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다 만화가 더 좋아 산하어린이 127
이영옥 지음, 박재동 그림 / 산하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어린이책 읽는 삶 58


 

스스로 좋아하는 삶

― 밥보다 만화가 더 좋아

 이영옥 글

 박재동 그림

 산하 펴냄, 2005.6.22.



  엊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드러누우면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온몸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고 여겨 그대로 곯아떨어졌습니다. 아이들도 곧장 곯아떨어집니다. 아이들한테 부채질을 해 주고 이마를 쓰다듬다가 괜히 미안합니다. 몸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더라도 노래를 부르면 어느새 이런 소리가 사라질 테니까요. 삐걱삐걱 소리가 아닌 보드라운 노랫소리로 내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면, 아이들도 즐거이 꿈나라로 날아갈 테니까요.



.. “재동아, 엄마는 밭에 간다. 아기 혼자 마당에 있으니, 잘 좀 데리고 놀아라.” 어머니가 방에 있는 재동을 향해 외쳤다. “예.” 재동은 건성으로 대답만 하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햇살이 방바닥을 도화지 삼아 넘실거리는 모양이 얼마나 신비한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림 안 그릴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화가님께서 그림을 안 그리다니? 아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장판에는 그리지 말거라.” ..  (11, 15쪽)



  엊저녁 마을 어디에선가 기계소리가 자꾸 들립니다. 마을 할매와 할배는 모두 잠들 때인데, 누군가 늦은 밤에 두어 시간 즈음 기계를 돌립니다. 낮이나 저녁에는 무엇을 하다가 왜 해 떨어진 밤에 기계를 돌릴까 아리송합니다. 그렇게 밤에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었는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밤에 아이들을 재우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가만히 들어 보았습니다. 풀벌레는 몇 가지가 저마다 다른 소리로 우는지 귀를 기울입니다. 풀벌레 노랫소리 사이로 개구리는 몇 마리나 살아남아서 노래를 부르는지 귀여겨듣습니다. 마을마다 농약을 와장창 뿌리기 앞서, 이른여름에는 그야말로 개구리잔치였습니다. 우리 집 풀밭뿐 아니라 마을 모든 논에서 엄청나게 많은 개구리가 우렁차면서 시원하게 노래잔치를 열었습니다.


  마을마다 농약을 뿌리니, 또 항공방제까지 하니, 개구리가 거의 모두 죽습니다. 우리 집 풀밭에만 몇 마리 남지 않았나 싶습니다. 요즈음은 어디를 가도 개구리 노래를 못 들어요. 농약 때문에 죄 타죽거든요.


  밤에 잠을 재우며 아이한테 ‘개구리가 노래하는 소리’를 알려주고 싶지만, 참 어렵습니다. 늘 듣는 소리여야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일곱 살 아이가 문득 아버지한테 묻습니다. “아버지, 왜 책에는 개구리가 개골개골 운다고 나와?” 그러게 말야. 네가 듣기로도 개구리는 ‘개골개골’ 하지는 않잖아?



.. 재동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경상남도의 자그마한 시골마을 모래골이었다. 밤나무들이 울창한 산을 둘러서 있고, 맑은 물줄기가 띠처럼 마을을 감싸고 흐르며, 모래가 솜처럼 부드럽고 폭신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재동은 이 모래골의 앞산과 강가의 모래를 정말 사랑했다 … 해마다 봄이면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려 운동장을 하얗게 덮곤 했는데, 선생님은 반장인 재동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꽃잎을 쓸어 내라고 했다. ‘참 이상해. 어른들은 저리도 아름다운 걸 왜 쓸어 내라고 할까?’ ..  (17, 18쪽)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누릴 적에 환하게 웃습니다. 스스로 안 좋아하는 삶을 누리면 얼굴을 찡그리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가꿀 적에 맑게 노래합니다. 스스로 안 좋아하는 삶을 보내야 하면 노래가 터져나오지 않습니다.


  스스로 좋아서 해야 공부가 됩니다. 대학교에 가야 하거나 시험점수가 높게 나와야 한대서 아득바득 이를 갈면, 오직 한 가지만 남습니다. 미움이 남습니다. 여기에 짜증이 붙습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한 공부로는, 대학교에 들어간들 제대로 대학교를 누리지 못합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하는 공부로는, 높은 점수가 나와도 못마땅합니다.


  우리는 왜 이 땅에 태어났을까요. 우리는 왜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낼까요. 우리는 왜 낮에는 일어나서 움직이고 밤에는 눈을 감고 잠드는가요. 잠을 깨는 아침은 어떤 하루인가요. 어제와 똑같은 날인가요,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삶인가요.



.. 재동은 마음이 무거웠다. 어떤 어른들은 만화라면 무조건 나쁘게만 여기고, 만화방에 드나드는 학생을 불량한 학생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만화방 주인의 아들인 자기가 그런 내용의 포스터를 그려야 한다는 것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선생님 말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 학교에서 소풍 갔다 온 날에는 친구들과 둘러앉아 도시락 먹는 삽화를 넣었고, 시골에 가는 날에는 버스를 운전하는 아저씨나, 고향의 커다란 소나무 아래로 걸어가는 시골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렇게 영화와 만화와 글쓰기에 미쳐 있는 동안 재동의 학교 성적은 완전히 밑바닥이 되고 말았다 ..  (57, 81쪽)



  박재동 님이 걸어온 길을 조곤조곤 밝히듯이 풀어낸 《밥보다 만화가 더 좋아》(산하,2005)를 읽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책은 일찌감치 판이 끊어졌습니다. 무척 멋진 책이라고 느끼는데,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이 책이 오래오래 길이길이 두고두고 읽히기는 어렵구나 싶기도 합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찾아 씩씩하게 한길을 걸어간 사람들 이야기가 한국에서는 좀처럼 못 읽히는구나 싶습니다. 학교 공부가 아닌 삶빛을 찾으려는 사람들 이야기는, 졸업장이 아닌 사랑빛을 찾으려는 사람들 이야기는, 아직 한국에서는 머나먼 이야기일는지요.


  이 책은 판이 끊어졌으나, 박재동 님은 오늘도 만화를 그립니다. 이 책은 이제 도서관과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나, 박재동 님은 오늘도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스스로 가장 즐거운 일을 하면 됩니다. 스스로 가장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삶을 아름답게 가꾸면 됩니다. 스스로 가장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삶을 아름답게 가꾸다 보면, 시나브로 사랑이 환하게 피어납니다.



.. 재동은 멀리 고깃배가 지나가고 갯벌에서 어린 소녀가 조개를 캐는 모습을 캔버스에 옮겼다. 정학 때문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선생님, 그까짓 그림이 뭐냐고요? 그것은 제 인생 전부입니다.’ … 한 달에 한 번씩 우체국에 가서 어머니가 부쳐 준 돈을 찾아 들고 올 때마다, 재동은 그게 어머니의 피와 땀이라고 생각했다 … 미술실을 놔두고 왜 걸핏하면 학생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수업을 하느냐는 불만 섞인 말을 들을 때마다, 재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미술 수업은 미술실에서 그림이나 그리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고 못마땅했다 ..  (98, 112, 122쪽)



  밤이 지나고 새벽이 찾아옵니다. 곧 동이 틀 텐데, 개구리 노랫소리가 외줄기로 울립니다. 어디에서 우는 개구리일까 헤아려 봅니다. 개구리는 어디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난 저녁에 풀개구리 한 마리를 우리 집 섬돌에서 보았습니다. 어제 낮에 참개구리 한 마리를 우리 서재도서관 귀퉁이에서 보았습니다. 우리 집 꽃밭에도 참개구리가 몇 마리 삽니다. 아마 뱀도 한두 마리쯤 우리 집 풀밭에 있을 수 있습니다. 며칠 앞서 골짜기에서 도룡뇽을 한 마리 보았고, 돌 사이를 헤엄치는 가재도 여러 마리 보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가재를 냉큼 건져올려 끓는 물에 넣고 냠냠짭짭 먹었을 테지만, 이제 가재를 잡지 않습니다. 부디 이 가재가 새끼를 많이 거느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걸어가거든요.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길은 ‘푸른 숲’입니다. 아이와 함께 그림놀이를 할 적에 언제나 ‘푸른 숲’을 그립니다. 내가 즐겁게 읽는 책은 으레 ‘푸른 숲’을 다룹니다. 우리 집이 푸른 숲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푸른 숲내음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내 눈빛이 푸른 숲빛으로 해맑을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7.8.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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