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는 마음
누군가한테 무엇을 물으려 할 적에는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내 생각을 ‘심어’서는 안 됩니다. 물으려 했으니 물어야지요. 누군가한테 무엇을 묻는다고 할 적에는 서로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녁 눈길과 마음을 먼저 듣고 나서, 나는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말할 노릇입니다.
“바다에 오니 좋지?”와 같은 말은 묻는 말이 아닙니다. “바다에 오니 어때?”와 같은 말이 묻는 말입니다. “그 사람 참 나쁘지?”와 같은 말은 묻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 어때?”와 같은 말이 묻는 말입니다.
아이들한테 “너는 어머니가 좋아? 아니면 아버지가 좋아?” 하고 말한다면, 이런 말도 묻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좁은 틀에 가두는 덫일 뿐입니다. 아이들 마음을 알고 싶다면 “너는 어머니 어때? 아버지는 어때?” 하고 말해야지요. 묻는다고 하는 사람이 ‘생각한 지식’을 심으려 할 때에는 서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도 거북하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실마리를 풀지 못합니다.
묻는 마음은 알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물을 적에는 언제나 실마리가 함께 태어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은 나쁘지요?” 하고 말한다면 이 말은 이대로 끝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좋지요?” 하고 말할 때에도 이 말은 이대로 끝입니다. 더 없습니다. ‘나쁘다’나 ‘좋다’는 말로 스스로 못을 박으면서 읊는 말이니 아무것도 새롭게 태어나지 못합니다.
“전쟁은 무엇인가?”라 말하거나 “사랑은 무엇인가?”라 말할 때에 비로소 생각이 자랍니다. 전쟁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거나 살피면서 생각이 자랍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스스로 돌아보거나 되새기면서 생각이 큽니다.
제대로 물을 수 있어야 제대로 바라봅니다. 제대로 묻지 못한다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제대로 묻는 마음이란, 제대로 삶을 가꾸려는 마음입니다. 제대로 묻는 몸가짐이란, 제대로 길을 찾으면서 빛을 밝히려는 몸가짐입니다.
“삶은 좋은가, 또는 나쁜가?” 하고 못을 박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못을 박는 일은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삶은 무엇인가?” 하고 스스로 물으면서, 스스로 삶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나한테 삶은 무엇이고, 내 이웃한테 삶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생각해야 제대로 압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못박기(가치판단·정의·규정)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전쟁은 나쁘다”와 같은 말은 지식(죽은 기록)은 될 수 있어요. “사랑은 좋다”와 같은 말도 지식(죽은 종교)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이 되는 말은 생각을 낳지 않으니, 왜 ‘나쁘거나 좋은가’를 깨닫지 못한 채 머릿속에 가득 쌓입니다. 왜 ‘나쁘거나 좋은가’를 알아차리지 못하기에, 스스로 전쟁이나 사랑과 마주했을 적에 이것이 어떻게 나쁘거나 좋은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바르게 바라보지 못해요.
꽃은 무엇일까요? 숲은 무엇일까요? 도시는 무엇일까요? 농약은 무엇일까요? 남이 적어 놓은 ‘죽은 지식’에 기대어 머릿속을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삶일 때에는 하루가 어떻게 찾아올까요.
스스로 생각하면서 바라보아야 해요. 스스로 생각하면서 바라보고 느껴야 해요. 스스로 하루를 새롭게 빚어야 해요. 언제나 오늘을 새롭게 맞이하면서 삶을 가꿀 수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날마다 스스로 물어야지요. 날마다 스스로 삶을 묻고 사랑을 물으면서 이야기를 길어올려야지요. 4347.6.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