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여우 2
오치아이 사요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434



마음에 쌓은 울타리를 털고

― 은여우 2

 오치아이 사요리 글·그림

 강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4.6.30.



  여러 해 앞서부터 섣달에 귤을 선물로 받습니다. 귤을 선물로 주시는 분은 조용히 상자를 보냅니다. 귤 상자를 받고는 깜짝 놀라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데, 아이들은 귤 그림이 새겨진 상자를 보면서 와아아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러구러 제주섬에 아는 이웃이 여럿 있습니다. 이분들은 ‘잘생긴 귤’을 보내 주시기도 하고, ‘못생긴 귤’을 보내 주시기도 하는데, 잘생긴 귤은 잘생긴 귤대로 달고 시원하며, 못생긴 귤은 못생긴 귤대로 달고 시원합니다. 무엇보다 못생긴 귤은 저잣거리나 가게에서 파는 귤하고 댈 수 없을 만큼 달고 시원합니다.




- “이 여자는 신안이 있으면서도 신의 사자에 대한 말버릇이 돼먹지 못했어! 당당히 정중에 서 있는 걸 보면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나 봐!” “시끄러운 꼬마로군. 그런 사소한 일은 상관없잖아.” (23쪽)

- “신의 사자라고 해도 하루는 아직 어린 모양이라. 그곳에 자기 짝인 다른 신의 사자도 있는데, 놔두고 혼자 나오다니 신의 사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놔두고 나온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45쪽)



  못생긴 귤은 내다 팔기 어렵다고 합니다. 못생긴 귤뿐 아니라 못생긴 호박이라든지 못생긴 배라든지 못생긴 오이라든지, 저잣거리에서 팔기에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날에는 속살이 아닌 얼굴을 먹는 셈이지 싶으니, 생김새가 떨어진다 싶으면 제값을 못 받을 테지요.


  못생긴 귤을 고맙게 먹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지난가을에는 못생긴 배를 선물로 조금 얻어서 먹으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우리 집 울퉁불퉁한 모과알을 썰어서 담근 차를 마시면서 새롭게 생각에 잠깁니다.


  눈을 감고 바라보면 잘생기거나 못생긴 겉모습은 없습니다. 눈을 감고 만지면 잘생긴들 못생긴들 똑같습니다. 눈을 감고 마주하면 키가 크든 작든 똑같습니다. 눈을 감고 어깨동무를 하면 모두 사랑스러운 이웃이요 동무입니다.


  여기에 있는 너와 나는 마음으로 사귀는 사이입니다. 여기에 있는 너와 나는 사랑으로 만나는 사이입니다.


  우리는 얼굴값으로 사귀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갑 무게나 은행계좌를 살피면서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졸업장이나 자격증 숫자를 세면서 사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가용 크기로 만나지 않습니다.





- “상관없어! 아이니 뭐니, 그 전에 인간이니까! 인간은 누구나 혼자 살아가지 못해! 신에게 부탁 좀 해도 상관없잖아! 신에게 기대는 게 뭐가 나빠!” (57쪽)

- “저 아이는 이곳의 후계자란다. 지금은 아직 우리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너를 보게 되겠지. 그래, 그때는 너를 ‘하루(봄)’라고 소개하렴.” (65쪽)



  오치아이 사요리 님이 빚은 만화책 《은여우》(대원씨아이,2014) 둘째 권을 읽습니다. 《은여우》 둘째 권에는 ‘신의 사자를 볼 줄 아는 아이’가 새롭게 하나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제가 나고 자란 신사에서 뿌리를 못 내립니다. 이 아이를 낳고 돌본 어버이가 모두 죽은 뒤, 이 아이는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마음을 꽉 닫아걸었어요. 어린 나이에 제 울타리를 도무지 어찌하지 못한 끝에 제 고향이면서 어버이 보금자리를 떠나기로 해요. 이 아이 어버이한테는 보금자리이지만, 이 아이 어버이가 떠난 뒤에는 보금자리가 아닌 가시방석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린 아이는 ‘신사를 잇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만, 돈을 얻거나 이름을 날리려는 뜻이 아닙니다. 먼먼 옛날부터 이녁 어버이가 물려주고 물려받은 즐겁고 아름다운 일을 하고 싶은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을 털어놓을 동무나 이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오래 마음을 닫아걸고 울타리를 세웠어요. 마음으로 사귈 이웃이나 동무가 없으니 외롭지요. 마음으로 만날 이웃이나 동무를 못 찾으니 허전하면서 시리지요.





- “우리가 보인다 해도 녀석이 함께 살아갈 상대는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야. 이대로는 결코 즐거운 인생을 보내지 못해.” (97쪽)

- “미안해, 아가씨. 이런 아저씨의 재미없는 옛날얘기나 듣게 해서.” “아, 아니에요! 딱히 상관없어요. 이곳은 신께서 무슨 이야기든 들어 주시는 곳이니까요.” (170∼171쪽)



  곰곰이 생각할 노릇입니다. 외로운 아이가 물려받은 ‘신의 사자를 볼 줄 아는 눈’은 꼭 외로운 아이가 나고 자란 그 신사에서만 써야 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몇 대 손’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아이는 앞으로 ‘첫 사람’으로서 ‘새로운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서 살’ 수 있습니다. 꼭 어느 것을 물려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지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사귈 이웃이 있고, 마음으로 만날 동무가 있는 포근한 보금자리를 찾는다면,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집을 짓고 새로운 꿈을 지으며 새로운 사랑을 지으면 돼요.


  우리가 발을 디딘 곳이 모두 고향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곳이 모두 보금자리입니다. 우리가 손을 뻗는 곳이 모두 삶터입니다.


  눈을 감고 바라봅니다. 눈을 뜨고 바라봅니다. 눈을 감아도 볼 수 있는 사랑을 그리고, 눈을 떠도 꾸밈없이 마주할 사랑을 그립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한결같이 흐를 사랑을 마음 가득 그립니다. 4347.12.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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