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함께 이야기하는 하루



  《내가 라면을 먹을 때》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책이 있습니다. 하세가와 요시후미라는 일본사람이 빚은 그림책인데, 일본에 있는 여느 집에서 지내는 아이가 라면을 한 그릇 끓여서 먹을 적에, 이웃집 아이는 무엇을 하고, 또 이웃집 아이는 무엇을 하며, 또 이웃집 아이는 무엇을 한다고 찬찬히 보여줍니다. 이러다가,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한국에 있는 ‘이웃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러고는, 다른 나라 ‘이웃 아이’는 그무렵 무엇을 하는지 보여줘요. 그러고 나서 다른 나라 ‘이웃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이웃과 이웃을 보여주는 그림은 어느새 전쟁난민이 모인 마을에 있는 아이를 보여줍니다. 그러고는 전쟁터에서 어른이 쏜 총에 맞아서 거친 벌판에 자빠져 죽은 아이를 보여주어요.


  라면을 먹는 아이는 전쟁난민마을이 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비데에 앉은 아이나 바이올린을 켜는 아이나 야구를 하는 아이도 전쟁난민마을을 모를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 자전거를 몰며 신문을 돌리는 아이, 동생을 업은 아이, 학원에 다니는 아이, 집에서 컴퓨터게임을 하는 아이, 이런 아이 저런 아이 모두 전쟁난민마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할 수 있어요. 더더구나 어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어른이 쏜 총에 맞거나 어른이 퍼부은 폭탄에 맞아 죽은 아이가 이웃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할 수 있습니다.


  죽는 사람은 아이뿐 아닙니다. 어른도 죽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죽습니다. 게다가 슬픈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죽기만 하지 않아요. 어른들이 만든 입시지옥 때문에 한국에서는 해마다 수백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거의 안 나오지만, 참 많은 아이들이 입시지옥 때문에 마음앓이를 하다가 죽어요.


  우리 어른들은 왜 입시지옥을 그대로 둘까요? 우리 어른들은 왜 아이들을 대학교에 보내려 할까요? 우리 집 아이가 대학교에 붙으면 기뻐해야 할까요? 이웃집 아이가 대학교에 떨어지면 반겨야 할까요? 우리 집 아이가 대학교에 붙으려면 이웃집 아이는 대학교에 떨어져야 합니다.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면 모든 아이가 골고루 받을 수 있어야 올바른 일 아닌가 궁금합니다. 아주 마땅하거든요. 모든 사람은 똑같이 밥을 먹어야지요. 누구는 밥을 두 그릇 먹고, 누구는 굶을 수 없어요. 모든 사람은 똑같이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며 물을 먹어야 합니다. 돈이 많거나 얼굴이 예쁜 사람은 햇볕을 더 쬐어도 되지 않습니다. 모든 어른과 아이가 햇볕과 바람과 물을 똑같이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문구 님은 소설을 쓰다가 동시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개구쟁이 산복이》라는 동시집을 1988년에 선보였고, 2003년에 숨을 거두고 나서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라는 동시집을 새롭게 선보였어요. 이문구 님은 1988년에는 이녁 딸과 아들한테 들려줄 노래로 동시를 썼어요. 2003년에 숨을 거두고 나서 태어난 동시집은 이녁 손자한테 들려줄 노래로 동시를 썼다고 합니다.


  “내가 겨우내 꽁꽁 언 채 / 눈으로 목을 축이며 / 밭에서 견디는 것은 / 내년 봄에 / 노랑 물감 같은 / 장다리꽃을 피우기 위해서지요(씨도리 배추).”와 같이 흐르는 동시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을 기울입니다. 도시에 있는 아이들은 김치를 먹어도, 김치가 배추에서 온 줄, 또는 무나 갓에서 온 줄 모르기 일쑤입니다. 또, 배추나 무를 먹더라도 배추꽃이나 무꽃, 그러니까 장다리꽃이 무엇인지 모르기 일쑤요, 배추나 무에도 꽃이 피는 줄 모르기 일쑤예요.


  도시에서 지내는 어른은 얼마나 알까요? 도시에서 가게나 마트에만 다니는 어른은 노랗게 피는 배추꽃을 얼마나 알까요? 아니, 생각을 할까요? 들은 적이 있을까요? 무밭이나 배추밭을 지나가다가 꽃송이를 알아보고 기뻐할 줄 알까요? 장다리꽃은 유채꽃처럼 해사하게 노란 빛물결인 줄 마음속으로 그릴 수 있을까요?


  “들비둘기가 길에서 / 집비둘기를 보고 중얼거렸네 // 쟤들을 보면 안됐어. / 우리는 맑은 공기 깨끗한 물 / 산과 들이 온통 우리 차진데 / 쟤들은 집이 좁아 한뎃잠에 / 이 눈치 저 눈치 눈치꾸러기 / 매연에 찌든 꾀죄죄한 몰골로 / 쓰레기통 수챗구멍까지 뒤져 먹어서 / 비만증으로 어기적어기적 / 자동차 등쌀에 아차 할 때도 많고 / 보면 볼수록 영 안됐어(두 비둘기).”와 같이 흐르는 동시를 읽으며 새삼스레 생각을 기울입니다. 도시에서 지내는 집비둘기는 얼마나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시골마을 숲에서 지내는 들비둘기(멧비둘기)는 얼마나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도시에 있는 비둘기는 왜 도시에서 억척스레 살려 할까요. 도시 비둘기는 왜 시골로 떠나지 않을까요.


  새는 날개가 있으니 얼마든지 도시를 벗어나 갑갑하거나 메마른 터전을 등질 수 있어요. 느긋하고 아름다우며 푸른 숲에서 마음껏 살아갈 만해요.


  그런데 말예요, 다시 생각해 보면, 도시라 해서 처음부터 도시이지 않아요. 오늘날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구이든, 처음부터 이렇게 커다랗거나 어마어마하거나 무시무시한 도시가 아니었어요. 쉰 해 앞서를 떠올려 보셔요. 백 해 앞서를 그려 보셔요. 서울이건 부산이건 지난날에는 수수하거나 투박한 시골이었습니다. 서울도 부산도 수수하면서 투박한 마을이었습니다. 제비가 날고 박쥐도 있으며, 잠자리와 나비가 흐드러지던 시골마을이었어요.


  비둘기로서는 서울이 먼먼 옛날부터 이녁 어미 새가 태어나 살던 보금자리였다고 할 만합니다. 참새와 직박구리도 그래요. 도시를 떠나지 않는 새들, 아니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새들을 보면, 아무래도 이 새들은 이녁 어미 새가 먼먼 옛날부터 살던 보금자리를 차마 못 떠나고 그대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아닐까 싶곤 합니다.


  도시를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골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시에서 너무 고달프거나 괴롭기에 맑으며 푸른 숨결을 먹으려고 시골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돈벌이가 안 되어 숨구멍을 트려고 서울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어디가 고향일 될는지요. 우리는 어디를 고향으로 삼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지요. 우리 이웃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곁에 어떤 이웃을 두는가요. 우리는 이웃집 살림을 얼마나 읽거나 헤아리는가요. 나는 우리 이웃한테 어떤 사랑이나 꿈으로 깃드는가요.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사람이 이웃입니다. 함께 웃고 춤추는 사람이 이웃입니다. 함께 아끼고 보살피는 따사로운 손길이기에 이웃입니다. 함께 꿈꾸고 삶을 짓기에 이웃입니다. 4347.5.2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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