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도닷컴> 2014년 9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전라도닷컴> 누리집이 사이버테러 때문에 크게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데, 아무쪼록 하루 빨리 제자리를 찾으면서 다시 기운을 낼 수 있기를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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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도서관 풀내음

― 풀을 생각하는 마음



  1991년에 나온 사진책 《草家》(열화당 펴냄)를 보면, 이제 한국에서 거의 모조리 사라진 ‘풀로 지붕을 인 집’을 잔뜩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사진책을 들여다볼 때마다 어쩐지 마음이 푸근합니다. 오늘날과 대면 없을 만한 것이 있고, 없을 만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풀로 지붕을 인 집이 마을에 가득하던 때에는 무엇이 없었을까요? 바로 쓰레기가 없습니다. 비닐이 없고 농약과 비료가 없어요. 텔레비전이 없고 자동차가 거의 없습니다. 풀로 지붕을 인 집이 마을에 하나도 없다시피 한 오늘날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쓰레기가 있습니다. 비닐이 있고 농약과 비료가 있어요. 텔레비전에 자동차에 에어컨까지 있습니다. 웬만한 집마다 경운기가 있으며, 트랙터나 콤바인이나 짐차까지 두루 있습니다.


  풀로 지붕을 인 집이 마을마다 가득하던 때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바로 개똥벌레가 있습니다. 뱀과 개구리가 득시글거리고, 제비와 박쥐가 있습니다. 꾀꼬리와 뜸부기가 있으며, 사슴벌레·하늘소·풍뎅이가 흔하게 있습니다. 징검다리가 있고 지게가 있으며 무지개가 있어요. 우물과 냇물과 도랑이 있고 미꾸라지와 버들치가 있으며 미리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있습니다. 풀로 지붕을 인 집이 마을에 하나도 없다 할 만한 오늘날에는 무엇이 없을까요? 바로 예전에 있던 거의 모든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없습니다. 노래가 없고 춤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없고 꿈이 없습니다.


  옛날이 오늘날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옛날은 옛날대로 즐거운 삶이고, 오늘날은 오늘날대로 기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옛날과 오늘날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바라보고 느끼면서 알아야지 싶어요. 쓰레기와 비닐과 농약과 비료가 어느 시골에나 그득그득 있는 오늘날에는 참말 아이들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없는 시골에는 노래가 흐르지 않아요. 텔레비전에서 대중노래가 흐르기는 하지만, 시골사람 스스로 일노래와 놀이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기계가 모를 심고 기계가 나락을 거두니, 모심기노래도 나락베기노래도 없습니다. 기계로 풀 모가지를 자르기만 하니 풀베기노래조차 없습니다. 아이들이 없으니 먼먼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아이들한테 물려주던 이야기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없으니 고샅길을 모조리 시멘트로 덮습니다. 아이들이 없으니 들딸기나 멧딸기가 돋아도 잡풀로 여겨 그냥 걷어치웁니다. 아이들이 없으니 버들피리 불 일마저 없어 버드나무를 뭉텅뭉텅 베어 없앱니다. 아이들이 없으니 마을에 큰나무나 숲정이를 두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없으니 논이고 밭이고 농약만 잔뜩 뿌려서 도랑물에 발을 담글 수 없고, 논흙바닥에서 미꾸라지가 살 수 없으며, 다슬기도 없으니 개똥벌레가 살 수 없습니다.


  도시에는 아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시골을 떠난 아이들은 모조리 도시에 있습니다. 그런데 도시에도 아이들이 스스로 노래를 짓지 않고, 어른들 또한 스스로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도시에는 아이도 어른도 많으나, 쳇바퀴를 돌듯이 회사를 다녀서 돈을 버느라 바빠서, 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학원을 뺑뺑이치듯이 돌고 대학입시에 주눅이 들면서 스스로 놀지 않고 서로 어울려 놀 줄 모르며 다 같이 어깨동무하면서 부르던 노래가 싹둑 끊깁니다.


  유월과 칠월과 팔월 내내, 우리 고흥집에서 가까운 천등산 골짜기로 자전거를 달려 나들이를 다녔습니다.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천등산을 세 시간 넘게 기어올라가 꼭대기에 닿기도 했습니다. 두 아이는 골짜기에서 거리낌없이 온몸을 골짝물에 담그며 놉니다. 샛자전거에 앉는 일곱 살 아이는 작은 사진기를 한손에 쥐면서 파란 빛깔 하늘을 찍으며 놀기도 합니다.


  이웃 참깨밭 옆을 지나다가 “냄새가 좋아!” 하면서 참깨꽃에 얼굴을 박습니다. 골짜기에서 갖고 노는 바람이(튜브)를 몸에 끼고 마당을 달리면서 좋다고 웃습니다. 그저 걷기만 해도 즐거운 나날입니다. 풀빛은 푸르니 즐겁고, 하늘빛은 파라니 곱습니다. 다만, 이 멋진 골짜기와 참깨꽃과 숲과 들과 하늘과 풀을 함께 누릴 동무가 거의 없습니다.


  도시로 떠난 어른과 아이는 그곳에서 무엇을 누릴까 궁금합니다. 사진책 《草家》를 들여다보면 1970∼80년대까지 마을마다 바글바글 넘치던 아이들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지붕을 풀로 이었으니, 말 그대로 ‘풀집’이요, 고샅은 흙길입니다. 마당도 흙마당입니다. 흙마당에 흙길인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뛰놀다가 넘어져도 무릎이 깨지거나 이마가 터지지 않습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가득한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걷다가 넘어져도 무릎이 깨집니다. 오늘날 시골에는 흙고샅은 거의 없어요. 오늘날 시골에 그대로 머물며 노는 아이들이 있더라도 시멘트길에서 뛰놀다 넘어지면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릴 만합니다.


  풀을 뜯어서 먹고, 풀잎을 꼬아서 바구니를 엮으며, 풀줄기에서 실을 자아내어 옷을 짓고, 풀피리를 부르면서 놀며, 언제나 풀과 얼크러져 살던 지난날 시골사람은 누구나 ‘풀집·풀밥·풀옷’입니다. 지난날에는 집도 밥도 옷도 모두 ‘풀’입니다. 시골살이란 풀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즈음 시골은 풀을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풀 한 포기만 돋아도 징그럽게 여기거나 지저분하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시골에서 풀꽃놀이를 하는 아이나 어른이 죄 사라집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풀반지와 풀목걸이와 풀머리띠를 하며 노는 풀아이가 없습니다. 사진책 《草家》를 덮습니다. 우리 도서관 책꽂이에 곱게 꽂습니다. 학자님은 학자답게 한자를 빌어 ‘草家’라 적습니다. 사진은 멋스럽게 흑백입니다. 이런 놀라운 사진책이 ‘풀집’이라는 이름을 쓰고, 풀빛이 얼마나 아리따운가를 드러내도록 무지개빛으로 사진을 찍었다면, 예나 이제나 시골빛은 푸르게 해맑은 빛깔인 줄 보여줄 수 있다면, 푸르게 물드는 마음이 사랑스러운 줄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하고 꿈을 꿉니다. 4347.8.1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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