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303) -에 대한 -의 1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복종이라는, 이 거의 모든 사회조직의 근본은 깊이 생각하는

《시몬느 베이유/곽선숙 옮김-억압과 자유》(일월서각,1978) 215쪽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복종이라는

→ 소수자한테 다수자가 복종하는

→ 다수자가 소수자한테 다스리는

→ 몇몇 사람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 수많은 사람이 몇몇 사람을 따르는

 …



  한국말에 ‘-에 對하다’나 ‘-에 對한’은 없습니다. 이 말투는 외국말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갑자기 생겼습니다. 아주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처음 영어를 배우는 어린이조차 이러한 말투에 길들거나 물듭니다.


  이를테면, “숲에 대하여 알아보자”나 “마을에 대하여 알아보자”처럼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어른들이 많은데, “숲을 알아보자”나 “마을을 알아보자”처럼 고쳐써야 올바릅니다. “너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잘못 쓰는 말투예요. “네 이야기”나 “내 이야기”로 바로잡아야 올발라요.


  잘못 쓰는 말투와 새로 쓰는 말투는 다릅니다. 잘못 쓰는 말투가 아무리 널리 퍼졌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말투는 ‘새로운 말투’가 아닙니다. ‘잘못된 말투’일 뿐입니다. 슬기롭게 빚어서 아름답게 쓰는 말투일 때에만 ‘새로운 말투’입니다. 슬기롭지 않고 아름답지 않으며 잘못 받아들여 쓰니 앞으로도 언제나 ‘잘못된 말투’예요. 앞으로 쉰 해가 흐르든 백 해가 흐르든 ‘-에 대하다’와 ‘-에 대한’은 꼭 털거나 씻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 한국사람은 이러한 말투를 제대로 못 느껴요. 그래서 ‘-에 대한 + -의’ 같은 말투까지 생깁니다.


 소수자가 다수자를 다스리는

 많은 사람이 몇몇 사람한테 휘어잡히는


  보기글을 살피면 ‘-에 대한’과 ‘-의’를 함께 쓸 뿐 아니라, 입음꼴로 씁니다. 여러모로 설익은 번역 말투입니다. 이렇게 설익은 번역 말투를 ‘새로운 말투’로 볼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설익은 말투요 번역 말투이며 잘못된 말투입니다. 4337.7.27.불/4347.10.4.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몇몇 사람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이 거의 모든 사회를 이루는 바탕은 깊이 생각하는


‘소수자(少數者)’와 ‘다수자(多數者)’는 그대로 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몇몇 사람”과 “많은 사람”이라든지 “적은 사람”과 “수많은 사람”으로 손질해야 할까요? ‘복종(服從)’은 ‘따르는’이나 ‘좇는’으로 다듬을 수 있고, ‘다스리는’이나 ‘거느리는’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사회조직(-組織)의 근본(根本)”은 “사회를 이루는 바탕”이나 “사회 얼거리 바탕”이나 “사회 얼거리”로 손봅니다.


..



 '-의' 안 쓰면 우리 말이 깨끗하다

 (108) -에 대한 -의 2


불교와 샤머니즘에서는 고통과 시련에 정면으로 맞설 때 지혜가 발현된다고 한다. 나약함은 강인함이 되고 타자에 대한 자비의 원천이 된다

《조안 엘리자베스 록/조응주 옮김-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민들레,2004) 68쪽


 타자에 대한 자비의 원천

→ 남한테 사랑을 베푸는 바탕

→ 이웃한테 사랑을 베푸는 샘물

→ 이웃을 사랑하는 바탕

→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밑바탕

 …



  어떤 생각을 어떤 말마디에 담아서 이웃한테 들려주려 하는지 살펴봅니다. 생각은 아름다우나 말마디는 아름답지 않다면, 우리 이웃은 어떻게 맞아들일는지 헤아립니다.


  “타자에 대한 자비”란 무엇일까요? “타자에 대한 자비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나약함은 강인함이 되고 타자에 대한 자비의 원천이 된다”는 무엇일까요? 어떤 생각을 들려주려고 이와 같이 글을 썼을까요?


  한국말은 ‘남’입니다. 한자말은 ‘他者’입니다. 두 낱말을 나란히 놓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낱말을 골라서 우리 생각을 나타낼 때에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우리는 우리 이웃하고 어떤 낱말을 주고받을 때에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한국말을 바르게 쓰는 일을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라든지 번역 말투를 털어내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국말 바르게 쓰기’는 아닙니다. 쉽게 쓰기도 해야겠지요. 그러나, 쉽게 쓴대서 끝나지 않으며, ‘쉽게 쓰기’란 누구한테 쉽게 쓰겠다는 뜻이 될는지 짚어 보아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이 보기글을 입으로 말해 보셔요.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할매와 할배한테 이 보기글을 종이에 적어 읽혀 보셔요. 자, 이 보기글은 누가 읽으라고 쓴 글인가요? 이 보기글은 도시에서 대학교나 대학원까지 마치고 인문책을 제법 읽은 지식인더러 읽으라고 썼는가요? 그러면, 이런 사람들, 그러니까 인문책 지식이 제법 있는 사람을 빼고는 이런 글은 안 읽어도 되는가요?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라면 대학생만 생각하리라 봅니다.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라면 중·고등학생만 생각하리라 봅니다. 이리하여, 우리 사회에서 흐르는 낱말과 말투는 ‘대학생 말투’와 ‘중·고등학생 말투’가 따로 있다고 할 만합니다. 여느 사람들하고 등을 지는 말투가 자꾸자꾸 퍼지거나 넘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 얼거리입니다. 4337.12.27.달/4347.10.4.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불교와 마을믿음에서는 괴로움과 힘겨움을 똑바로 맞설 때에 슬기가 샘솟는다고 한다. 여린 마음은 굳세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탕이 된다


‘샤머니즘(shamanism)’은 그대로 두어도 될 테지만 ‘토속신앙’이나 ‘마을믿음’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고통(苦痛)과 시련(試鍊)”은 “괴로움과 힘겨움”으로 다듬고, ‘정면(正面)에서’는 ‘맞바로’나 ‘똑바로’로 다듬고, ‘지혜(智慧)’는 ‘슬기’로 다듬으며, ‘발현(發現)된다’는 ‘샘솟는다’나 ‘드러난다’나 ‘나타난다’로 다듬습니다. ‘나약(懦弱)함’은 ‘여림’으로 손질하고, ‘강인(强靭)함’은 ‘억셈’으로 손질하며, ‘자비(慈悲)’는 ‘사랑’으로 손질합니다. ‘타자(他者)’는 ‘남’이나 ‘다른 사람’이나 ‘이웃’으로 고쳐쓰고, ‘원천(源泉)’은 ‘뿌리’나 ‘샘물’이나 ‘바탕’으로 고쳐씁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170) -에 대한 -의 3


스스로에 대한 앎의 요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서 울려 퍼져 왔습니다. 과거의 현인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앎이 없이는 진리에 대한 신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노바 바베/김성오 옮김-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착한책가게,2014) 353쪽


 스스로에 대한 앎의 요구는

→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마음은

→ 스스로를 알려는 목소리는

→ 스스로를 알려는 외침은

 …



  보기글을 찬찬히 뜯습니다. “앎의 요구”란 “알고 싶은 바람”이나 “알고 싶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스스로에 대한 앎의 요구”란 “나 스스로를 알고 싶은 바람”이나 “나 스스로를 알고 싶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말마디를 넣은 글월은 끝자락을 “울려 퍼져 왔습니다”로 맺습니다. 그러니, 이 말마디는 “스스로를 알려는 목소리”나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외침”으로 손보면 한결 잘 어울립니다.


  생각을 차근차근 기울이면 처음부터 알맞고 바르면서 쉽고 즐겁게 글을 쓸 만합니다. 조금 더 생각하셔요. 차근차근 돌아보셔요. 4347.10.4.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스스로를 알려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예전에 슬기로운 사람은 스스로를 올바로 모르면 참을 믿을 수 없는 줄 알았습니다


“과거(過去)의 현인(賢人)은”은 “지난날 슬기로운 사람은”이나 “예전에 슬기로운 사람은”으로 다듬고, “자신(自身)에 대(對)한 올바른 앎이 없이는”은 “스스로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이나 “스스로를 올바로 모르면”이나 “스스로를 올바로 볼 줄 모르면”으로 다듬으며, “진리(眞理)에 대(對)한 신념(信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은 “참을 믿을 수 없는 줄”이나 “참삶을 믿을 수 없는 줄”이나 “참길을 믿을 수 없는 줄”로 다듬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는 “알았습니다”로 손봅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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