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씨앗 책읽기
씨앗 가운데에는 큰 씨앗이 있을는지 모르나, 거의 모든 씨앗은 참으로 작다. 참말 씨앗은 모두 작다. 작디작은 씨앗이 있고, 잘디잔 씨앗이 있다. 아주 티끌과 같다 싶은 씨앗까지 있다. 그런데 조그맣디조그마한 씨앗은 우람하게 자란다. 작디작은 씨앗이 무척 크게 자란다.
씨앗은 새로운 숨결로 태어날 바탕이다. 아주 조그마한 씨앗에는 모든 숨결이 골고루 깃들기에, 이 씨앗이 흙에 안겨 곱게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면, 바야흐로 아름다운 새 빛이 태어난다.
책 한 권을 읽어서 온누리를 다 알 수도 있겠지. 그러나, 책은 모든 것을 한 권으로 다 알도록 이끌지 않는다. 한 권으로도 얼마든지 넉넉하지만, 한 권으로 길동무가 되려고 한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책 한 권을 읽었다면 이 책 하나를 ‘끝냈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 책 한 권을 발판으로 삼아서 내 길을 새롭게 걸어갈 기운을 얻는다는 소리이다.
우리는 ‘읽어치우려’고 책을 손에 쥐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른 기쁨과 웃음으로 일구고 싶기에 책을 손에 쥔다. 성경 한 권을 읽는다고 해 보자. 한 권을 다 읽었으니 끝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으니 다 아는가? 성경 아닌 다른 책도 이와 같다. 첫 줄부터 끝 줄까지 다 읽었으니 잘 아는가? 글쓴이보다 더 잘 아는가?
책을 읽어서 알 수 있는 대목은 오직 하나이다. ‘어느 책 하나를 한 번 읽었다’는 대목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다른 대목은 아직 알 수 없다.
모든 실마리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 모든 실마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끄집어내야 한다. 수십 권이나 수백 권이나 수천 권에 이르는 참고도서를 옆에 놓아야 실마리를 끌어내지 않는다. 참고도서는 한 권조차 없을지라도 내 마음속에서 샘솟는 이야기가 있을 적에 곧바로 알아챌 수 있어야 실마리를 잡는다.
씨앗은 흙에 안겨 자란다. 느티씨를 보았는가? 느티씨 한 톨은 대단히 작다. 그런데, 아기 손톱보다 훨씬 작은 느티씨는 천 해도 살고 이천 해도 살며 삼천 해도 산다. 아주 우람하게 큰다.
편백나무 씨앗은 얼마나 작을까. 소나무 씨앗은 얼마나 작을까. 벚나무 씨앗이나 은행나무 씨앗은 얼마나 작을까. 참말, 우람한 나무는 얼마나 작은 씨앗을 내놓는가. 이 작은 씨앗은 한두 해 살다 죽으려고 깨어나지 않는다. 나무씨는 백 해나 이백 해쯤 살다가 죽으려고 깨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즈믄 해를 살고, 두 즈믄 해나 열 즈믄 해까지도 살려고 깨어난다.
사람은 몇 해쯤 살려고 새로운 목숨으로 깨어나는가? 우리는 고작 백 해만 살다가 죽으려고 깨어나는가? 우리는 무슨 일을 하려고 깨어나서 삶을 꾸리는가? 우리는 무슨 뜻을 이루려고 깨어나서 책을 손에 쥐는가? 우리는 어떤 씨앗으로 태어난 목숨이며, 우리는 어떤 나무로 자라고 싶은 숨결인가? 4347.11.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