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라보려는 책읽기
책을 왜 읽는가 하고 묻는다면 오직 한 가지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습니다. 누가 나한테 책을 왜 읽느냐 하고 묻는다면 “나는 나를 꾸밈없이 바라보고, 나 스스로 나를 제대로 알아차려서, 내가 이루고 나눌 사랑을 슬기롭게 깨달아, 앞으로 내 삶을 손수 짓고 가꾸는 길로 나아가려는 생각을 찾으려고 책을 읽는다” 하고 말합니다.
나는 남을 헤아리거나 알아내거나 이해하려고 책을 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려주는 말을 듣거나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읽더라도 ‘다른 사람 마음이나 삶이나 넋’을 헤아리거나 알아내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쓴 글과 책을 읽으면 무엇을 알까요? 다른 사람이 쓴 글과 책을 알 뿐입니다. 그저 글과 책을 알 뿐이고, 글과 책에서 드러나는 ‘다른 사람 마음과 삶과 넋’을 살짝 엿볼 뿐입니다.
다른 사람 마음과 삶과 넋을 살짝 엿본대서 다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식물도감’이나 ‘약초도감’이 있습니다. 이런 도감을 보면 풀이나 꽃을 조금 더 잘 알아볼 만하다고 할 텐데, 참말 이런 도감을 보면서 풀과 꽃을 알아차리거나 가릴 수 있을까요? 그림이나 사진으로 찍어서 고작 한두 장 싣는 도감을 보아서는 꽃이나 풀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풀잎과 꽃송이는 모두 조금씩 다르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생김새로만 풀과 꽃을 안다고 해서 풀과 꽃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손수 풀을 뜯어서 먹지 않고서 풀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꽃내음을 맡지 않고서 꽃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풀을 뜯어서 먹으면 몸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알지 못하고서 풀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꽃이 진 뒤 맺는 씨앗이나 열매를 알지 못하고서 꽃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회를 알거나 인문 지식을 얻으려고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문책을 읽든 문학책을 읽든 자기계발책을 읽든, 늘 나를 바라보고 읽고 느끼고 깨달아서 내 삶을 손수 짓는 길로 나아갑니다. 내 삶을 가꾸는 길에서 동무로 삼는 책입니다. 책을 읽어서 역사를 더 잘 꿰뚫어보지 않습니다. 책에 실린 지식을 하나 머리에 담을 뿐입니다. 책을 읽어서 ‘인문정신’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가꾸고 일구고 짓고 보살필 때에 비로소 ‘삶’이 깨어나서 ‘인문정신’이 살아납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아야 나를 압니다. 내가 나를 알아야 내가 걸어갈 길을 압니다. 내가 걸어갈 길을 알아야 오늘 하루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를 압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즐거움과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4347.11.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