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써도 시이고, 발로 써도 시입니다. 입에 붓을 물고 써도 시이고, 컴퓨터 글판을 두들겨서 써도 시입니다. 어떻게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책상맡에 반듯하게 앉아서 써도 시이며, 졸려서 모로 누운 채 써도 시입니다. 맑은 넋을 기울여 써도 시이고, 졸음이 쏟아져서 몇 줄 쓰다가 잠들어도 시입니다.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하다가 떠올라서 몇 줄 끄적여도 시입니다. 아이와 놀다가 써도 시입니다. 잠든 아이를 무릎에 살며시 누인 뒤 적바림해도 시입니다. 버스나 전철에서 흔들리며 써도 시입니다. 시를 쓸 적에는 어떻게 쓰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함께 나눌 이야기를 노래로 빚어서 담을 수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어깨동무를 할 적에 즐겁게 부를 노래를 글로 엮으면 됩니다. 남호섭 님은 1995년에 《타임 캡슐 속의 필통》을 선보이면서 ‘종이에 쓴 시’가 아닌 ‘컴퓨터로 쓴 시’라고 밝힙니다. 왜 이런 글쓰기를 밝혀야 할까요? 바야흐로 새로운 문명이 찾아왔기 때문일까요? 문명 사회가 되었어도 사람들은 몸에 아기를 담아 몸으로 아기를 낳습니다. 컴퓨터로 글을 쓰더라도 사람들은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며 물을 먹습니다. 인터넷과 손전화가 춤을 추더라도 사람들은 눈빛을 마주하면서 웃고 떠들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시에 담을 이야기는 바로 우리 삶입니다. 우리는 삶을 즐기고 노래하는 이야기를 시로 담으면 될 뿐입니다. 4347.9.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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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캡슐 속의 필통
남호섭 지음 / 창비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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