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말 바로잡기

 (876) 가령 1 : 가령 무엇무엇은


가령 근대계몽기의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기사들은 그 기사를 읽었던 당대인들에게는 ‘시사적’인 것으로 다가왔겠지만

《이명원-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새움,2004) 245쪽


 가령 어떤 신문기사들은

→ 보기를 들어 어떤 신문기사들은

→ 말하자면 어떤 신문기사들은

→ 이를테면 어떤 신문기사들은

→ 그러니까 어떤 신문기사들은

 …



  돌아가신 이오덕 은 ‘가령’이라는 한자말을 퍽 즐겨서 쓰셨습니다. 오랫동안 입에 굳은 말이기에 떨어뜨리기에 어려웠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떠한가요?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도 한자말 ‘가령’은 어릴 때부터 익숙한 낱말일까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러한 말투를 다듬거나 손질하거나 가다듬을 수는 없을까요? 나이든 분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마저 이런 말투 하나 살가이 추스르거나 따스이 덜어내는 몸짓을 보여주기란 힘든 노릇일까요?


 가령 너에게 그런 행운이 온다면

→ 너한테 그런 행운이 온다면

→ 모르지만, 너한테 그런 행운이 온다면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을 놓고

→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글을 놓고

→ 그러니까 다음과 같은 글을 놓고

 …


  한자말이라 해서 낡은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자말이라고 하여 꼭 덜어내거나 고쳐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말사전 말풀이에서 ‘가령’은 “보기를 들어”를 뜻하는 낱말이요 ‘이를테면’으로 고쳐쓰라고 나옵니다. 이는, 이 한자말이 우리 한자말이 아니라 일본 한자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쓸 말이 아니라 일본사람이 쓰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한테는 먼 옛날부터 알맞게 쓰던 말이 있는데, 우리가 뜻하지 않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안타깝게 우리 말투에 스며들어 생각과 삶을 좀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苛令’이란 무엇일까요. ‘家領’은 또 무엇인가요. ‘加齡’은 그야말로 무엇일는지요. 이런 낱말을 한자로 밝혀 적든 한글로 적든 알아들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런 낱말은 왜 한국말사전에 실려야 할까요. 이런 한자말은 한국말을 자꾸 갉아먹지 않나 궁금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한자말 ‘가령’을 우리가 굳이 써야 하는지, 아니면 털어내야 하는지, 또는 우리 깜냥껏 새로운 말투를 더 찾아내고 밝혀내고 캐내면서 우리 말글을 빛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옛날부터 익히 쓰던 우리 말투를 스스로 알뜰살뜰 사랑하면서, 이제부터 새로운 말을 아름다이 갈고닦으면서 일굴 수 있으면 더없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마음을 품으면 달라집니다. 힘을 모으면 새로워집니다. 뜻을 모두면 싱그럽게 거듭납니다. 그러나, 스스로 아무 일을 안 하고 아무런 눈길을 안 두며 아무런 몸짓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예 엉터리 엉망진창 말글이 두루 퍼집니다. 4337.12.23.나무/4342.11.16.달/4347.8.14.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를테면 근대계몽기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글들은 그 글을 읽던 그무렵 사람들한테는 ‘새로운’ 글이었겠지만


‘게재(揭載)된’은 ‘실린’으로 다듬습니다. ‘당대인(當代人)들에게는’은 ‘그때 사람들한테는’으로 손보고, “시사적(時事的)인 것으로”는 “새롭게”나 “새로운 글로”로 손봅니다.



 가령(苛令) : 가혹한 명령이나 법령

 가령(家領) : 한 집안의 소유로 되어 있는 땅

 가령(假令)

  (1) 가정(假定)하여 말하여

   - 가령 너에게 그런 행운이 온다면

  (2) 예를 들어. ‘이를테면’으로 순화

   -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을 놓고

 가령(加齡) : 새해가 되어 나이를 한 살 더 먹음


..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27) 가령 2 : 가령 이렇다고 치자


상대가 수화를 못한다면 어차피 텔레비전 전화는 사용할 수 없다. 가령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아키야마 나미,가메이 노부다카/서혜영 옮김-수화로 말해요》(삼인,2009) 112쪽


 가령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 그러니까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 그러면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 이를테면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 그렇다면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 한번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



  이 보기글을 곰곰이 살펴봅니다. 글월 앞에 따로 ‘그러니까’나 ‘그러면’을 넣어도 되지만, 아무런 말을 안 넣어도 됩니다. 어쩌면, 아무 말을 안 넣어도 앞뒤 글월이 잘 이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글월과 글월 사이에 이음말을 하나 넣으면서 한결 부드럽게 잇는다 할 수 있습니다. 이음말 하나는 조금 더 생각을 기울이도록 이끈다 하겠고, 한동안 숨을 돌리면서 한결 깊이 돌아보도록 돕는다고 하겠습니다.


  이음말을 넣을 때는 느낌말이라 할 만한 ‘자’나 ‘음’이나 ‘그래’나 ‘어디’ 들도 잘 어울립니다. 입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이런저런 말마디가 톡톡 튀어나오는데, 이런 말마디는 이음말 노릇을 잘 합니다.


 자,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음,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그래,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어디,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말을 하듯 글을 쓰면 됩니다. 말하는 투로 글을 적으면 됩니다. 말결을 살려 글결을 북돋우면 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말투와 글투가 뒤죽박죽입니다. 글투가 말투가 되고, 글결이 말결로 옮아가곤 합니다. 말다운 말을 잊거나 글다운 글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말 같은 말을 모르며 글 같은 글을 잃기 일쑤입니다.


  내 삶을 차근차근 돌아보며 내 생각을 차근차근 되짚고 내 말글을 차근차근 보듬어 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을 하나하나 짚으며 내 생각 또한 하나하나 짚고 내 말글을 하나하나 가꾸어 알차게 꽃필 수 있게끔 이끌면 좋겠습니다. 4342.11.16.달/4347.8.14.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저쪽이 손말을 못한다면 어차피 텔레비전 전화는 쓸 수 없다. 그러니까 벙어리가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농인(聾人)’이란 벙어리, 곧 말을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한자말입니다. 우리는 ‘청각장애인’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벙어리’라는 낱말이 듣기에 좋지 않다고 여기며 ‘소리를 듣는 사람’을 가리키는 ‘청인(聽人)’과 마주할 낱말을 지어야 한다면, 이런 한자 말짜임이 한겨레 말짜임을 헤아리면 좋겠어요. 더욱이, ‘청인(聽人)’은 한국말사전에 안 나오는 낱말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낱말보다는 ‘수화(手話)’를 ‘손말’로 새롭게 고쳐서 쓰듯이, 우리 슬기를 빛내어 한결 알맞고 서로한테 반가운 이름 하나 짓는다면 아주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사용(使用)할’은 ‘쓸’로 다듬고, ‘상대(相對)’는 ‘그쪽’이나 ‘저쪽’이나 ‘맞은쪽’으로 다듬어 줍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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