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시 사외보 <책이 열리는 나무>에 싣는 글입니다.
여름호가 진작에 나왔는데
글은 이제야 올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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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33. 제빛을 읽고 제말을 합니다
― 여름에 먹고 마시는 숨결
글에 눈을 뜬 일곱 살 아이는 글이 보일 때마다 읽으려고 합니다. 글을 읽는 아이는 그저 읽습니다. 지식이나 사상이나 철학으로 읽지 않습니다. 아이 눈에 보이는 대로 글을 읽습니다. “2시 20분”이라 적힌 글이 있으면 일곱 살 아이는 “두 시 스무 분” 하고 읽습니다. 아마 여느 어른이라면 모두 “두 시 이십 분”이라 읽겠지요. 일곱 살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녔다면, 또 앞으로 학교를 다닌다면, 이렇게 읽을 수 없으리라 느낍니다. 사회에서는 “2시”를 “두 시”로 읽고 “20분”을 “이십 분”으로 읽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때를 가리키는 숫자를 왜 ‘하나 둘 셋’과 ‘일 이 삼’으로 갈라서 읽을까요? 우리는 왜 이처럼 읽을까요?
요즈음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중국과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는 예전에 “두 시 스무 분”처럼 읽었고, 돈을 셀 적에도 “1달러”를 “한 달러”로 읽었습니다. “2달러”라면? 마땅히 “두 달러”로 읽었어요. 그렇지만 이제 중국과 일본에서도 “두 시 스무 분”이나 “두 달러”처럼 읽는 사람이 많이 사라졌어요. 왜냐하면 중국에도 일본에도 ‘남녘 연속극과 영화’가 많이 퍼졌어요. 남녘에서 쓰는 말투가 중국과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 말투에 스며듭니다.
저는 여덟 살에 처음 들어간 학교에서 때를 “두 시 이십 분”처럼 읽도록 가르칠 적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여쭈었습니다. 왜 그렇게 읽느냐고 여쭈었어요. 1980년대 첫무렵입니다. 그무렵 학교에서 교사는 이런 물음을 바보스러운 말로 여겼습니다. 대꾸할 값어치가 없다고 여기며, 시키는 대로 따르라고만 했어요. 오늘날 학교는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초등학교와 유치원에서 아이들한테 숫자읽기를 가르치면서 어떤 낱말과 말투를 보여주거나 알려줄는지 궁금합니다.
노정임·안경자 님이 쓴 《파브르에게 배우는 식물 이야기》(철수와영희,2014)라는 책을 읽다가 “잎의 모양은 식물마다 다 달라. 우리나라에는 600여 종의 식물이 산다고 알려져 있는데(96쪽).”와 같은 글을 봅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 어른들 말투가 이렇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잎의 모양은 식물마다 다 달라”처럼 말합니다. 어느새 이런 말투로 딱딱하게 굳습니다. 이러한 글은 틀림없이 한글입니다. 다만, 겉보기로는 한글이요, 속보기로는 한국말은 아니에요.
한국말로 옳게 쓰거나 말하려면 “잎은 식물마다 모양이 다 달라”처럼 다듬어야 합니다. 토씨 ‘-의’를 넣어 “잎의 모양은”처럼 쓰는 글은 한국말이 아니에요. 여기에서 더 살핀다면, “잎은 풀과 나무마다 모양이 다 달라”처럼 다듬을 만하고, “잎은 풀과 나무마다 다 달라”처럼 더 다듬을 만해요.
책에 나온 글을 더 들여다보면 “600여 종의 식물이 산다고 알려져 있는데”와 같은 글도 “식물이 600여 종이 산다고”로 다듬어야 알맞습니다. “한 권의 책”이나 “한 잔의 커피”는 한국말이 아니에요. 영어 번역 말투입니다. 한국말로 바르게 가다듬으면 “책 한 권”이고 “커피 한 잔”입니다. “600여 종의 식물”은 한국말이 될 수 없어요. 껍데기만 한글일 뿐입니다. “식물 600여 종”이라 적어야 올발라요. 더 살필 수 있으면 “풀과 나무가 600여 가지”로 다듬고, “풀과 나무가 600가지 남짓”으로 다듬습니다. 이 글월을 통째로 다듬어 “우리나라에는 풀과 나무가 600가지 남짓 있다고 알려졌는데”로 적을 수 있으면, 비로소 옹글다 싶은 한국말이 됩니다.
유월 문턱에 감꽃을 바라봅니다. 감꽃은 오월에 피고 유월에 집니다. 유월에 지는 감꽃은 칠월에 무르익어요. 팔월에는 감알이 어떤 빛이 될까요? 집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으면 날마다 새롭게 감잎과 감꽃과 감알을 살필 수 있어요. 감을 잎과 꽃과 알로 헤아릴 만합니다. 감나무에서 감알을 하나 톡 따서 먹으면, 단단한 씨앗을 봅니다. 감씨예요. 그러니까, 풀과 나무는 네 가지로 묶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잎과 꽃과 알과 씨예요. 더 들여다보면, 잎이 돋기 앞서 싹이 터요. 싹은 씨앗이 흙에 드리운 뒤 바깥으로 내놓는 첫 잎사귀나 줄기입니다. 나무라면 한해살이 아닌 여러해살이인 터라, 싹이 튼다기보다 눈이 터져요. 나무에 있는 눈은 겨울눈이라고 합니다. 이리하여, 풀이라면 ‘싹·잎·꽃·알·씨’로 흐르는 삶이고, 나무라면 ‘눈·잎·꽃·알·씨’로 흐르는 삶입니다.
여름이면 우리들은 밭에서 나는 오이를 먹고 토마토를 먹습니다. 매화알도 살구알도 복숭아알도 노르스름하거나 발그스름하게 영급니다. 오얏알은 아예 빨갛디빨갛게, 빨갛다 못해 검붉게 익습니다. 매화알은 으레 푸른 빛깔일 때에 따서 효소를 많이 담지만, 매화알을 매화나무에 그대로 둔 채 바라보면 노르스름하면서 바알간 빛이 도는 열매로 익습니다. 잘 익은 매화알을 먹으면 ‘매화알이 푸를 적에 따서 효소로 담가 먹는 까닭’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매화알은 매화알대로 맛이 있어요. 다만, 매화알은 살구맛도 오얏맛도 아닙니다.
곧, 매화알은 매화빛과 매화내음으로 매화맛입니다. 살구알은 살구빛과 살구내음으로 살구맛입니다. 눈썰미가 밝은 분이라면, 매화잎과 살구잎과 복숭아잎이 어떻게 다른지 쉬 알아챕니다. 능금잎과 배잎이 어떻게 다른지 곧 알아챌 테고요. 눈썰미가 어둡다면 감잎과 모과잎과 뽕잎을 못 알아봐요. 무화과잎을 못 알아보는 분도 있어요. 다 다른 나무에서 다 다른 잎을 알아본다면, 잎빛과 잎무늬와 잎결을 모두 다르게 읽을 수 있어요. 나무마다 다른 빛과 무늬와 결을 읽는다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적에 ‘오동잎빛’과 ‘마삭줄꽃빛’을 말하거나 ‘능금꽃내음’과 ‘멧딸내음’을 말할 수 있어요. 나무마다 다른 빛과 무늬와 결을 못 읽으면, 숲에서 들려주는 빛을 말이나 글로 담아서 나타내지 못해요.
그나저나 수박은 언제 익을까요? 참외는 언제 익나요? 모두 여름에 익어요. 비닐집에서 키우면 봄에도 수박과 참외를 맛보는데, 해와 바람과 비를 머금는 수박과 참외는 여름빛이 무르익을 때에 제맛입니다. 여름에 여름을 먹는 제맛을 안다면, ‘제빛’을 찾고 ‘제말’을 하며 ‘제삶’을 가꾸는 ‘제길’을 걷겠지요.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읽는 만큼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 살아갑니다. 4347.5.2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