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제시카 : 하루하루 신기하고 분주한 꼬마 아가씨의 반짝반짝 성장기 - 태어나서 다섯 살까지 여행작가 아빠 엄마가 담아낸 사랑스런 일상들
안영숙 글, 최갑수 사진 / 예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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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85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때에

― 안녕, 제시카

 최갑수 사진

 안영숙 글

 예담 펴냄, 2014.6.25.



  아이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해서 모두 ‘아이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아이를 그리 안 좋아하면 아이 사진을 안 찍고, 아이를 좋아하더라도 아이와 노느라 바빠 아이 사진을 못 찍습니다. 바깥에서 일을 하거나 돈을 버느라 바쁜 탓에 아이와 어울릴 겨를이 없으면 아이 사진을 못 찍습니다. 어쩌다가 말미를 내더라도 ‘늘 가는 곳’에 가서 ‘늘 보여주는 모습’만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버이가 아이를 찍습니다. ‘아이 사진’은 있는데, ‘어버이 사진’은 없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는 모습을 어버이가 찍는 사진은 있으나, 어버이가 아이를 돌보는 흐름을 좇으면서 찬찬히 찍는 사진은 없습니다. 아이를 따사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차근차근 찍는 사진은 있되, 어버이가 아이한테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빨며 몸을 씻기고 옷을 기우며 밥을 차리는 여느 삶을 차근차근 담는 사진은 아직 거의 없습니다.


  전몽각 님이 빚은 《윤미네 집》은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진책입니다. 전몽각 님은 여러모로 바쁜 탓에 아이들과 어울릴 겨를이 거의 없습니다. 여느 때에는 아이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에 집에 돌아오고, 주말에는 고단한 몸을 쉬느라 바쁩니다. 그러나 전몽각 님은 ‘아이가 자라는 결’에다가 ‘아이를 돌보는 곁님(아이 어머니)가 베푸는 숨결’을 골고루 살피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전몽각 님이 찍은 아이 모습은 그리 안 많지만, ‘없는 틈’을 쪼개고 만들어서 ‘아이와 어버이가 함께 자라는 사랑’을 사진으로 아리땁게 엮었습니다.




  최갑수 님이 사진을 찍고 안영숙 님이 글을 쓴 《안녕, 제시카》(예담,2014)라는 사진책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을 달포 즈음 책상맡에 두는데, 우리 집 아이들이 이 책을 들추지 않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윤미네 집》을 방바닥에 펼치면 곰곰이 여러 차례 들여다보는데, 《안녕, 제시카》는 한 번 쓱 보고는 더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달포 즈음 왜 우리 아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가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달포 즈음 지난 오늘 무언가 한 가지 느낍니다. 《윤미네 집》을 들여다볼 적에는 여러모로 재미난 삶과 이야기가 흐릅니다. 《안녕, 제시카》를 들여다볼 적에는 ‘이쁘장한 아이 얼굴과 몸짓’이 나옵니다. 두 사진책은 이런 대목에서 사뭇 다릅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을 보면, 전몽각 님이 이녁 아이한테 ‘이런 모습을 좀 보여주라’ 하면서 바란 끝에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척 보아도 티가 납니다. 그런데, 이런 사진이 ‘나쁘지 않’습니다. 아이는 꽤 고단했을 텐데, 스스럼없이 사진에 찍혀 줍니다. 철이 들고 난 뒤에는 사진에 안 찍혀 주었다 하는데, 어릴 적에 어버이가 바란 사진에는 ‘이야기가 깃들’기에 스스럼없이 사진에 찍혀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안녕, 제시카》가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만, 최갑수 님이 이녁 아이를 찍은 사진에서는 ‘이야기를 느끼기 쉽지 않다’는 뜻일 뿐입니다. 빛과 빛깔과 빛결이 모두 고운 최갑수 님 ‘아이 사진’입니다. 알록달록 이쁘장한 빛이 서립니다. 다만, 사진책 《안녕, 제시카》에서는 알록달록 이쁘장한 빛을 넘어서는 ‘삶을 누리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안영숙 님은 “첫 여행지 남해. 드디어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꽃밭을 떠나기 싫어하는 제시카 때문에 이곳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2011.6.11.).”라든지 “굳이 모종을 옮겨주겠다는 제시카를 말릴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거기가 아니거든(2012.5.2.).” 하는 이야기를 붙입니다. “그네만 타도 행복한 아이(2013.1.11.).”라든지 “교래 곶자왈 산책. 숲은 언제나 따뜻하다(2013.1.29.).” 같은 이야기를 붙입니다. 아마, 이렇게 이야기를 붙이지 않는다면, 이 사진마다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이 사진책을 들여다볼 사람들이 못 알아볼 수 있어요. 사진마다 사진말을 붙여야 합니다. 날짜도 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어요.


  “축구장에서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는 아빠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2013.7.4.).”라든지 “걱정은 어른들의 몫일 뿐이지. 너는 어떻든 반짝반짝 빛나는 하루가 되거라(2013.12.12.).”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똑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없다면, 아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은 두 어른이 어떤 마음인지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이 사진을 왜 찍을까요? 내 아이라서? 아이가 예뻐서? 아이한테 ‘어릴 적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선물하’려는 뜻에서?


  사진을 왜 찍을까요? 내 마음이라서? 사진이 재미있어서? 내가 바라보고 느낀 것을 찬찬히 적바림하려는 뜻에서? 작가라서?





  사진책 《윤미네 집》을 들여다본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손꼽는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랑이라는 마음이 천천히 스며서 깊이 배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안녕, 제시카》를 들여다본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보며 무엇을 생각할까요.


  사진을 찍는 까닭은 ‘사진’이라는 틀을 빌어 이야기를 엮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까닭은 ‘글’이라는 틀을 빌어 이야기를 엮기 때문입니다. 어떤 물건 하나를 건사하는 까닭은, 이를테면 아이가 처음 발에 꿴 신이라든지, 아이가 어릴 적에 입던 치마라든지, 아이가 어릴 적에 쓰던 놀잇감이라든지, 아이한테서 처음 빠진 이라든지, 이런저런 것을 건사하는 까닭은, 이런저런 것에서 이야기가 끝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이요, 이 이야기는 보금자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린 사랑이 따스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유치원에 간 제시카. 선생님은 ‘분리불안’이 생길지도 모르니 잘 살펴 달라고 아빠에게 부탁. 하지만 제시카가 유치원 가고 없는 며칠, 분리불안은 아빠에게 생겼다(2014.5.5.).”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살짝 아쉽습니다. 분리불안을 생각하니 분리불안이 생깁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안 가면 사회성이 없을까요? 사회성이란 무엇일까요? 사회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야 사회성일까요? 날마다 터지는 온갖 사건과 사고를 알아야 사회성일까요? 대통령 이름을 알거나 온갖 물질문명을 누릴 줄 알아야 사회성일까요? 손전화를 쓰고 카드를 쓰며 자가용을 몰 줄 알아야 사회성일까요?


  시골에서 풀내음을 맡으면서 구름을 읽을 줄 아는 아이는 사회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노는 아이는 사회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이들은 어떤 숨결일까요? 아이들은 어떤 빛일까요? 아이들은 어떤 사랑일까요? 아이들은 어떤 노래일까요? 아이들은 어떤 꿈일까요? 아이들은 어떤 삶일까요?


  아이를 찍든 늙은 할매와 할배를 찍든 늘 똑같습니다. 겉모습을 찍기에 사진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몇 가지 모습을 찍기에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찍어야 사진입니다. 마음을 써야 글입니다. 마음을 불러야 노래입니다. 마음을 그려야 그림입니다. “함께 나가지 못한 엄마를 위해 들꽃을 꺾어 온 제시카. 엄마 마음을 헤아려 줘서 고마워. 그 마음 잊지 않을게(2014.5.6.).”와 같은 이야기를 굳이 안 달아도, ‘아, 아이가 꽃을 꺾어 어버이한테 드리려는 사랑이네’ 하고 사진만 보면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유치원 가는 길, 제시카가 꼭 인사를 건네는 나무. 나무야 어제는 잘 잤니(2014.5.14.).” 하는 이야기를 따로 안 붙여도 됩니다. 그저 사진만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이녁이 아이 어버이라면 다 알리라 생각해요. 아이 눈빛만 바라보아도 아이가 무슨 마음이요 생각인지 아는가요, 모르는가요? 아이 목소리만 들어도 아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는가요, 모르는가요? 아이가 웃는 소리를 귀여겨들으면서 얼마나 즐거운가를 아는가요, 모르는가요?


  아이들은 사진 잘 찍어 주는 어버이를 더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저희를 사랑하는 아버이를 마냥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저희를 꾸짖어도 어버이를 믿고 사랑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차린 밥을 그냥 먹습니다. 못 먹을 것인지 먹을 만한지 따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가자고 하는 데에 스스럼없이 따라나섭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버이를 믿고 좋아하며 사랑합니다. 어버이는 어떤가요? 아이들을 언제나 믿고 좋아하며 사랑하는가요? 그렇다면, 어버이가 찍을 ‘아이 사진’은 언제나 한 가지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함께 읽고 나누는 즐거움을 살포시 담으면 됩니다. 아이가 노래를 부를 적에 동영상으로 담아 놓아야, 아이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알지 않아요. 사진기가 없어서 사진을 못 찍어도 돼요. 언제나 우리 가슴에 아이하고 나눈 사랑을 담으면 됩니다. 사진책 《안녕, 제시카》에서 이러한 가슴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는데, 적잖이 아쉽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늘 어버이를 믿으니, 어버이를 믿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니라, 함께 노래하고 놀고 춤추고 얘기꽃을 피우면서, ‘가끔’ 참말 ‘가끔’ 한 장만 남겨 보셔요. 사진기 단추를 누를 겨를에 아이하고 놀다가, 사진기는 딱 2초만 손에 쥐고 찰칵 한 장 찍은 뒤 저리 뒤로 밀어 놓으셔요. 4347.8.1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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