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이야기가 재미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는 잡지나 책은 아주 드물다. 아예 없지는 않으나 아주 드물다. 오늘날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나오는 잡지나 책도 거의 모두 ‘도시 이야기’이다. 도시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삶을 넓게 바라보거나 헤아리거나 살피는 책이 퍽 드물다.


  도시에 사람이 많이 사니까, 도시 이야기를 잡지나 책에 담을밖에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도시 이야기를 자주 다룬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을 도시에 길들이거나, 사람들을 도시에 붙잡으려 하거나, 사람들을 도시에 가두려 하려는 ‘숨은 뜻’이 있다고 느낀다.


  시골에 살기에 ‘좋다’는 소리가 아니고, 도시에 살기에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다. 어디에서 살든 스스로 ‘삶을 지으’면 된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스스로 삶을 짓기 무척 어렵다. 손수 텃밭을 일구기조차 매우 빠듯하다. 도시에서 맑은 물을 어떻게 마실까? 도시에서 싱그러운 바람을 어떻게 마실까? 도시에서 별을 어떻게 볼까? 도시에서 꽃과 풀과 나무를 어떻게 만날까? 도시에서 벌나비를 어떻게 마주할까? 도시에서 멧새 노랫소리와 개구리 노래잔치를 어떻게 들을까?


  도시에는 극장이 많다. 도시에는 책방도 있다. 도시에는 도서관이 곳곳에 있다. 도시에는 여러 관광지와 문화시설이 있고, 문화강좌도 많다. 도시에는 대학교가 있고, 갖가지 백화점이나 커다란 할인마트가 많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오직 ‘돈을 벌어서 돈을 쓰는’ 얼거리일 뿐이다. 도시에서는 다리쉼을 할 만한 쉼터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시피 하다. 도시에서는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쉬기도 어렵다.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끝없이 지나가고, 길바닥은 자동차가 아무 데나 서기 일쑤이다.


  온통 갇힌 얼거리인 도시이기 때문에, 이러한 도시에서 살며 글을 쓰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좀처럼 못 쓴다. 왜냐하면, ‘손수 짓는 삶’이 거의 없이 ‘돈을 벌어서 돈을 쓰는 굴레’일 뿐이니, ‘도시에서 살며 쓸 이야기’는 거의 없다고 할 만하다. 있다고 해 보아도 늘 똑같다.


  도시 이야기만 다루는 신문을 보라. 날마다 똑같은 정치꾼과 연예인과 운동선수 이야기가 흐를 뿐이다. 정치꾼이 읊는 말이 좀 바뀌고, 연예인 뒷이야기가 좀 달라지며, 운동선수가 세운 기록이 좀 늘어날 뿐이다. 이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도시 이야기만 다루는 방송을 보라. 날마다 똑같은 풀그림을 시청율과 광고에 목을 매달면서 틀어댄다. 삶을 짓거나 가꾸거나 북돋우는 이야기를 방송에서 다룰 수 없다. 시청율과 광고 때문에 언제나 ‘돈에 얽매이는 풀그림’으로 채울 뿐이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신문·방송이 ‘매체(목소리를 담는 그릇)’ 구실을 못 하거나 안 한다. 그런데,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으레 신문이나 방송에 귀를 기울인다. 무슨 소리를 신문에서 듣는가? 무슨 이야기를 방송에서 마주하는가?


  신문이나 방송은 날마다 ‘새로운 척’하지만, 하나도 새롭지 않다. 그래서 신문과 방송에 젖어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기대는 도시사람은 온갖 정보와 지식은 넘치지만, 하루하루 재미없다. 언제나 따분하다. 새롭다 싶은 정보와 지식은 1초만에 물갈이를 하지만, 정작 마음에 남을 이야기가 없다.


  시골살이라고 해서 ‘더 낫지 않다’고 말하는 까닭이 있다. 왜냐하면, 시골에서 살더라도 농약에 길들거나 기계농에 얽매인다면, 이때에도 아무런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삶을 짓지 않고 ‘공장 농업’이 되고 말면, 도시에서 살며 고단한 굴레하고 똑같을 뿐이다. 게다가, 시골에 있는 거의 모든 초·중·고등학교는, ‘학업 목표’가 ‘도시에 하나라도 더 많이 보내기’이다.


  신문도 잡지도 책도 온통 ‘도시 이야기’투성이라서 재미없다. 도시에서 살더라도 손수 삶을 짓고 일구고 가꾸고 꾸미고 다듬고 북돋우는 이웃이라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오순도순 나눌 텐데, 요새는 ‘인문학 살리기’라면서, 그저 또다른 지식과 정보로 사람들을 새로운 굴레에 가두는 판박이만 흘러넘친다.


  부디, 아름다운 이웃들이 신문과 방송과 책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빈다.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며, 숲과 들과 바다를 바라볼 수 있기를 빈다. 새를 보고, 풀벌레를 보며, 가랑잎을 볼 수 있기를 빈다. 스스로 서는 길을 보고, 손수 짓는 삶을 볼 수 있기를 빈다. 4347.10.2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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