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불편’을 받아들이는 사람
요즈음 사람들은 학교를 오래 다니면서 학교에서 짓궂은 이론을 몸에 익히고 만다. 이른바 ‘토론’이라는 허울을 붙이는 버릇이다. 학교에서 벌이는 토론은 언제나 ‘찬성·반대’로 가른다. 둘로 가른다. 온누리 어떤 일도 둘로 가를 수 없으나, 늘 이쪽과 저쪽으로 가르고 만다.
토론이라는 허울을 해 본 사람은 알 텐데, 찬성과 반대로 갈라서 말을 나누면 언제나 싸움이 되고, 실마리를 하나도 풀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토론으로 이루어진다고들 하는데, 토론이란 ‘둘로 편가르기를 하면서 실마리는 얻지 않고 싸움으로 내모는 짓’이기 때문에, 어느 모로 본다면 민주주의란 ‘사람이 임자’라고 내세우지만, 정작 사람이 사람 스스로 깎아내리는 짓이 되는구나 싶다.
실마리를 풀려면 토론이나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실마리를 풀도록 슬기를 모아야 한다. 찬성과 반대로 가를 까닭이 없다. 어느 쪽이 되든 대수롭지 않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마무리를 어떻게 짓든 대수로울 일이 없다. 찬성으로 끝나서 좋거나 반대로 끝나서 나쁘지 않다. 찬성이 되기에 나쁘거나 반대가 되기에 좋지 않다. 어느 쪽으로 마무리를 짓든, 실마리를 풀어서 제대로 길을 여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보기를 든다면, 밀양을 들 수 있을 텐데, 밀양 송전탑을 놓고 찬성과 반대로 갈라서 싸워 보았자 싸움만 될 뿐이다. 송전탑을 꼭 세워야 한다면, 밀양 시골마을을 다치지 않도록 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요즈음은 땅밑 깊이 구멍을 파면서 공사를 하는 솜씨가 있다고 한다. 바다밑에 길을 내려면 땅밑에서만 구멍을 길게 파야 할 테지. 그러니까, 발전소부터 도시까지 송전탑을 잇더라도, 멧자락과 마을 위로 지나가도록 할 노릇이 아니라, 땅밑으로 깊이 파고들어서 송전탑을 이어 주면 된다. 도시에서는 전봇대가 아닌 땅밑에 전깃줄을 파묻는다. 시골마을에 송전탑을 박지 말고, 땅밑으로 깊숙하게 지나가도록 하면 된다. 또는, 밀양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공사법을 찾아서 밀양사람이 받아들일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될는지 저렇게 하면 괜찮을는지 자꾸자꾸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전력과 중앙정부는 밀양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한국전력과 중앙정부는 ‘송전탑 찬성’만 외치는 허수아비가 되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
고속도로도 이와 같다. 아름다운 시골과 숲을 다치지 않도록 하자면, 땅밑으로 깊이 구멍을 파서 곧게 이어 주면 된다. 그런데 어떤 이는 달리 말할는지 모르리라. 이렇게 땅밑으로 깊이 구멍을 파서 이으려면 돈이 많이 든다고. 그러면, 마을과 숲을 몽땅 망가뜨리는 짓을 해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크기’를 돈으로 따지면 어떠한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마을과 숲이 안 무너지게 하려고 싸우는 동안 들어가는 돈은 또 얼마인가?
밀양에 송전탑을 안 짓기로 한다면, 도시에서 자가발전을 하는 틀을 세우면 된다. 자가발전은 돈이 매우 적게 든다. 재생에너지를 쓰도록 널리 퍼뜨리면 유지비도 거의 안 든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토론·논쟁’이 아니고 ‘찬성·반대’가 아니다. 오직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고, ‘실마리’를 찾도록 ‘슬기’를 모아야 한다.
학교를 오래 다니면서 거짓스러운 민주 제도에 잘못 익숙하거나 길들기에 자꾸 찬성과 반대를 나누어 버릇하는데, 이런 버릇이 몸에 붙으면, 사람들은 그만 “진리가 불편하다!”와 같이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만다. 왜 진리가 불편한가? 진리란 또 무엇인가?
한자말 ‘진리(眞理)’는 “참된 이치·참된 도리”를 뜻한다. ‘이치·도리’란 무엇인가 하면 “길”이다. “참된 길”을 한자말로 ‘진리’로 적어서 나타낸다. 한자말 ‘불편(不便)’은 “거북하다·괴롭다”를 뜻한다. 이리하여, ‘진리 불편’을 말하는 사람은 “참된 길이 거북하거나 괴롭다”고 밝히는 셈이다.
참된 길은 거북하거나 괴로울까? 아니다. 참된 길은 거북하거나 괴로울 수 없다. 참되기 때문에 즐거우면서 기쁘며 반가운 길이다. 그렇지만 요즈음 사람들은 참된 길을 거북하거나 괴롭다고 여긴다. 왜 그러한가? 참이 무엇인지 모르고 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참된 길조차 ‘찬성·반대’로 가르는 버릇이 생겨 ‘나한테 좋고·나한테 나쁘고’로 가르기 때문이다. 그 길이 옳고 바르다고 지식으로 알지만, 몸으로는 안 옳고 안 바른 쪽으로 가는 사람이 많은 까닭은, 참조차도 모르지만 옳음과 바름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옳고 바름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옳고 바른 길로 가야지, 그릇되거나 틀린 길로 갈 까닭이 없다. 저쪽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도 낭떠러지로 그대로 나아가서 떨어지는 삶이 아름답거나 즐거울까? 낭떠러지가 아닌 길로 가야 아름답거나 즐겁지 않을까?
우리는 누구나 참된 길로 가야 한다. 참된 길을 가면서, 삶을 즐기고 가꾸며 북돋우는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참된 길을 아주 씩씩하게 잘 나아가리라. 어떤 사람은 참된 길을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 나아가리라. 빨리 간다고 더 낫지 않으며, 천천히 간다고 덜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나아가면 된다.
곧, 우리는 참된 길로 가는 ‘실마리’를 스스로 ‘슬기’를 밝혀서 얻거나 찾아야 한다. 남이 하는 대로 꽁무니를 좇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몸과 마음에 알맞춤하도록 참된 길로 나아가는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살피면 된다.
참된 길이 거북하거나 괴로운 까닭은, 스스로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안 찾기 때문이다. 즐겁게 참된 길로 가는 삶을 찾아야 한다. 남이 찾아 주지 않는다. 스스로 몸과 마음을 써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학교교육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도록 이끌지 못한다. 학교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시험성적 잘 받도록 하는 데에 익숙하지, 스스로 길을 찾아서 배우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다. 이러다 보니, 참된 길을 앞에 두고도 옳거니 그르거니 찬성·반대 싸움을 벌이다가 지쳐서 그만 참된 길이고 뭐고 안 쳐다보고 만다.
참된 길이 아름다운 까닭은 참된 길이 즐겁기 때문이다. 참된 길이 즐거운 까닭은 참된 길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참된 길이 사랑스러운 까닭은 참된 길로 걸어가는 동안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기 때문이다. 4347.9.3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람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