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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4.8 - Vol.9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83
예쁘게 찍는 사진 한 장
― 사진잡지 《포토닷》 9호
포토닷 펴냄, 2014.8.1.
사진잡지 《포토닷》 9호를 읽습니다. 대구에 문을 연 ‘아트도서관’ 소식을 짤막하게 읽습니다. 몇 군데 신문에도 아트도서관 소식이 나왔는데, 한국에 사진과 얽힌 책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데가 거의 없는 만큼, 이러한 소식은 짤막한 기사가 아닌 깊이 들여다보는 취재로 다루면 한결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호에서는 짤막하게 다루었지만, 다음 호에서는 아트도서관을 찬찬히 이야기하는 글과 사진을 다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잡지이기에 사진과 얽힌 여러 가지 소식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진상을 받은 이들 소식이 나오고, 사진전시회 이야기가 흐릅니다. 눈여겨볼 만한 작가들 이름과 작품을 보여줍니다. 아무래도 사진잡지이니 사진 이야기와 사진가 소식을 다룰 수 있어야겠지요. 그러면, 사진 이야기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사진가 소식은 무엇을 다루어야 ‘사진가 소식’이 될까요.
“정경자(40)의 사진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느낌 있는 사진’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는 말랑말랑한 감성 그리고 뭔지 모를 슬픔이 그녀의 사진 곳곳에 묻어 있다(김소윤/42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정경자 님 사진을 ‘느낌 있는 사진’이라 말하는데, 우리가 보는 모든 사진에는 ‘느낌이 있’습니다. 느낌이 없다면? 느낌을 못 받는다면? 이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진에는 빛이 있습니다. 빛을 느끼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빛을 못 느끼는 사진이 있다면? 사진을 읽으면서 빛을 못 느낀다면? 이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사진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담는 사진이요, 이야기를 읽는 사진입니다. 사진에서 이야기를 느끼거나 읽을 수 없다면, 이때에도 사진이 아니라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사진을 읽는 사람 가슴속에 느낌이나 빛이나 이야기가 없다면, 사진을 찍은 이가 아무리 느낌과 빛과 이야기를 담았더라도 제대로 드러나지 못할 수 있어요. 사진을 찍는 사람 못지않게 사진을 읽는 사람도 느낌과 빛과 이야기를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창작(찍기)과 비평(읽기)은 서로 나란히 느낌과 빛과 이야기로 어우러진 사랑입니다.
“때로는 사진이 작가를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의 작품을 보며, 과연 ‘본다는 것’은 무엇일지 골똘해진다(최연하/58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잡지이기에 언제나 ‘보기(바라보기)’를 생각합니다. 사진이란, ‘보고 느껴서 찍으며 이야기를 빚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 사진을 읽을 적에는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어떤 이야기로 빚으려고 사진을 찍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 사진을 읽을 때에는 저 사람이 어떤 꿈을 어떤 노래로 엮으려고 사진을 찍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바라보고, 사진을 마주하면서 사람(찍은 사람과 찍힌 사람)을 마주합니다.
“세피아 톤은 촛불에 그슬린 과테말라 성당의 벽면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마야인들이 나무껍질로 만든 종이가 시간이 지나면 세피아 톤과 비슷한 색상으로 변해 간다(루이스 곤잘레스 팔마/67쪽).”와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사진은 눈을 떠서 찍으며, 사진은 눈을 떠서 읽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진을 바라볼 적에 무지개빛, 까망하양, 이렇게 두 갈래를 살피는 한편, ‘다른 결’, 그러니까 ‘세피아 톤’이든 무엇이든 생각합니다.
빛결에는 어떠한 숨결이 깃들까요. 세피아 톤을 마음에 담는 이녁은 어떠한 이녁 숨결을 사진 한 장에 살포시 담아서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까요. 사진을 찍을 때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지개빛을 쓰지는 않는가요. 사진을 찍으며 넓게 돌아보지 않고 까망하양을 쓰지는 않는가요.
사진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무지개빛이 감돌면, 까망하양으로 사진을 찍어도 언제나 무지개빛이 살포시 드러나면서, 이 사진을 읽는 이들도 무지개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까망하양과 같은 기운이 서리면, 무지개빛으로 사진을 찍어도 늘 까망하양 기운이 그윽히 나타나면서, 이 사진을 읽는 이들도 까망하양을 느끼곤 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알아보자면 첫째는 사진촬영을 위해 앵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국유림의 나무를 무단으로 잘라낸 사진작가 장국현에 관한 것이다(곽윤섭/73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알아보니, 장국현이라는 분이 ‘금강송’을 사진으로 찍는다면서, 가장 큰 금강송(대왕송) 둘레에서 자라는 다른 금강송(신하송), 이를테면 220년을 묵은 금강송까지 베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금강송은 네 그루에 6000만 원, 그러니까 한 그루에 1500만 원이라는 값을 한다는데, 금강송을 열한 그루를 베어낸 장국현이라는 분한테 법원은 500만 원 벌금을 내라고 했다고 해요. 그리고, 장국현이라는 분은 취재기자한테 “이제 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고 말했으며, 이분은 금강송을 찍은 사진을 한 장에 400∼500만 원에 팔았다고 합니다.
쓸쓸한 이야기입니다. 쓸쓸하면서 슬픕니다. 장국현이라는 분은 어떤 사진을 찍고 싶어서 이처럼 몹쓸 짓을 했을까 싶은데, 이녁이 신문사나 방송사와 만나서 하는 말을 들으면 스스로 ‘잘못했다’고 느끼지는 않는구나 싶습니다. 어쩌다 ‘들통이 나서 법원에 갔고 벌금을 내는구나’ 하고 느끼지 싶습니다.
이녁이 사진을 찍는 솜씨가 대단하거나 훌륭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찍는 넋이나 몸가짐이나 마음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 싶습니다. 재주가 있다고 해서 남을 해코지해도 되지 않고, 솜씨가 있다고 해서 엉터리 짓을 해도 되지 않습니다. 보기에 그럴듯한 그림을 빚는 일이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이야기를 짓는 사진을 선보일 때에 사진찍기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한다. 사생활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잘 다져져야 그것을 사진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것 같다(장유진/77쪽).”와 같은 이야기를 함께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이야기’를 잘 할 노릇입니다. 나 스스로 나를 바라볼 적에 옳고 바르며 아름답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이웃과 마을과 지구별을 바라볼 적에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눈빛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눈길(바라보기)을 다스릴 때에 비로소 사진으로 삶을 풀어내리라 느낍니다.
가만히 보면, “보자기 뒤집고 쓰고 찍는 게 무슨 예술이냐며 사진을 천대하고 예술로 인정 않는 세력과 투쟁해 온 40년의 시간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정작 내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었어요. 95세에 처음 개인전을 여는 작가는 세계에서 제가 아마 유일할 거예요(이명동/103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아직 한국에서는 사진이 예술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라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지 못하던 한국 사회에서 삶을 꾸리고 사진을 찍은 터라, 나무 한 그루를 찍으려고 다른 나무를 수없이 몰래 베는 일이 되풀이될는지 모릅니다. 삶을 가다듬지 않고 사진만 찍을 때에는 삶도 사진도 제 빛을 못 찾을는지 모릅니다.
사진은 예쁘게 찍을 노릇입니다. 빛을 예쁘게 담을 뿐 아니라, 마음을 예쁘게 가누면서 찍을 노릇입니다. 사진으로 찍을 이웃을 예쁘게 마주할 뿐 아니라, 사진을 찍는 내 삶을 예쁘게 돌볼 노릇입니다.
“앵글도 좋고, 노출도 정황했다고 편집장이 타고난 사진가라고 말해 줘 얼마나 우쭐했었는지. 운이 좋았겠지만 말이다. 노을이 질 때 다시 찍으면 좋겠다고 해서 아침 첫차를 타고 다시 내려가 하루 종일 건물을 노려보고 있다가 노을이 질 무렵 소중한 한 컷을 담아서 올라왔다. 그 사진이 그 달의 잡지에 실렸다.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 프리랜스 사진가로 다시 ‘건축과 환경’의 사진을 찍으면서 잡지를 통해 내 사진의 색을 만들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김용관/114, 116쪽).”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읽습니다. 김용관 님은 풋내기인 이녁한테 ‘좋은 말’만 들려줄 뿐 아니라, 풋내기가 찍은 사진을 잡지에 덜컥덜컥 실으면서 기운을 북돋운 선배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김용관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어 보면, 김용관 님 둘레에서 ‘이 사람이 어떤 일에든 바지런하면서 알뜰하더라’ 하고 느낀 뒤에 사진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사진을 배운 적이 없으나, 사람됨이 바르고 예쁘겠구나 싶어, 덥석 사진기를 맡긴 셈이라고 할까요. 사진을 찍는 솜씨나 재주는 앞으로 차근차근 키우면 되니, 무엇보다 ‘사진을 마주하는 넋’이 튼튼히 서도록 둘레에서 이끌었다고 할까요.
아무래도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란에서 개발독재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깊은 질곡, 어두운 이면에 왜 정작 사진을 찍은 사진가는 부재한가(진동선/122쪽)?” 하고 외칠 수밖에 없으리라 느낍니다. 온갖 아픔과 수렁과 굴레와 쳇바퀴가 그득그득 이어진 한국 사회입니다. 올곧게 한길을 걸어간 사진가를 찾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진가뿐 아닙니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쓴 사람 가운데, 대학교수를 하거나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맡은 사람 가운데, 공무원이 되거나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 가운데, 어두운 나날을 슬기로운 빛을 밝히면서 걸어간 사람을 얼마쯤 손으로 꼽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아이들한테 거친 말을 하지 않으며, 아이들을 대학입시 노예로 몰아세우지 않은 여느 교사는 그야말로 드뭅니다. 그러나, 지난날에는 지난날대로 너무 벅차고 힘들었으니, 올곧게 한길을 걷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어요. 안타깝지만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 참모습입니다. 옛모습은 털고, 이제부터 새로운 넋이 되어 한길을 올곧게 걸어가면 됩니다. 옛사람이 얽매였던 수렁이나 굴레는 살며시 내려놓고, 오늘을 가꾸는 우리들이 새로운 빛을 가꾸면 됩니다.
“화각과 화질과 해상도가 더 나은 사진을 얻으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진을 찍는 우리들은 왜 ‘더 나은 사진을 얻으려’고 해야 할까요. 우리들이 찍을 사진은 ‘더 나은 사진’이어야 할까요. 그래서 ‘세계 사진 역사’에도 이름을 걸쳐야 ‘사랑받는 사진가’가 될는지요. ‘매그넘 회원’이 되거나 ‘외국에서 전시회를 열’거나 ‘외국 사진잡지에 소개되’거나 ‘사진 한 장에 제법 비싸다 싶은 값을 받고 팔아’야, 어깨에 힘을 줄 만한 사진가가 될 만할는지요 …… ‘인기 사진가’라 손꼽을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그야말로 ‘인기 사진가’입니다. 다만, ‘인기’를 얻는 사진가일 뿐입니다. 인기를 얻는다고 해서 이분들 사진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사랑스럽거나 따사롭거나 착하거나 참답지는 않습니다 …… 마음이 있는 사람은 사진기를 처음 쥔 날에도 사진빛을 느낍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진기를 쉰 해 넘게 쥐었어도 사진빛을 느끼지 못합니다 …… 작가 대접을 받아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최종규/151∼153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오늘 우리들이 이곳에서 아름다운 넋이 되어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가가 되려는 사진이 아니라, 작품으로 비싸게 팔려는 사진이 아니라, 내 마음을 살찌우고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웃는 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나저나, 사진잡지 《포토닷》 9호 첫머리에 실린 “아이들을 꼭 귀엽게 촬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다 귀여운 것도 아니다. 부모에게조차 자신의 아이는 항상 귀엽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아이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아이들은 귀엽기만 하다는 ‘편견’에 반기를 든다. 그래서 그 사랑스럽고도 얄밉기도 한 아이들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담아 부모와 어른들은 ‘미운 7살’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고, 또 아이들은 그 표현에 부합하는 몫을 충실히 해내면서 성장해 간다(이철승/32쪽).”와 같은 이야기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합니다. 이야기가 어쩐지 얄궂습니다. 아이들을 꼭 귀엽게 찍을 까닭이 없다는데, 아이들을 귀엽게 안 찍을 까닭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귀여움’이란 바라보는 사람이 느끼는 마음입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귀엽게 느꼈으면 귀엽게 찍으면 됩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안 귀엽다고 느꼈으면 안 귀여운 그대로 찍으면 됩니다.
이철승 님은 “모든 아이들이 다 귀여운 것도 아니다” 하고 말하는데, 모든 아이들이 왜 다 안 귀여울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귀엽지 않다면, 아이들 탓일까요? 아이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이들이 안 귀여울까요? 아이들을 착하고 참답게 사랑하지 않을 적에 아이들이 안 귀여운 모습으로 ‘끔찍한’ 모습이 되지 않나요?
아이들을 어머니 아버지가 살뜰히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종일반으로 집어넣고, 집에서 아이들과 놀아 주지 않다가, 초등학교뿐 아니라 온갖 학원에 몰아넣고서는, 어느덧 대학입시 노예가 되도록 닦달하는 오늘날 우리 어른들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이 나라 아이들은 ‘미운 일곱 살’ 소리를 듣습니다.
왜 아이들이 미운 일곱 살이 되어야 할까요. 아이들이 미운 일곱 살이 되도록 닦달하거나 몰아붙인 우리 어른들 모습을 제대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학원에 얽매이고 텔레비전에 길들며 문제집과 교과서 숙제에 짓눌리는 아이들은 일곱 살이 아닌 열네 살에도 ‘죽은 얼굴’입니다. 그렇지만, 즐겁게 뛰놀고 마음껏 노래하는 아이들은 일곱 살이건 열네 살이건 ‘살아서 숨쉬는 얼굴’입니다.
《포토닷》 9호에 최연하 님이 “작가의 작품을 보며, 과연 ‘본다는 것’은 무엇일지 골똘해진다” 하고 들려준 이야기처럼, 우리는 우리 사회를 제대로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 모습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내 모습을 제대로 보고 이웃 모습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어른을 제대로 보고 아이들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사람을 재거나 따지면 그릇된 길로 갈 뿐입니다. 아이들을 아이들 결대로 바라보고, 아이들 숨소리와 눈빛을 사랑스럽게 북돋우는 길로 함께 걸어가지 않는다면, 거의 모든 여느 사진가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미운 일곱 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장국현이라는 분은 나무를 함부로 베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만, 제주섬 오름에서 사진을 찍던 김영갑 님은 라면스프 하나를 며칠 동안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면서 오름과 하나가 되고 비바람하고 한몸이 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온갖 장비를 이끌고 찾아가야 놀랍거나 멋진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장비는 사진기 하나만 있어도 됩니다.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이웃하고 한마음이 되고 한몸으로 움직일 때에 아름다운 빛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예쁜 넋일 때에 예쁜 빛이 우리 앞에 환하게 솟아납니다. 4347.8.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