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보탑을 줍다 창비시선 240
유안진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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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56



시와 숟가락

― 다보탑을 줍다

 유안진 글

 창비 펴냄, 2004.10.15.



  숟가락 하나만 있으면 밥을 먹습니다. 네 식구가 숟가락 하나로도 밥을 넉넉히 먹습니다. 숟가락 하나로 네 사람 입이 즐겁습니다. 서둘러 먹지 않는다면, 넷이서도 숟가락 하나로 얼마든지 기쁩니다.


  숟가락 하나로 밥을 풉니다. 숟가락 하나로 국을 뜹니다. 숟가락 하나로 반찬을 집습니다. 아이들은 숟가락질을 기다립니다. 어른도 숟가락질을 기다립니다. 몸을 살찌우고 새로운 기운을 북돋우는 밥 숟가락을 서로 나눕니다.



.. 나는 늘 사람이 아팠다 /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 아프고 아파서 ..  (내가 가장 아프단다)



  마실을 다니면서 수저를 챙깁니다. 어른 몫 수저는 따로 안 챙깁니다. 두 아이 수저를 챙깁니다. 집에서 쓰던 수저를 잘 건사해서 가방에 넣습니다. 이웃집으로 찾아갈 적에 이웃집에 아이가 있으면 ‘아이가 쓸 만한 작은 수저’가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밥집에는 아이가 쓸 만한 작은 수저가 없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른이 있거나 눈썰미가 밝은 어른이 있거나 아이를 아끼거나 사랑하는 어른이 있는 바깥밥집이 아니라면, 아이가 쓸 만한 작은 수저를 두지 않습니다.


  더 헤아려 보면, 아이가 쓸 만한 작은 수저를 두는 바깥밥집은 아이가 먹을 만한 덜 짜고 안 매우며 덜 달며 안 시큼한 밥이나 국이나 반찬을 마련합니다. 아이가 쓸 만한 작은 수저를 안 두는 바깥밥집은 어른이 먹을 만한 밥만 차리기 마련인데, 어른 가운데 맵거나 짜거나 달거나 시큼한 것을 못 먹는 사람을 못 헤아리기 일쑤입니다.



.. 벌건 대낮에 도깨비를 기다린다 ..  (도깨비를 기다리며)



  요즈음 아이들은 풀을 잘 못 먹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풀을 먹어 본 일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젖먹이 아기라면, 어머니가 풀밥을 즐겨먹어야 풀맛을 압니다. 왜냐하면, 풀밥 먹는 어머니한테서는 풀내음이 감도는 젖이 나오거든요. 풀밥을 먹던 어버이는 젖떼기밥을 마련할 적에 풀죽을 쑬 수 있습니다. 풀죽을 쑤는 어버이는 풀물을 갈아서 아이한테 먹입니다. 풀물을 갈아서 먹이는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풀물을 마시고, 날풀을 뜯어서 먹습니다. 아이가 혼자서 수저를 쥐고 밥을 먹을 즈음, 아이는 어버이와 함께 즐거이 풀밥을 먹습니다.


  아이들이 먹는 밥이란 늘 어버이와 먹는 밥입니다. 아이들이 먹는 밥이란 집과 마을과 학교에서 늘 어른들과 먹는 밥입니다. 아이들이라서 밥가리기를 하지 않아요. 모두 어른들이 시킵니다. 아이들이라서 소시지나 과자만 즐기지 않아요. 아이 곁에서 어른들이 소시지나 과자를 즐기니까 아이들 입맛이 달라져요.


  아이들은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만들지 않습니다. 어른이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만듭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내민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받습니다. 어른이 만든 캐릭터 상품을 아이들이 받습니다. 어른이 만든 도시나 시골에서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랍니다.



.. 그러나 그는 / 그를 버린 세상 어디서나 핀다 / 태양보다 태양다운 외로움의 이름 / 빈센트 반 고흐 / 는, 해바라기꽃 이름이다 ..  (고흐 꽃)



  어른이 날마다 마시는 바람을 아이도 날마다 마십니다. 어른이 늘 마시는 물을 아이도 날마다 마십니다. 어른이 날마다 보는 바깥모습을 아이도 날마다 봅니다.


  어른이 두 다리로 걷기를 즐기면, 아이도 두 다리로 걷기를 즐깁니다. 어른이 노래와 춤을 즐기면, 아이도 노래와 춤을 즐깁니다. 어른이 맑은 눈망울로 온누리를 따사롭게 바라보는 사랑을 펼치면, 아이도 맑은 눈망울로 온누리를 따사롭게 바라보는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물려받으면서 기쁩니다. 사랑을 물려받으며 기쁜 아이들은 이윽고 새롭게 가꾼 사랑을 이웃한테 돌려줍니다. 꿈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꿈을 이웃한테 돌려주고, 웃음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웃음을 이웃한테 돌려줍니다.



.. 내 하늘은 이 오두막이야, 우리집이야, 마당 쪽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까르르 밀려왔지요 ..  (선녀의 선택)



  유안진 님이 빚은 시집 《다보탑을 줍다》(창비,2004)를 읽습니다. 유안진 님은 길에서 다보탑을 줍습니다. 유안진 님은 이녁 아이한테 다보탑을 물려줄 만합니다. 다보탑을 물려받은 아이는 이웃한테 다보탑을 돌려줄 수 있겠지요.


  유안진 님은 이녁 어머니 말씀을 돌이키고, 어릴 적 숟가락을 되새기며, 날마다 늙는 이녁 몸을 곱씹습니다. 이리하여, 이 모든 넋과 숨결이 고스란히 싯말 하나로 태어납니다.


  즐겁게 웃을 적에는 즐겁게 짓는 웃음이 시로 태어납니다. 슬프게 울 적에는 슬프게 짓는 울음이 시로 태어납니다. 삶이 고스란히 시가 되고, 시는 다시 삶이 됩니다. 사랑이 그대로 시가 되며, 시가 다시 사랑이 됩니다.



.. 우물가엔 구기자나 향나무를 심어야, 그윽한 물맛으로 우물과 사람이 함께 편안하다면서, 쓰고 난 물로 토란을 키우셨지 ..  (어머니의 물)



  어떤 삶이 아름다울까요. 아니, 삶을 아름다움으로 나눌 수 있을까요. 이렇게 흐른 삶이라면 아름답고 저렇게 흐른 삶이라면 안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랑이 빛날까요. 아니, 사랑을 빛으로 가를 수 있을까요. 이 사랑이라면 안 빛나고, 저 사랑이라면 빛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유안진 님은 유안진 님대로 웃고 노래하면서 살아온 나날을 시로 그렸으리라 느낍니다. 유안진 님이 바라보고 마주하며 부대낀 대로 찬찬히 노래하고 꿈을 꾸는 하루였으리라 느낍니다. 아무쪼록 마음 가득 평화와 나무 한 그루가 깃들 수 있기를 빕니다. 4347.5.2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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