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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 고송, 초송, 신송을 찾아서
장국현 지음 / 시사출판사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191
어떤 사진을 믿겠는가
― 神氣
장국현 사진·글
호영 펴냄, 2008.4.30.
‘금강송’을 사진으로 찍으려 하면서, 가장 큰 금강송 둘레에서 자라던 220년 묵은 작은 금강송을 벤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짓을 몇 차례 했는지 제대로 밝혀지거나 알려지지 않았으나, 법원에서는 세 차례 했다고 말하면서 장국현이라는 사람한테 벌금을 500만 원 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벤 금강송 네 그루는 모두 6000만 원 값을 한다지요. 게다가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금강송을 사진으로 찍은 뒤 수백만 원이나 수천만 원, 때로는 일억 원이 넘는 돈을 받고 팔았다지요.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선보인 《神氣》(호영,2008)라는 사진책을 장만해서 찬찬히 살핍니다. 이녁은 이 나라 여러 멧자락을 사진으로 담거나 아름다운 나무를 사진으로 찍으면서 심부름꾼을 늘 데리고 다닙니다. 그리고, 멧골에서 퍽 오래 머문다고 합니다. 사진 한 장 찍기까지 심부름꾼과 함께 두멧자락에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밥은 어떻게 먹고, 똥은 어떻게 누었을는지 궁금합니다. 깊은 두멧자락에 숨은 모습을 사진으로 담자면 ‘길이 없는’ 곳으로 다녀야 했을 텐데, 길이 없는 곳을 다니면서 ‘길을 어떻게 냈을’는지 궁금합니다. 두멧자락에서 여러 날, 또는 달포 즈음 지낸다고 한다면 천막을 치든 임시로 집을 짓든 해야 할 텐데, 이동안 나무를 얼마나 베었을까요. 겨울에 여러 날 두멧자락에서 묵자면 불을 때야 할 텐데, 불을 피우려고 나무를 얼마나 베었을까요.
장국현이라는 사람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순간포착. 그렇다! 사진은 타이밍의 예술이기도 하다. 변화무쌍한 산의 기후, 그 변화무쌍한 산의 모습 가운데 두 번 다시 없는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야 좋은 산 사진이 된다 … 산만 생각하다 보면 그밖의 다른 것은 잊힌다. 모든 생각이 비워지면 대상과 일체가 된다. 그때 한 느낌이 온다. 그 느낌대로 하면 된다(43쪽).” 하고 말합니다. ‘순간포착’이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진은 어느 한때를 찰칵 하고 찍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어도 언제나 찰칵 하고 한 장 찍습니다. 그런데 여러모로 궁금합니다. 이녁은 ‘큰 금강송’을 가린다고 하면서 ‘작은 금강송’을 베어냈어요. 그러면, 백두산에서든 한라산에서든 사진을 찍을 적에 ‘앞을 가리는 여느 나무’는 어떻게 했을까요?
장국현이라는 사람은 “전문가에 의하면 우리 나라 소나무가 50∼100년 후에는 해충과 지구온난화로 사라질 것이라 한다. 인간이 저지른 환경오염으로 소나무가 이 땅에서 사라지면 우리 후손들도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 된다(137쪽).” 하고 말합니다. 문득 살이 살짝 떨립니다. 사람이 저지른 환경오염 때문에 소나무가 사라진다고 하는 말이 어쩐지 하나도 안 와닿습니다. 사람이 저지른 환경오염에 앞서 ‘비싸게 사고팔 사진 한 장 찍는다면서 나무를 함부로 베어낸 탓’에 먼저 그 소나무들이 사라지지 않으랴 싶습니다. 더욱이, 소나무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서 다른 나무를 함부로 다룰 모습이 너무 선합니다.
사진책 《신기》에서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어떤 분야든 성공의 동력은 열정과 영감이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마음의 힘이 길러져 원하는 것이 현실로 나타난다(63쪽).” 하고 읊는 말은 어쩐지 텅 빈 소리 같습니다. 참말 참답게 애쓰는 사람은 땀방울과 뜨거운 가슴과 사랑으로 뜻을 이룹니다. 마음을 가만히 다스리면서 한 곳으로 모으면 못 이룰 만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쭙겠습니까. 장국현 이녁은 왜 그렇게 나무를 함부로 베면서 나무를 사진으로 찍는지요? 나무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나무를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지요? 국유림이건 국유림이 아닌 곳이건 나무를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하는 매무새로 어떻게 나무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지요? 이녁은 참말 어떤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는지 아리송합니다.
“사진인으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예술가로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나는 소나무를 찾아 이 땅을 헤매고 다닌다. 이는 나의 의무이자 나만이 누리는 권리이자 기쁨. 그러나 사진 소재가 될 만한 나무는 정말 보기 힘들다(117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젓습니다. 아니지요. 아닙니다. 사진으로 찍을 만한 나무가 없을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 찍도록 마음을 쏟지 못했을 뿐입니다. 도시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마시며 콜록콜록 앓는 나무를 사진으로 담아도, ‘사진 찍는 사람 가슴’에 깊고 너른 사랑이 있으면 아름답게 찍습니다. 굴참나무를 찍든 떡갈나무를 찍든 콩배나무를 찍든 아왜나무를 찍든, 사진을 찍는 사람들 가슴에 어떤 숨결이 흐르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더 뛰어난 나무’를 찍기에 사진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더 크거나 더 멋져 보이는 나무를 찍기에 사진이 더 크거나 멋져 보일 수 없습니다. 이름난 연예인이나 배우를 찍으면 사진도 이름날까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입니다.
장국현이라는 사람은 “좋은 소나무를 사진에 담기 위해서 전국을 특히 강원도 지방에 험준한 산에 금강송을 찾으러 다니기 때문에 대단한 소나무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그러나 말할 수는 없다. 두 아름∼네 아름이나 되는 이런 노거송은 살아 있는 국보급이기 때문에 베어내면 안 된다(165쪽).” 하고 말합니다. 문득 무릎을 칩니다. 이녁이 ‘국보급 나무가 있는 곳을 말할 수 없는 까닭’을 어렴풋하게 짚어 봅니다. 나무를 지키려는 뜻에서 말하지 않겠다는 마음인지, 이녁이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서 망가뜨렸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마음인지, 어느 쪽이 참인지 참으로 알쏭달쏭하다고 느낍니다. 이제껏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또 앞으로 어떤 사진을 찍으려 하는지, 참으로 믿을 길이 없습니다. 4347.9.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