내 손가락 굵기만 한 여린 장미나무가 끊어진 모습이 애처롭기에 마당 한쪽 꽃밭에 심었지요. 잘 자라렴, 이곳에서는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않는단다 하고 속삭였습니다. 이 아이가 뿌리를 잘 내리기를 바라면서 틈틈이 들여다보면서 말을 건넵니다. 옮겨심은 아이는 돌울타리를 따라 몸을 기대면서 겨울볕을 살짝살짝 받습니다.
- “요모하라 선생은 재미있군요. 보통 유학생이 일본어를 배우는데, 요모하라 선생이 유학생보다 훨씬 열심히 언어를 공부하시니. 하지만, 이러면 학생을 너무 봐주게 되지 않습니까?” “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재미있어서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16쪽)
- “이제야 떠올랐습니다. 요모하라 선생의 얼굴과 말이.” ‘유택 씨. 그 친구들과 두 번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언어로 이어져 있고 싶지 않겠습니까.” (31∼32쪽)
오늘 아침에는 뒤꼍에서 우리 집 감나무를 한참 올려다보았습니다. 우리가 시골마을에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얻은 지 이듬해에 다섯 해째입니다. 며칠 뒤면 새해가 되니, 어느새 다섯 해째 우리와 지내는 감나무라 할 만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깃들이기 앞서까지 퍽 오랫동안 빈집이었다고 하니, 감나무는 이웃사람 손길을 탔을 만합니다. 예전에는 이 집에서 살던 사람들 손길을 탔을 테지요.
마을에 있는 다른 감나무를 보면 키가 작습니다. 키가 큰 감나무가 드뭅니다. 감알을 따기 좋도록 가지를 뭉텅뭉텅 자르기 때문입니다. 가지를 잘라야 이듬해에 알을 더 많이 맺고, 따기에도 수월하다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집에서만큼은 가지치기는 좀처럼 안 합니다. 아예 안 하지는 않으나, 쭉쭉 뻗는 가지를 일부러 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나무답게 하늘을 바라보면서 올라가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우리 집 뒤꼍 감나무를 가만히 살피니, 곳곳에 생채기가 있습니다. 생채기가 아물면서 마디가 꽤 굵습니다. 얼마나 자주 가지치기를 겪었으면 이렇게 되었나 싶습니다. 도시마다 찻길 한켠에서 자라는 거리나무도 줄기 한쪽이 뭉툭합니다. 하도 가지치기를 겪어서 아파하고 아물고 아파하고 아물기를 되풀이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는 카즈히코 이모부가 정신을 집중하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창조하는 신성한 곳이다. 하나코가 아무리 열성적인 팬이라 해도 이 자리를 더럽히는 것은 허락할 수 없구나.” (56쪽)
- “에도 사나이라면 패기가 있어야지” “좀 어렵군요. 아니, 저는 에도 출신이 아니라서, 지역의 관습은 존중하지만 모방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니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108쪽)
야마시타 카즈미 님이 빚은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학산문화사,2012) 서른둘째 권을 읽습니다. 서른둘째 권에서도 유택 교수가 지난날을 곰곰이 더듬는 대목이 자주 나옵니다. 유택 교수 나름대로 걸어온 길을 차분하게 되새기면서, 이녁이 어릴 적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이녁이 어른으로 사는 오늘 보고 듣고 겪는 이야기와 맞물립니다. 어릴 적부터 곧게 흐르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릴 적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어른인 오늘 새롭게 깨닫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하지만, 나는 당신과 달리 아직도 세계의 관찰자입니다.” (135쪽)
- “역시 유택 씨였군요. 발소리로 금방 알았습니다.” “발소리?” “자기 뜻에 따라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제멋대로인 사람, 우유부단인 사람, 발소리는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르죠.” “나는 어떤 발소리입니까?” “언제나 규칙적이고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소리죠.” (168쪽)
유택 교수는 홀가분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합니다. 이녁은 ‘온누리를 지켜보는 사람’이라고 가만히 이야기합니다. 누구보다 유택 교수 스스로 돌아볼 테고 지켜봅니다. 유택 교수를 둘러싼 사람들을 가만히 돌아보거나 지켜봅니다. 사람들이 두 발을 딛고 지내는 이 땅을 찬찬히 돌아보거나 지켜봅니다. 궁금하면 묻거나 스스로 생각합니다. 궁금하기에 책을 찾고 자료를 뒤집니다. 궁금함을 풀려고 책과 자료를 모아서 건사합니다. 수수께끼를 풀면서 웃고, 수수께끼를 내면서 노래합니다. 삶은 언제나 아름다운 수수께끼투성이요, 사랑은 늘 재미난 수수께끼꾸러미입니다.
- “물방울을 떨어뜨려 악기 같은 소리를 내는 장치죠. 이 소리를 만들어 내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저녁바람이 불면 절의 대나무 숲에서 댓잎이 사각거리죠. 대숲 소리를 들으면 까마귀가 둥지로 돌아가는 소리도 신경쓰이지 않습니다. 이제 단풍잎도 물이 들기 시작하는군요. 돌 위에 잎사귀가 하느적 떨어지는 소리가 좋습니다.” (183쪽)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은 나무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습니다. 구름을 바라보는 사람은 구름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습니다.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꽃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은 아이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습니다.
어떤 소리를 듣고 싶은가요? 어떤 소리로 내 가슴을 감싸고 싶은가요? 어떤 소리를 나누고 싶은가요? 어떤 소리를 스스로 밝혀서 이 땅에 이야기 한 자락 심고 싶은가요?
겨울볕이 포근합니다. 그러나 겨울인 만큼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고, 밤에는 제법 춥습니다. 아니, 우리 집이 깃든 전남 고흥이니 낮에는 포근하고 아침저녁에는 쌀쌀할 수 있어요. 다른 고장에서는 한낮에도 무척 추울 테고, 어느 고장에서는 겨우내 눈이 가득 쌓여서 옴쭉달싹 못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고장에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가 저마다 다른 사람들 손길을 타면서 태어납니다. 저마다 다른 마을에서 저마다 다른 노래가 저마다 다른 사람들 마음을 적시면서 흐릅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우리 이야기를 씨앗으로 심는 하루입니다. 내가 걷는 길은 내 삶을 웃음꽃으로 피우려는 꿈입니다. 4347.12.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