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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가야산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3
배창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75
시골에 없는 시골 아이
― 겨울 가야산
배창환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6.11.20.
아이들이 마당에서 물총놀이를 하기 좋도록 바깥에서 고무통에 물을 받으려고 하다가 개구리를 한 마리 만납니다. 너는 어떤 개구리이니? 너는 처음 보는 개구리로구나. 개구리는 어기적어기적 바깥수도 담을 타고 풀숲으로 숨습니다. 귀여운 녀석이네 하고 한참 쳐다봅니다.
풀밭에서는 풀밭에서 나고 자라는 온갖 이웃을 만납니다. 이를테면, 풀벌레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벌과 나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개구리와 뱀이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풀밭에 작은 새가 둥지를 틀어 살기도 했다지요. 오늘날에는 풀밭에 섣불리 둥지를 틀어서 사는 새가 매우 드뭅니다. 새들도 알리라 느껴요. 사람들이 툭하면 농약을 뿌려대고, 기계를 돌려 풀을 깎으며, 조그마한 터라도 밭으로 삼으려 하니까요.
.. 그 골짜기, 오늘 비까번쩍 자가용들 줄지어 들어와, 화염방사기 같은 걸로 개가죽 그슬어놓고 소주 먹는 저 사람들은, 그 옛날 뉘집 뉘집 자손들일까 .. (그 골짜기)
지구별에 있는 여러 이웃은 저마다 삶이 있습니다. 서로 알맞게 어우러집니다. 누군가를 해코지하려는 이웃은 없습니다. 다만, 벌레와 짐승은 서로 먹고 먹히는 사슬처럼 이어집니다. 사람도 무엇인가 자꾸 먹고 누면서 살아야 하는 얼거리입니다. 우리들이 밥을 안 먹어도 되고, 똥오줌을 안 누어도 된다면, 지구별을 벗어나 드넓은 우주로 거침없이 돌아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밥을 먹어야 하며, 똥오줌을 누어야 한다면 지구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우주에서 밥을 어떻게 찾겠어요. 우주에서 똥오줌을 어떻게 누겠어요. 우리는 이 작은 지구별에서 살아갈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작은 지구별에서 태어나 살면서 꿈을 꾸고 사랑을 합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누구나 알 텐데, 꿈을 꾸는 동안에는 배고프지 않으며 똥오줌이 마렵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도 배고프지 않으며 똥오줌이 마렵지 않습니다. 꿈을 꾸지 않거나 사랑을 나누지 않을 때에는, 배고픔과 똥오줌이 잇달아 찾아옵니다. 꿈을 꾸거나 사랑을 나눌 적에는 마음 깊이 끝없는 힘과 슬기가 샘솟고, 꿈을 안 꾸거나 사랑을 안 나누면 늘 쳇바퀴처럼 빙글빙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합니다.
.. 그 겨울에 눈은 함작, 내렸다 / 도심 빌딩 그늘에 숨은 중앙초등학교 뒤편 담장, 새로 선 포장마차 한 대 / 이름도 좋구나, 이판사판 / 포장 불빛으로 모여든 하루살이 인생들은 자기 일처럼 신이 났다 .. (이판사판의 추억)
학교에 가려고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예방주사를 맞으려고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학원에 다니다가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잘 벌도록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어느 만큼 나이를 먹으면 짝꿍을 찾아 예식장에서 시집장가를 가면서 돈을 거두어들여야 하도록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짝꿍을 찾아 시집장가를 간 뒤 어느 만큼 지나면 아이를 낳도록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자가용을 장만하거나 아파트를 마련하도록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왜 태어났을까요. 우리들은 왜 태어났을까요. 아이들은 왜 살아갈까요. 어른들은 왜 살아가나요.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이 나라에는 끔찍한 입시지옥이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부터 이 나라를 꽁꽁 휘감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교가 아름다운 배움터 구실을 안 하고 입시지옥 구실을 하는 이 나라 얼거리를 차근차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틀림없이 경제개발에 현대문명이 환하게 빛난다지만, 따돌림받거나 괴로운 이웃이 대단히 많습니다. 주머니와 은행계좌에 돈이 엄청나게 쌓이지만, 이 돈을 이웃과 나누려 하지 않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 자루에 든 좁쌀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처럼 / 어둠의 현이 심금을 울리는 장중한 악음처럼 /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저 함성처럼 .. (촛불시위)
살아가는 뜻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죽음이 찾아옵니다. 살아가는 뜻을 생각할 때에는 사랑이 싹을 틔워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살아가는 뜻을 생각하지 않기에 ‘죽을 걱정’에 사로잡혀 자꾸 돈을 더 움켜쥐기만 합니다. 살아가는 뜻을 생각하기에 ‘사랑을 나누는 기쁨’에 웃음꽃을 피우고 춤노래로 하루하루 즐겁습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어른한테 삶이란 무엇이고, 아이한테 삶이란 무엇일까요. 지구별에서 저마다 다르게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한테 삶이란 어떤 꿈이나 사랑일까요.
.. 면 소재지서 10리, 20리 산골에 숨은 / 달창 선학 용암 아이들은 면 소재지 중학교에 오고 / 면 소재지 수촌리 석지 원정 아이들이나 / 읍내 쪽으로 붙은 봉계 소바우 대바우 와룡 아이들은 / 읍내 중학교 가고 // 읍내 성산 경산 예산리 아이들은 / 대구 나가고 .. (썰물)
배창환 님 시집 《겨울 가야산》(실천문학사,2006)을 읽습니다. 배창환 님은 여러모로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저리구나 싶습니다. 시집 첫머리에 술 마시는 이야기가 잔뜩 나옵니다. 술집을 돌면서 아픔과 슬픔을 오래도록 삭히시는구나 싶습니다.
술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는 동안 술을 마실 일은 없겠지요? 시골마을 작은 학교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술이 떠오르지는 않겠지요?
아이들은 술을 안 마십니다. 아이들은 괴롭고 고단해도 술을 안 마십니다. 참으로 대견하고 씩씩합니다. 어른들은 괴롭고 고단하면 술을 마십니다. 왜 그럴까요? 어른들은 왜 이렇게 힘이 없고 슬기가 없을까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해 보셔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어른 스스로 꿈을 새롭게 키우고 사랑을 새삼스레 그려요. 우리가 나아갈 곳은 술집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아갈 곳은 새로운 삶입니다.
.. 흙을 덥썩 안아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 흙이 길러낸 아들딸들을 가르치고 있다 // 흙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라고 / 흙에서 멀리 떠나는 길만이 희망이라고 // 흙의 종아리에 매질하고 있다 / 흙의 가슴에 꽝꽝 못질하고 있다 .. (흙)
사랑이 자라서 노래가 됩니다. 꿈이 자라서 삶이 됩니다. 사랑을 가꾸어 노래를 부릅니다. 꿈을 키워서 삶을 누립니다.
지난날에는 시골에서 사랑을 돌본 사람들 누구나 언제 어디에서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없어도 시골사람 누구나 시인이 되어 노래를 불렀고, 시골사람 모두 소설가가 되어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지난날에는 시골에서 사랑을 가꾼 사람들 누구나 언제 어디에서나 춤을 추고 놀이를 즐겼습니다. 절기마다 철마다 때마다 크고작은 잔치를 마련하던 한겨레입니다. 이웃과 이웃은 서로 돕고 아끼는 사랑이요 너나들이였습니다. 스포츠나 영화나 섹스 따위가 없어도 누구나 즐겁게 어깨동무를 하고 두레를 했습니다.
.. ―선생님, 그땐 다들 힘들었어요 / 아이가 다섯 살이나 된 아이가 말했다 / ―오냐오냐, 내 다 안다 .. (내 생애의 별들)
오늘날 시골에 ‘시골 아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시골에 ‘시골 어른’이 없습니다. 노래하고 노는 시골 아이가 오늘날 시골에 없습니다. 춤추고 일하는 시골 어른이 오늘날 시골에 없습니다. 오늘날 시골에는 농약과 비닐과 기계와 비료와 새마을운동만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도시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참다운 ‘도시 아이’나 아름다운 ‘도시 어른’이 있을까요? 4347.8.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