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갑자 복사빛 민음의 시 126
정끝별 지음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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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69



시와 교수님

― 삼천갑자 복사빛

 정끝별 글

 민음사 펴냄, 2005.4.15.



  내가 곁에 두고 사귀는 ‘교수님’이 있는지 곰곰이 돌아봅니다. 아직 나한테는 ‘대학 교수’ 벗이 없습니다. 앞으로 있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학 교수라는 사람을 벗으로 사귀지는 않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소설가였다가 교수가 된 사람이라든지, 어린이문학 비평을 조금 쓰다가 교수가 된 사람이라든지, 동화를 쓰다가 교수가 된 사람이라든지, 이것저것 하다가 교수가 된 사람을 둘레에서 곧잘 보는데, 나는 둘레에서 교수가 된 사람은 웬만해서는 다시 안 만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웃마을에 교수님 한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고흥에서 순천까지 강의를 하러 오갑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교수님이라고 할까요. 강수돌 교수도 시골에서 살며 흙을 만지는 ‘몇 안 되는’ 교수님일 텐데, 이 같은 분이라면 반가우면서 즐거운 벗님이 되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손에서 흙내음이 나거든요.



..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  (늦도록 꽃)



  흙내음이나 땀내음이 몸에 밴 사람일 때에 비로소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흙내음이나 땀내음이 몸에 배지 않고서는 대학교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하고 만날 만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섣부른 소리일는지 모르지요. 어설픈 생각일는지 모르지요. 다만, 내 생각은 뚜렷합니다. 어느 과목을 맡든 어떤 학문을 하든, 어른으로서 아이와 만나는 이라면, 풀과 나무와 꽃과 숲을 언제 어디에서라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 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 변해 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 밥이 쓰다 /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 밥이 쓰다 ..  (밥이 쓰다)



  기저귀를 갈 줄 모르는 사내라면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미역국이나 된장국이나 김치찌개뿐 아니라, 한집 살붙이한테 밥을 차려 주며 함께 누리지 못하는 사내라면 아버지뿐 아니라 어버이가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다만, 가시내도 이와 같아요. 가시내이든 사내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함께 삶을 짓고 함께 삶을 노래하며 함께 삶을 가꿀 때에 비로소 어버이요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느껴요.


  그러니까, 누군가한테 무엇을 가르치려는 사람이라면, 먼저 스스로 삶을 짓고 노래하며 가꾸어야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스스로 새롭게 하루를 맞이할 줄 아는 사람일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라는 아이들은 삶을 배울 노릇이고 삶을 사랑하면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보여주거나 들려주거나 알려준다면, 교사도 교수도 아니라고 느껴요. 이런 이들은, 지식만 다루는 이들은, 그저 지식배달부이지 싶어요. 지식배달부는 지식노동자이고, 지식노동자는 지식 한 줌에서 맴도는 사람들이지 싶어요.



.. 세상 흰빛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 사라지는 누구의 어깨일까 ..  (먼 눈)



  정끝별 님 시집 《삼천갑자 복사빛》(민음사,2005)을 읽습니다. 언뜻선뜻 비치는 고운 빛줄기를 느끼다가도, 자꾸자꾸 드러나는 지식 어린 푸념을 느낍니다. 수수하면서 보드랍게 흐르는 노래를 듣다가도 왱왱거리는 지식 어린 평론을 느낍니다.


  이 느낌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어느새 마지막 시를 읽고 책을 덮습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시는 언제 쓸까요. 시는 누가 읽을까요. 시는 누가 누구하고 나누는 노래일까요.



.. 물만 보면 / 담가보다 어루만져 보다 /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  (물을 뜨는 손)



  시 한 꼭지를 놓고 온갖 비평이나 평론을 붙이는 일이란 덧없다고 느낍니다.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은 문학을 죽이는 짓이라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비평이나 평론은 문학을 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평이나 평론은 언제나 문학을 꽁꽁 가두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일본 제국주의(강점기 무렵) 한자말이나 미국 제국주의(오늘날 경제 식민지) 영어를 들먹이면서 이론과 논리를 갖춘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은 문학을 짓밟기만 한다고 느낍니다.


  왜 문학을 가슴으로 안 읽고 제국주의 이론으로 읽어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왜 문학을 마음으로 노래하지 않고 제국주의 논리에 맞추어 재거나 따져야 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비평가나 평론가가 읊는 글은 노래가 아닙니다. 그래서 비평이나 평론은 전문가 아니면 읽어내지도 못합니다. 아니, 전문가조차 따분하게 여깁니다. 시를 비평하거나 평론한 글을 읽는 시골 흙일꾼은 없습니다. 시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글을 읽는 도시 노동자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가 문학이라면, 문학이 삶이라면, 삶이 노래라면, 어떤 비평이나 평론도 부질없는 노릇이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가리 쪼개는 짓이지 싶습니다.



.. 도둑처럼 밤에 들어 세수를 하려는데 / 여섯 살짜리 딸애 칫솔과 내 칫솔이 / 뭉개진 털을 싸 쥐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 / 빈 낮 내내 딸애가 부둥켜안고 싶었던 거 ..  (밤의 소독)



  대학 교수도 시를 쓰려면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대학 교수도 시를 읽으려면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를 쓸 적에는 아무런 이름이 없어야 합니다. 시를 읽을 적에도 아무런 허울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 쓰는 시입니다. 마음을 열어 맞아들이는 시입니다. 마음이 움직여 노래가 흐르기에 시가 태어나고, 이러한 시가 마음으로 촉촉히 젖어들면서 가락을 입힌 노래로 거듭납니다.


  시를 하든 동화를 하든 소설을 하든, 즐겁게 문학을 하려는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요. 문학은 ‘집’에서 일구는 ‘삶’에서 태어난다고 느껴요. 문학을 하고 싶다면 ‘집’에서 ‘삶’을 노래할 노릇이요, 문학을 더 하고 싶지 않다면, ‘교수’나 ‘교사’가 되어야겠지요. 4347.10.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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