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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 ㅣ 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 1
이루리 지음 / 북극곰 / 2014년 6월
평점 :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04
그림책으로 삶을 읽기
― 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
이루리 글
북극곰 펴냄, 2014.6.18.
개구리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두 아이를 재웁니다. 한여름입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함께 자리에 눕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속삭이며, 나긋나긋 노래를 부릅니다. 내가 두 아이를 눕히고 들려주는 이야기와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같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와 노래를 들려주면서도 내 마음속에서 흐르는 빛은 늘 다릅니다.
곰곰이 생각하지요. 왜 날마다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같은 노래를 부르는데에도 늘 다른 느낌일까 하고.
아이들 팔다리와 몸을 천천히 주무릅니다. 오늘 하루 개구지게 뛰논 만큼 팔과 다리와 온몸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듯이 천천히 주무릅니다. 긴 밤 푹 자고 일어나서 새롭게 맞이할 아침에 다시금 기운을 내어 즐겁게 뛰놀기를 바라면서 주무릅니다.
아이들 몸을 다 주무르고 두 아이 사이에 드러누워 기지개를 켠 다음 노래를 부르면, 이 노래는 늘 내 마음에 먼저 스며드는구나 싶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아이들한테 노래를 들려주는데 왜 내 마음에 먼저 스며든다고 느낄까요.
지난 일곱 해를 돌아봅니다. 아마 지난해에는 지난 여섯 해를 돌아보았을 테고, 그러께에는 지난 다섯 해를 돌아보았을 테지요. 이듬해에는 지난 여덟 해를 돌아볼 테고요. 아이하고 부르는 노래는 아이가 마음으로 담기를 바라는 빛이면서, 나 스스로 이 아이들과 살아가는 동안 마음으로 담기를 바라는 빛입니다. 내가 날마다 새로 맞이하는 아침은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새로운 하루요 나한테도 새로운 하루입니다. 스스로 입으로 읊는 말은 스스로 가슴에 담는 생각이 되면서, 스스로 가장 밝은 꿈을 심는 셈입니다.
.. 생명이 고귀한 까닭은 무엇보다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누군가의 엄청난 노고와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형제도 친구도 모두 인간의 운명을 함께 나눌 친구입니다 … 마치 동물들이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숲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별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작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가 《눈 오는 날》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 (19, 87, 417쪽)
아이들한테 자장노래를 들려주다 보면, 나는 어느새 곯아떨어집니다. 두 아이를 모두 재우고서 조용히 일어나 글을 쓸 생각이지만, 늘 아이들보다 살짝 일찍 곯아떨어집니다.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새 똑 끊어지더니 먼저 숨을 고르게 쉬면서 잠들면 이윽고 따라서 잠듭니다.
때때로 큰아이는 자다가 소리를 지르며 일어납니다. 뭔가 하고 옆에서 화들짝 놀라 일어납니다. “모기 있어.” 한 마디를 하며 이불을 끌어당깁니다. “아, 그래. 모기.” 엄청난 꿈이라도 꾸었나 하고 놀란 마음을 달래면서 빙그레 웃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입니다. 어디 모기 소리가 들리나.
모기 소리가 들리면 옆방 불을 켭니다. 팔을 옆으로 뻗습니다. 모기야 모기야 내 팔에 내려앉으렴. 모기는 앵앵거리면서 내 팔이 아닌 아이들 몸 가운데 구석진 데에 내려앉으려고 합니다. 나는 모기 소리를 찾아 이리저리 살피며 내 팔이나 다리를 다시 뻗습니다. 이제 모기가 내 팔이나 다리에 내려앉으면 몇 초쯤 기다립니다. 그러고 나서 세차게 찰싹.
한 차례에 잡히는 모기가 있고, 열 차례 넘게 쳐도 안 잡히는 모기가 있습니다. 오늘 밤은 어쩐지 모기 한 마리가 안 잡힙니다. 한 마리하고 한참 실랑이를 합니다. 그러나 모기는 끝끝내 잡히기 마련입니다. 마지막으로 찰싹 내리쳐서 잡았는가 싶더니 이불에 톡 떨어집니다. 얼른 모기를 줍습니다. “자, 모기 잡았어.” 하고 큰아이한테 말합니다. 큰아이는 다시 깊이 잠듭니다. 손에 쥔 모기는 아직 안 죽었습니다. 통통한 모기 한 마리가 바들바들 떠는 기운을 느낍니다. 손가락으로 꽉 눌러서 죽이려다가 차마 죽이지 못합니다. 부엌에서 물을 틀어 개수구로 모기를 빠뜨립니다.
.. 치히로의 언어는 산문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이며 어린아이가 들려주는 속삭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치히로의 그림에는 스케치가 없습니다. 실존하는 만물이 그렇듯이 말이지요. 치히로는 수채화 물감의 농담만으로 사물과 인물의 입체감을 살립니다. 또한 여백을 최대한 활용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어 버립니다 .. (56, 129쪽)
아버지로서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누린 삶을 이야기하는 《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북극곰,2014)을 읽습니다. 돈을 벌려고 애쓰는 아버지는 많지만, 아이와 그림책을 읽으려는 아버지는 드문데, 이루리 님은 아이하고 도란도란 그림책을 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와 그림책을 누리면서 ‘아이한테만 읽히기에는 많이 아쉬운 작품’이 많다고 느껴, 이렇게 ‘아버지 이웃’을 비롯해서 ‘어버이 이웃’ 누구하고나 나누고 싶은 그림책 이야기를 조곤조곤 펼칩니다.
마땅한 이야기이지요. 그림책은 아이만 누리는 책이 아닙니다. 그림책은 아주 어린 아이부터 누리는 책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그림책을 읽으면서 삶을 맛보거나 헤아리거나 돌아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만 읽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부터 읽는 책입니다.
만화책도 이와 같아요. 아이들만 보는 책이 만화가 아닙니다. 아이들도 쉽게 알아듣거나 알아차릴 수 있게끔 이야기빛을 베푸는 책 가운데 하나가 만화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어린 아이들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엮은 책이 그림책인 터라, 그림책은 ‘가장 쉬운 인문책’입니다. 그림책은 ‘가장 너르거나 깊은 역사책’입니다. 그림책은 ‘가장 사랑스럽거나 즐거운 이야기책’입니다.
.. 레이먼드 브리그스가 이렇게 그림책에 대한 통념을 깨뜨릴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근본적인 동기를 늘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람은 원래 별처럼 아름답고 자유롭고 즐겁게 태어난 게 아닐까요 … 아침 햇살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납니까?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본 기억은 언제입니까?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지는 해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적은 있나요 .. (139, 218, 321쪽)
어느 책을 읽더라도 우리들은 삶을 읽습니다. 그림책에서든 만화책에서든 어른문학에서든 늘 삶을 읽습니다. 책을 빚은 사람들이 이룬 삶을 책을 읽으면서 느낍니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만나는 삶은 ‘사랑’과 ‘꿈’입니다. 왜 사랑과 꿈인가 하면, 어른으로서 아이한테 물려줄 만한 삶은 언제나 사랑과 꿈이기 때문입니다.
아이한테 돈을 물려주어야 할까요? 아이한테 과학기술이나 전쟁무기를 물려주어야 할까요? 아이한테 총칼이나 탱크나 전투기를 물려주어야 할까요? 아이한테 골프장이나 발전소나 공장을 물려주어야 할까요? 아이한테 자가용이나 고속도로나 시멘트를 물려주어야 할까요? 아이한테 아파트나 국회의원 자리나 부동산을 물려주어야 할까요?
어른이 아이한테 물려줄 것은 예나 이제나 사랑과 꿈입니다. 아이가 어른한테서 물려받을 것은 이제나 예나 꿈과 사랑입니다. 그림책은 한결같이 사랑과 꿈을 노래합니다. 그림책은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과 꿈을 보듬습니다. 그러니까, 그림책을 읽는 어버이는 아이와 나눌 사랑과 꿈을 읽으려는 사람이요,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을 적에는 어버이 스스로 새롭게 가꾸거나 일굴 사랑과 꿈이 어떠한 빛인가 하고 되새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이라는 책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대목이 곳곳에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치히로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몹시 불친절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놀랍게도 독자들은 토토의 마음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56쪽).”와 같은 글월인데, ‘몹시 불친절하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을 제대로 읽는다면, 또는 어린이 눈높이로 읽는다면, 또는 사랑과 꿈이라는 눈길로 읽는다면, 이때에도 ‘몹시 불친절하게 보일’까 궁금합니다. 이와사키 치히로 님이 빚은 그림에 “귀를 기울이면 놀랍게도” 토토가 어떤 마음인지 느낄 수 있다고 이루리 님 스스로 덧붙입니다. 곧,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은 ‘몹시 불친절’한 그림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천천히 차근차근 가만히 읽으면 마음 깊이 환하게 피어오르는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그림을 바라보면서 섣불리 ‘몹시 불친절’하다는 투로 말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울는지 글쓴이 스스로 되새겨야지 싶어요.
왜냐하면, 그림책은 똑같은 틀로 굽는 붕어빵이 아니에요. 그림책은 다 다른 작가가 모두 똑같은 줄거리나 얼거리로 짜야 하는 붕어빵이 아닙니다. 붕어빵을 같은 틀로 구워도 다 다른 맛이 나기 마련인데,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을 바탕으로 다 다른 사랑과 꿈을 보여주는 그림책이 다 다른 빛일밖에 없어요.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어버이라면, ‘마음을 활짝 열고 다 다른 빛’을 넉넉히 끌어안으면 됩니다.
한편, “얼핏 보면 원작 《슈렉》은 영화 〈슈렉〉보다 과격하고 비교육적입니다. 하지만 그림책 《슈렉》은 지금까지도 할리우드 제작자들을 포함한 모든 독자에게 평생 철학적인 숙제를 던지며 성장하고 있습니다(265쪽).”와 같은 글월은 앞뒤가 어긋납니다. 아니, 그림책을 읽으면서 ‘과격’이라느니 ‘비교육적’이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있는지 아리송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곧바로 “철학적인 숙제를 던지며 성장”한다고 덧붙이니, 더더욱 어수선합니다. 사람들한테 생각을 깊이 하도록 이끄는 그림책이라면 ‘교육을 하는’ 그림책이지 ‘비교육적’ 그림책이 아닙니다.
아버지로서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일은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림책을 만날 적에 ‘제도권 사회를 만들고 이 틀을 붙잡으려는 어른으로서 바라보는 눈길’은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은 어느 누구도 제도권 틀이 없어요. 아이들은 어느 누구도 금을 긋지 않고 편을 가르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제도권 틀이나 금긋기나 편가르기를 보여주거나 가르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이들한테 사랑과 꿈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면서 물려주기를 바랍니다.
이 그림책은 이렇게 즐기고, 저 그림책은 저렇게 즐길 수 있기를 바라요. ‘교육’이나 ‘교훈’이나 ‘감동’이라는 이름도 모조리 내려놓고, 그림책을 그림책으로서 마주하면서 이 책들마다 서린 빛을 읽을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으로 삶을 읽습니다. 이웃이 누리는 삶을 읽고, 동무가 가꾸는 삶을 읽으면서, 내가 아이하고 새롭게 가꾸는 삶을 읽습니다. 사랑으로 삶을 가꾸고, 꿈으로 삶을 짓는 슬기로운 눈빛을 그림책에서 만날 수 있기를 빌어요. 4347.7.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