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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ㅣ 삶창시선 41
이중기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4년 6월
평점 :
시를 말하는 시 78
시월을 앞두고
― 시월
이중기 글
삶창 펴냄, 2014.6.30.
더위가 한창이던 여름날에 시집 《시월》(삶창,2014)을 읽었습니다. 다 읽은 시집을 한참 책상맡에 두었습니다. 이동안 여름이 저물고 구월로 접어들다가 어느덧 시월을 코앞에 둡니다.
오늘은 구월 삼십일입니다. 하루가 지나면 시월입니다. 달력으로 치면 그렇지요. 그런데, 구월이든 시월이든 들이나 숲은 그대로입니다. 바다와 하늘도 그대로입니다. 달력으로 볼 적에 2014년에서 2015년으로 넘어가더라도 들이나 숲이나 바다나 하늘은 그대로입니다. 온누리는 숫자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지구별도 해도 달도 별도 숫자를 따지지 않습니다.
.. 날만 새면 공출 독촉이 채찍비로 퍼부었다 / 나뭇가지에 걸어 놓은 보릿단에서 / 꼬물꼬물 싹이 나와 질금 만드는 유월 장마에 / 숨긴 보리 꺼내 공출 안 하면 / 오막살이 몰수하겠다고 / 일가족 몰살하겠다며 콩 볶듯이 볶았다 .. (하곡수집령)
2014년 시월은 어떤 달일까요. 봄날 바닷속에 잠긴 애꿎은 아이들을 슬퍼하는 목소리가 아직 사그라들지 못하는 시월일까요. 지난날 슬프게 목아지가 잘리면서 죽은 이들 울음소리가 아직 잠들지 못하는 시월일까요.
한가위가 이른 올해에는 양력으로 치는 달력 숫자가 시월로 넘어가도 가을걷이를 아직 안 합니다. 일찍 심은 논은 군데군데 벼를 베었으나, 퍽 넓은 들은 누런 빛깔로 천천히 물듭니다. 아직 들판은 싯누렇게 물결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도 밥을 먹고 시골에서도 밥을 먹습니다. 도시에서는 쌀을 사다가 밥을 먹고 시골에서는 볍씨를 심어서 가꾸어 거둔 뒤에 밥을 먹습니다. 어디에서나 밥을 먹습니다. 어디에서나 밥을 먹어 목숨을 잇습니다. 그러니까, 도시에서 사람들이 쌀을 사다 먹는다 하더라도, 어딘가에는 시골이 있어야 하고, 논밭이 있어야 합니다. 도시가 아무리 커진다 하더라도 시골은 제법 넓게 있어야 하며, 시골에서 논일과 밭일을 하는 일꾼이 있어야 합니다.
.. 인민위원회 절대다수가 농사꾼들이니 / 농사꾼들이야 작게는 농민조합으로 한솥밥이요 / 크게는 인민위원회와 가마솥으로 한 식군데 / 농민조합은 무시하고 복종만 하라면 / 보소, 그 말에 어디 영이 설 수 있겠소 .. (영천아라리 2)
시골지기가 없으면 도시내기는 모두 굶어서 죽습니다. 시골지기가 땀흘리지 않으면,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교육도 예술도 과학도 모두 무너집니다.
발전소가 없다 하더라도 사회는 무너지지 않아요. 시골이 없을 때에 사회가 무너집니다. 학교가 없더라도 교육은 무너지지 않아요. 시골이 없을 때에 교육이 무너집니다.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흔들거릴까요? 아닙니다. 군대는 없어도 됩니다. 시골이 없을 때에 나라가 흔들거리다가 무너져요.
전쟁무기가 아무리 많아도 나라를 못 지켜요. 군대가 아무리 커도 나라를 못 지켜요. 생각해 보셔요. 군인은 무엇을 먹을까요? 총알을 먹을까요? 폭탄을 먹을까요? 아닙니다. 모두 밥을 먹습니다. 이쪽 군인도 저쪽 군인도 모두 밥을 먹습니다. 제아무리 전쟁통이라 하더라도 밥을 먹을 때에는 전쟁을 그칩니다. 밥을 먹어야 싸울 힘이 나지요.
그러니까, 밥을 얻는 시골을 지켜야 나라를 지킵니다. 밥을 얻는 시골을 잘 건사해야 나라를 지킬 뿐 아니라, 사람을 지키고, 목숨을 지키며, 모든 정치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과 과학과 예술 모두를 지킵니다.
.. 당신이 고등어 껍질로 밥 한 숟가락 싸 먹을 때마다 / 농사꾼 몇 사람이 죽어나간 줄은 아시오? /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소 / 다 내놓고 서울 아들네로 가시오 .. (영천아라리 4)
대통령은 없어도 됩니다. 의사와 판사는 없어도 됩니다. 교사와 교수는 없어도 됩니다. 시인과 소설가는 없어도 됩니다. 운전사와 기술자는 없어도 됩니다. 이런저런 일자리는 하나도 없어도 됩니다. 삽차와 비행기는 없어도 되고, 자동차와 기차는 없어도 됩니다. 시골이 없다면 모두 부질없습니다. 시골지기가 없으면 모두 덧없습니다.
나라가 나아갈 길은 사람들 스스로 밥을 지을 들과 숲을 누리면서 보금자리를 아름답게 가꾸는 삶입니다. 밥을 짓지 못하면 어떻게 살까요? 옷을 짓지 못하거나 집을 짓지 못하면 어떻게 사나요? 그런데, 학교는 무엇을 가르치지요? 인문책음 무엇을 말하지요? 교과서는 어떤 지식을 다루면서 시험문제를 내지요? 대학생이 된 젊은이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살지요?
.. 농사꾼들은 논밭으로 가 읍내가 비워졌을 때, / 대구에서 자갈길 백 리 거침없이 / 미군전술부대가 개망나니 경찰을 데리고 와 / 마구 불 지르고 연행하면서 / 부족마을 테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사흘 만에 칠백오십 명을 끌고 가자 / 그보다 몇 배 많은 사람들이 도망을 쳤지만 / 날 밝으면 체포와 총살은 이어졌다 / 연행이 귀찮으면 아예 심장에다 총알을 박아버리고 / “공산당은 인류의 적이다” / 이 구호로 이념 주입은 장엄하게 시작되었다 / 그리고 짐승의 시간이 오고 있었다 .. (인종 청소기)
시집 《시월》을 조용히 읽습니다. 경상도 영천에서 있던 지난 이야기를 찬찬히 그립니다. 영천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깁니다. 시를 쓴 이중기 님은 영천땅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영천사람한테서 하나둘 들은 뒤 시로 다시 그립니다. 나는 《시월》을 읽으면서, 영천뿐 아니라 다른 고장에서도 엇비슷하게 일어났을 일을 가만히 그립니다. 이 땅 곳곳에서 아프고 슬프며 서러운 이야기가 생채기로 남은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하늘을 믿고 흙을 사랑하며 들과 숲과 흙을 보살핀 시골내기는 왜 목숨을 앗겨야 했을까요. 볏포기를 베고 짚신을 삼으며 지붕을 잇고 오순도순 살림을 꾸리던 시골지기는 왜 보릿고개를 넘기거나 배를 곯아야 했을까요.
흙을 안 만진 땅임자는 왜 배가 불러야 했을까요. 흙을 밟지도 않는 임금이나 신하나 학자는 왜 밥 굶는 걱정조차 없이 살았을까요. 권력과 정치는 무엇이고, 학문과 이론은 무엇인가요. 역사는 무엇을 밝히고, 역사는 누가 누구한테 어떻게 가르치는가요. 땅이란 누구 것이며, 땅은 왜 있을까요.
.. 도망갔다 돌아온 지주들이 제일 먼저 한 짓은 / 경찰서 신축 성금 커다랗게 내놓고 / 못살아서 말 잘 들을 것 같은 몇몇을 불러 / 원하는 땅 힘에 맞게 소작을 준 뒤 / 소작 전부 돌려받는다고 통보해서 / 마을마다 집집마다 마른천둥을 퍼부었다 .. (새벽 북소리)
시월 문턱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썰렁하지만, 해가 높이 솟는 낮에는 덥습니다. 네 살 작은아이가 아버지한테 묻습니다. “아버지, 무화과 없어요?” “무화과 먹고 싶니?” “네.” 소쿠리를 하나 챙깁니다. 작은아이가 들도록 건넵니다. “자, 무화과 따러 가자.”
우리 집 뒤꼍 무화과나무를 살핍니다. 오늘은 열 알을 땁니다. 모레에도 제법 딸 만합니다. 올가을에는 무화과를 실컷 누립니다. 우리 집 무화과는 우리 집 아이들한테 달콤하고 맛난 샛밥이 됩니다.
무화과나무가 있으니 무화과를 얻습니다. 무화과 열매를 따다가 모과 열매를 한 알 줍습니다. 우리 집 뒤꼍 모과나무에서 스스로 툭 떨어진 모과는 되게 큽니다. 아이 머리통보다 살짝 작습니다. 큰아이가 두 손으로 들어도 묵직하고, 작은아이는 무겁다면서 못 듭니다.
능금나무를 심어서 돌보면 능금을 얻고, 감나무를 건사하면서 아끼면 감을 얻습니다. 호박씨를 심어 호박을 얻고, 무씨를 심어 무를 얻어요. 우리는 흙에서 목숨을 얻고, 흙에서 밥을 누립니다. 우리는 흙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삶을 짓습니다.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흙은 괴롭힘이나 따돌림이 없습니다. 흙은 부자한테도 가난뱅이한테도 골고루 밥을 베풉니다. 그러면, 정치나 교육이나 사회나 경제나 문화는 어떠한가요? 모든 사람한테 골고루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가요? 4347.9.3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