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으면서 전진한다 마이노리티 시선 24
조성웅 지음 / 갈무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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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4



누가 아이와 놀면서 살림을 꾸리는가

― 물으면서 전진한다

 조성웅 글

 갈무리 펴냄, 2006.11.13.



  조성웅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물으면서 전진한다》(갈무리,2006)를 읽습니다. 여러 시 가운데 〈도장공의 피 속에 신나기가 흐른다〉를 곰곰이 되읽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아이들 잘 키워보자고 하는 짓인데 / 아이들과 함께 놀아 줄 시간도 없다 / 맞벌이를 해도 보험 적금 아이들 교육비 빼고 나면 / 한 달 살기도 빠듯하다”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이야기는 그동안 숱한 노동자가 읊은 노래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정규직 노동자’가 이런 노래를 읊었다면, 요즈음은 ‘비정규직 노동자’나 ‘하청 노동자’가 이런 노래를 읊습니다. 그리고, ‘이주 노동자’가 이런 노래를 읊습니다.



.. 미친 듯이 밥을 먹다가 마주치는 눈빛들 / 한꺼번에 웃는다 / 이 따뜻함을 몸은 안다 ..  (함께 밥을 먹으면 정이 든다)



  요즈음 ‘정규직 노동자’ 가운데 아이와 놀 틈이 없다고 노래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마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규직 노동자는 ‘예전보다 돈은 많이 벌’되, 아이하고 잘 못 놀리라 느낍니다. 한 주에 닷새만 일하고, 하루에 여덟 시간만 일하더라도, 아이들을 온갖 학원에 보내니 아이들 얼굴을 볼 틈이 없고, 저녁에 일을 마치면 으레 사내들끼리 어울려 술잔을 부딪히니, 막상 ‘돈에 매이거나 근심이 사라지는 자리’에 있어도 아이들하고 안 놀거나 못 놀지 싶어요.



.. 왜 이렇게 닮아 있는지 / 척 보면 하청인지 서로가 안다 ..  (하청노동자들의 마음은 모두 똑 같다)



  공장장은 아이들과 신나게 놀까요? 재벌 우두머리는 아이들과 즐겁게 놀까요? 이사나 사장이나 전무쯤 되면 아이들과 홀가분하게 놀까요?


  대통령이나 장관은 어떠한가요? 시장이나 군수는 어떠한가요? 국회의원이나 의사나 판사나 검사나 이런저런 전문직 사람들은 어떠한가요? 교사나 교수는 어떠한가요?


  곰곰이 돌아보면, 오늘날 한국에서는 하청 노동자뿐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뿐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도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의사도 누구도, 아이들과 놀 틈이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아이들과 놀까요?



.. 울산시 북구 양정동 / 현대 자동차 왕국 담 밖으로 / 현대자동차 현장조직들 간판이 있다 / 노동단체 간판들이 있다 / 정치조직 간판들이 있다 / 유별나게도 이 간판들은 양정동에 밀집했다 ..  (양정 나라)



  유치원 교사도 아이들과 놀지 않습니다. 유치원 교사는 온갖 아이들한테 치이느라 고단하거나 바쁩니다. 유치원 교사는 아이들하고 놀 수 없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유치원에 아이를 넣은 어버이는 ‘영어 빨리 가르치’고 ‘영재 교육 더 많이 시키기’를 바라거든요.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조차 놀 틈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학습’하느라 바쁩니다. 아이들은 ‘학습 진도’를 나가야 하니 놀 겨를을 못 냅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도, 초등학교에서도, 아이들은 언제나 ‘학습하는 수험생’일 뿐입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한국에서는 여느 어른과 아이 모두 ‘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어른과 아이가 놀 틈이 없이, 그저 돈을 버느라 쳇바퀴처럼 하루 스물네 시간을 빙빙 돌아야 합니다.



.. 걸쭉한 오뎅국물을 더 좋아하고 / 통통한 아줌마의 수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좋다 / 오늘도 통통한 아줌마는 부지런히 떡볶이를 고추장에 버무리고 / 튀김을 붙이고 있다 ..  (나를 채우고 기운 것은)



  조성웅 님 시집 《물으면서 전진한다》를 곰곰이 읽습니다. 다른 어느 시보다 이녁 아이와 어울리는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녁 아이와 어울리는 이야기는 몇 대목 없습니다. 아무래도 아이와 살을 부빌 틈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 싶어요. 아이와 눈을 마주칠 틈을 내기 어렵고, 겨우 집에서 다리를 뻗고 쉬는 날에도 ‘책을 손에 쥐느’라 바쁩니다.



.. 풀무질에서 새로 나온 트로츠키의 《노동조합투쟁론》을 읽고 있는데 / 나의 독서를 방해하고 나선 / 내 아들 문성이 / 트로츠키의 《노동조합투쟁론》을 자신의 배에 깔고 / 손으로 뜯고 입으로 빨면서 / 완전히 트로츠키의 《노동조합투쟁론》을 장악해버린다 ..  (문 밖으로 나가는 아이)



  저랑 놀지 않는 아버지한테 다가선 아이는 ‘아버지가 읽는 책을 빼앗’습니다. 마치, 사용주가 노동자 일삯을 가로채는 모습하고 닮습니다. 그런데, 사용주가 노동자 일삯을 가로채면 우리들은 이맛살을 찡그리면서 ‘너 그러지 마!’ 하고 외치지만, 아이가 책을 빼앗으면 빙그레 웃으면서 ‘가만히 지켜봅’니다.


  문득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요, 사용주가 노동자 일삯을 가로채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 주면 됩니다. 다 가지라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공장을 떠나면 됩니다. 일터를 떠나면 돼요. 혼자 가지고 혼자 일하라고 맡긴 뒤 떠나면 됩니다.


  시골 흙지기도 이와 똑같이 정부와 맞설 수 있습니다. 쌀값을 아주 껌값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흙을 일구되, 정부에 ‘곡식을 안 팔’면 됩니다. 이 나라 흙지기가 거둔 쌀은 아주 후려쳐서 사들이겠노라 하는 농협한테 한 톨조차 안 팔면 돼요. 농협은 다른 나라에서 쌀을 사다가 쓰라고 하면 됩니다.



.. 조명된 선동무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 신디사이저와 락 기타 음에 실리는 투쟁가요는 / 더 이상 가슴을 뜨겁게 달구지 못한다 / 연단 위는 누구도 허락 없이 올라가지 못한다 ..  (물으면서 전진한다)



  아이는 놀고 싶습니다. 아이는 놀고 싶어서 아버지 책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책을 만지작거리면서 놀아요. 이때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슬기로울까요?


  네, 아버지는 책을 덮거나 책을 북북 찢어서 종이접기를 하면 슬기롭습니다. 아이와 손을 맞잡고 바깥으로 나가서 마음껏 노래하고 소리지르고 춤추고 뛰놀면 아름답습니다. 아이를 업고 안고 목에 태워서 달리면 사랑스럽습니다.


  ‘조명된 선동무’를 탓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자리에 안 가면 됩니다. 이제부터 그런 자리는 쳐다보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셔요. 우리 아이들과 놀아요. 맞벌이를 해도 교육비가 안 나온다면, 맞벌이를 하지 말고, 아이를 학원에도 넣지 말아요. 아이들이 앞으로 ‘돈만 버는 쳇바퀴’에 빠지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우리가 스스로 열어요. 경제에 기대지 않고, 공장에 매이지 않으며, 도시에 젖어들지 않아도, 아이가 손수 삶을 짓고 가꿀 수 있는 길을, 바로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열어요.



.. 하여튼 고향도 다르고 죄명도 다르고 / 들어온 사연도 다들 구구절절하지만 / 구치소 사람들이 구속된 공통된 사유는 / “사유재산 침범죄” ..  (1.03평 독방에서도 난 꿈을 꾼다)



  공장도 돈도 다 ‘저들이 개인소유’라고 한다면 그냥 혼자 다 갖고 놀라 하면 됩니다. 이러면서 우리는 우리 땅을 조그맣게 마련해서 손수 흙을 가꾸어 밥을 지으면 됩니다. 싱그러운 바람을 마시고, 푸른 나무를 쓰다듬으면 됩니다. 아이와 함께 들을 달리고 숲을 누리면 됩니다. ‘산으로 들어가’는 삶이 아니라 ‘숲을 짓’는 삶으로 바꾸면 됩니다. 아이는 마음껏 놀고, 어른은 기쁘게 일하는, 가장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일구면 됩니다. 쥐꼬리만 한 돈은 아무리 벌어도 그예 쥐꼬리로 그칩니다. 이제 쥐꼬리는 그만 놓고, 이제 쥐꼬리는 붙잡지 말고, 이제 ‘내 삶’을 찾고 ‘우리 삶’을 누려야지 싶어요.


  우리가 저마다 ‘내 삶’을 꼭 열 해만 누려 보셔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공장 있고 돈 있는 이들’은 열 해 동안 다른 나라에서 돈으로 이것저것 사다 먹을 테지만, 열 해 사이에 다른 나라도 바보가 아닐 테니 차츰 비싸게 올려받을 테고, 이제 열 해쯤 뒤면 ‘아무리 공장 있고 돈 있는 이들’도 주머니를 탈탈 털며 빈털터리가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도 아이와 놀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용자와 대통령도 아이와 놀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아이와 놀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학습’시켜서 ‘입시지옥’에 밀어넣는 바보가 아닌, 아이와 기쁘게 놀고 사랑스레 꿈꾸는 ‘사람’이 되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천천히 물으면서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1.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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