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언제나 곧게 잇는 삶



  오늘날 시골에서 삼월이 되면 무엇을 할까요? 사월이 되거나 오월이 되면, 또 유월이 되거나 칠월이 되면 무엇을 할까요?


  오늘날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분이라면, 또 오늘날 시골에서 늙은 어매와 아배가 흙일을 하는 분이라면, 달마다 무엇을 하는지 알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시골에서는 다달이 그 달에 맞게 ‘농약을 골라서 뿌립’니다. 일본 영화 〈기적의 사과〉를 보면, 일본에서는 능금밭마다 헛간에 ‘달마다 뿌릴 농약 일람표’를 붙이고는 이대로 척척 농약을 뿌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굳이 일본 영화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다 알 만합니다. 한국에서도 능금밭이건 배밭이건 포도밭이건 달마다 뿌리는 농약이 골고루 있어요. 어느 열매는 스물 몇 가지 농약을 친다 하고, 줄이고 줄여도 열 몇 가지 농약을 쳐야 한다고도 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우리가 먹는 열매는 능금이나 배나 포도는 아니지 싶어요. 우리가 먹는 알맹이는 딸기나 수박이나 참외가 아니지 싶어요. 우리는 온갖 농약을 먹고, 갖가지 항생제를 먹으며, 수많은 비료를 먹는구나 싶어요.


  유월로 접어든 시골에서는 모내기로 바쁩니다. 그러나 ‘모내기가 바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시골에서는 손모를 내지 않고 기계모를 내기 때문입니다. 모를 심는 기계를 타는 일꾼하고 ‘모심개(이앙기)’라는 기계만 바쁩니다. 기계로 논을 갈고, 기계로 논을 삶으며, 기계로 모를 심는 오늘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시골에서는 오월이든 유월이든 논노래를 듣지 못합니다. 오늘날 시골에서는 오월과 유월에 귀가 찢어지도록 시끄러운 기계 소리만 듣습니다. 게다가 시골 할배는 으레 경운기를 몹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어서 들일을 가는 시골 할배는 아주 드물어요. 소를 몰며 들일을 하려는 시골 할배는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도날드 홀 님이 쓴 글에 바바라 쿠니 님이 그림을 그린 《달구지를 끌고》(비룡소,1997)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97년에 나왔고, 미국에서는 1979년에 나왔습니다. 이 그림책은 지난날 미국 시골에서 ‘시골사람’이 달마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를테면, “4월에 농부가 깎아 두었던 양털 한 자루. 농부의 아내가 베틀로 짠 숄. 4월에 농부가 깎은 양털을 물레에 자아 털실을 만들고, 그것을 베틀에 짠 숄이지(4쪽).” 하고 이야기해요.


  그림책 《달구지를 끌고》는 책이름 그대로, 깊디깊은 숲속에서 살아가는 네 식구 가운데 ‘아버지’가 달구지에 짐을 잔뜩 싣고 도시로 물건을 팔러 다녀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네 식구는 한겨울에는 단풍나무 단물을 얻어서 졸이고, 삼월부터 시월까지 바지런히 온갖 일을 합니다. 달에 맞는 일을 합니다. 철에 맞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네 식구는 일을 하며 힘들다거나 고되다거나 지겹다고 여기지 않아요. 그저 이녁 스스로 삶을 누립니다.


  먹을 만큼 거둡니다. 먹고 남는 것을 달구지에 싣고 도시에 내다 팝니다. 가만히 따지면, 숲집에서 살아가는 네 식구는 굳이 도시에 가지 않아도 돼요. 열흘에 걸쳐 천천히 걸어서 도시로 가고, 다시 열흘에 걸쳐 천천히 걸어서 시골 숲집으로 돌아오는데, 도시에서 사오는 물건이란 기껏 ‘사탕 한 꾸러미’입니다. 무쇠솥 한 벌, 주머니칼 하나, 바늘 몇을 더 장만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굳이 도시까지 나가서 사지 않더라도 시골 숲집에서 스스로 만들 수 있습니다.


  “농부의 가족 모두가 만든 양초. 아마 섬유로 짠 리넨 천. 농부가 직접 쪼갠 널빤지. 농부의 아들이 부엌칼로 깎아 만든 자작나무 빗자루(6쪽).”를 달구지에 싣고 나가서 판다고 해요. 농사꾼 아저씨는 도시로 나가서 달구지에다가 소까지 모두 팔고 맨몸으로 돌아온다고 해요.


  아하, 그렇군요. 어린 소가 자라니 늙은 소는 도시에 파는 셈이로군요. 시골살이에 알맞게 살림을 줄인 셈이로군요. 숲살이에 걸맞게 살림을 도시 이웃한테 나누어 준 셈이로군요.


  도시에서 지내는 사람은 ‘단풍나무 단물’을 손수 졸여서 먹을 수 없습니다. 도시에는 나무도 없고 나무를 벨 수도 없으니, 시골사람이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은 널빤지를 사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양배추나 감자를 심을 땅이 없으니, 시골사람이 심어서 거둔 양배추나 감자를 사다가 먹어야 합니다.


  참말 도시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참말 도시사람은 시골사람 없이 어떻게 먹고살는지 궁금합니다. 시골에서 시골사람이 흙을 일구어 곡식과 열매를 거두지 않으면, 도시사람은 모조리 굶겠지요. 대통령도 굶고 시장도 굶어요. 공무원도 굶고 회사원도 굶어요. 의사도 판사도 교수도 학자도 기자도 모두 굶어야 합니다. 도시에서 아무리 내로라하고 으쓱거린다 하더라도, 시골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밥을 안 먹고 살 수 있는 도시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오늘날 한국은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봅니다. 한국에서 시골지기는 어떤 대접을 받고, 한국에서 도시지기는 어떤 곳에 우뚝 서서 시골지기를 내려다보거나 깔보는지 헤아려 봅니다.


  한국에서 정치를 하는 이들은 시골지기한테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자유무역협정을 맺습니다. 한국에서 행정을 하는 이들은 시골지기한테 한 마디도 듣지 않고 쌀값을 세우고 농협을 거쳐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거두어들입니다. 한국에서 경제개발을 하는 이들은 시골지기한테 한 마디도 여쭙지 않고 4대강사업을 밀어붙입니다.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할는지요. 경제성장은 얼마나 해야 할는지요. 공장은 얼마나 지어야 할는지요. 고속도로와 발전소는 언제까지 늘려야 할는지요. 왜 자꾸 아파트만 때려지어야 할는지요.


  언제나 곧게 잇는 삶이 아니라면, 삶빛이 피어나지 못합니다. 날마다 새로우면서 언제나 곧게 잇는 삶이 아니라면, 삶꽃이 돋아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람을 마십니다. 우리는 모두 물을 들이켭니다. 우리는 저마다 밥을 먹습니다. 우리는 늘 햇볕을 쬡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흙을 밟습니다. 그렇지만, 학교와 사회와 방송과 인터넷과 책에서는 ‘바람·물·밥·해·흙’을 옳게 보여주거나 바르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스스로 어떤 삶을 일구면서 아이들한테 어떤 꿈을 물려주는지 아리송합니다.


  “3월이 되자, 농부의 가족은 단풍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끓이 끓여 졸여서 단풍나무 설탕을 만들었어(32쪽).” 하고 이야기하는 그림책을 살며시 덮습니다. 우리는 삼월에 하는 일과 유월에 하는 일을 얼마나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4347.6.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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