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게 남은 자국
책에 글 몇 줄 끄적이면, 이 자국은 책과 함께 고이 흐른다. 책을 장만한 뒤 도장을 찍으면, 이 자국은 책과 나란히 오래도록 흐른다. 책에 자국을 남긴 사람은 서른 해나 쉰 해쯤 뒤에는 이 땅에 없을 수 있다. 책에 도장을 찍은 도서관이나 학교나 시설은 마흔 해나 예순 해 뒤에는 이 땅에 없을 수 있다.
책에 자국을 남긴 사람은 사라져도, 이이가 낳은 아이가 책을 물려받을 수 있다. 책에 도장을 찍은 곳이 없어져도, 다른 곳이 튼튼하게 서서 오래된 책을 이어받을 수 있다. 그리고, 오래된 책도 오래된 사람과 집처럼 조용히 스러지면서 자취를 감출 수 있을 테지.
새로 책 한 권을 장만하면서 맨 처음으로 연필 자국이나 도장 자국을 남긴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이 책에서 길어올리면서 이녁 삶을 가꾸었을까. 스무 해나 마흔 해나 예순 해쯤 흘러 헌책방에서 묵은 책 하나 손에 쥐는 사람은 이때부터 어떤 이야기를 이 책에서 새롭게 느끼면서 이녁 삶을 가꿀까.
내가 손에 쥐는 책에는 내 손자국과 연필자국이 남는다. 내가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움직인 자국이 책마다 고스란히 남는다. 헌책이라 한다면, 자국이 있는 책이라고 할까. 앞사람 자국을 더듬으면서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자국을 남기는 일이 책읽기라고 할까. 왜냐하면, 아무리 ‘빳빳한 새책’을 장만해서 맨 처음으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책은 ‘글쓴이가 먼저 자국을 남긴 이야기’이다. ‘깨끗한 헌책’이란 껍데기만 멀쩡한 책을 가리킨다. 우리가 읽는 책은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일 테니, 앞서 이 길을 걸어간 사람이 남긴 자국을 헤아리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새로운 자국을 보태거나 연다. 4347.12.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